[시네 토크]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정우성

  • 윤용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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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2-21   |  발행일 2020-02-21 제43면   |  수정 2020-02-21
"돈 앞에서 지질, 위기 벗어나면 허세 충만, 또다른 얼굴로 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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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입국 관리소 직원 태영은 옛 애인 연희(전도연)의 사채 보증을 잘못 섰다가 조폭의 위협에 시달린다. 누군가에게는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는 첫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만, 정작 본인의 삶은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다. 그런 그의 앞에 인생을 바꿀 수 있는 거액의 돈이 나타난다. 영화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은 거액의 돈 가방을 놓고 벌이는 인간군상들의 욕망과 파멸을 보여준다. 정우성은 그 한 축에서 온갖 협박을 받으며 불안한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태영을 연기했다. 사채업자의 협박 앞에서는 지질하고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주다가도 위기를 벗어나면 이내 강한 척 허세 충만한 모습으로 돌아오는 인물이다. 정우성은 "시나리오를 읽는 내내 태영의 허점이 보였다"며 "그 점에서 어둡기도 했지만, 또 어떻게 보면 경쾌하고 연민이 가는 캐릭터"라고 정리했다. 최근 보여준 다채로운 모습의 연장선에서 한발 더 나아간 태영은 배우 정우성의 고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했다는 점에서도 반갑게 마주할 수 있는 얼굴이다.

▶밀도 있는 이야기와 쉴 틈 없이 몰아치는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시나리오 구성이 정말 좋았다. 누구 하나 소모되는 일 없이 인물들의 사연이 되게 촘촘하고 밀도 있게, 그리고 공감하기 쉽게 설명돼 있다. 돈이라는 선정적인 소재가 중심이 된 만큼 인간의 욕망에만 포커스를 맞출 수 있었을 텐데, 이를 차지하기 위한 인물 각각의 사연과 갈등, 고민에 주목한 게 좋았다."

▶평범한 인간 군상이지만 모두 돈으로 엮이면서 범죄를 저지른다. 그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태영을 어떤 인물로 이해하고 접근했나.

"영화에서 가장 공감할 수 있는 인물은 중만(배성우 분)이다. 악한 사람은 아닌데, 현실적인 절박함 때문에 많은 고민과 갈등 끝에 그런 선택을 한다. 물론 태영도 악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가 선택한 행위 자체가 범죄가 된다는 게 문제다. 반면 범죄의 큰 판을 짠 연희는 그중 가장 영화적으로 접근한 캐릭터다. 범죄를 정당화할 수는 없지만 각자 처해진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그들에 대해 자의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단해 욕하고, 손가락질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면 또 그럴 수는 없을 것 같다. 때문에 등장인물들에 대한 연민을 관객들이 느끼도록 만들어야 했다. 충분히 연민을 가질 수 있는 중만과 달리 태영은 별도의 작업이 필요했다. 약간의 헛웃음이 나오는 태영의 허술함과 호들갑을 약간은 풍자적으로, 그리고 조금은 과장되게 표현하는 것으로 그의 연민을 담아내려 했다."


욕망 좇아가는 군상들의 사연과 갈등
현실적 절박함에 인한 불가피한 선택
전도연과 첫 만남…반가움과 궁금증
고집피우는 모습까지 본받고싶을 정도
로맨틱 코미디로 다시 연기하고 싶어

2백만, 3백만명 영화 많이 나와야 성장
제작비 맞는 똑똑한 결과물 고민 필요
'똥개' '마담 뺑덕' 다양한 캐릭터 도전



▶그 과정에서 가장 크게 고민을 했던 건 뭔가.

"기시감이다. 윤제문씨(형사 역)와 정만식씨(고리대금업자 역)는 전작 '아수라'에서도 한도경(정우성)을 굉장히 압박하고 쪼는 역할이었다. 이들과 만났을 때 예전의 느낌과 감정이 우리도 모르게 소환돼 전작과 비슷한 관계로 비칠 수 있을 것 같다는 위험성이 인지됐다. 항상 이를 경계하면서 접근했다. 다만 두 사람이 느끼는 두려움의 감정은 차별되는데, 한도경과 달리 태영은 두려움보다는 불편하고 짜증나고 싫은 감정이 더 큰 편이다. 게다가 태영 스스로가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는 엉뚱한 자신감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리액션에서 과하지 않은 호들갑스러움을 더 많이 표현했다."

▶전도연과의 첫 만남도 기대와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그와의 연기호흡은 어땠나.

"일단 반가웠다. 사실 우리가 같은 업계에 있는 동료라고 하지만 서로 쉽게 만나거나 같은 작품에서 호흡을 맞출 수 있는 기회는 의외로 많지 않다. 이 기회를 빌려 내가 어떤 배우인지를 그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나 역시 전도연씨의 모습은 어떨지 막연한 궁금증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배우 전도연이라는 이름으로 지금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를 새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영화에 대한 애정과 열정, 현장에 대한 책임, 강단 있게 캐릭터를 구현해나가기 위해 간혹 고집을 피우는 모습까지 모두 본받고 싶었다. 경력이 오래되고 자기 세계와 색깔이 분명한 배우들끼리 마주할 때는 상대 캐릭터와의 교감을 이끌어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각자의 아이덴티티를 입증하는 것 또한 현장 분위기를 잘 이끌어갈 수 있는 중요한 요소이자 장치다. 모든 걸 교감할 수 있었던 뜻깊은 작업이었다."

▶호들갑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했는데 그런 태영의 허점과 호들갑이 가장 잘 드러난 장면이 연희(전도연)와 식탁에서 마주했을 때다.

"외형적으로 아무리 어울려도 감정적인 교감이 튕겨버리면 한자리에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 태영의 집에 갑자기 나타난 연희가 속옷차림으로 저녁 식사를 차리고 있는 모습에 태영은 만감이 교차했을 거다. 좀 전까지 자신을 배신한 그녀에게 마구 욕설을 퍼부었던 그가 순간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만큼 태영은 허당끼 충만한 허점과 집착이 강한 인물이다. 연희에게 배신당한 아픈 감정을 스스로 부정하고 그걸 되돌리기 위해 다시 집착한다. '사연이 있었겠지, 그러니까 그런 선택을 했을 거야. 내가 못난 남자는 아니잖아'라고 모든 것을 자기 식대로 합리화한다. 태영은 그런 생각이 자신을 얼마나 연약하게 만들고 쉽게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지를 모른다. 외려 배신한 이유를 들어보고 내가 널 용서할지 말지를 결정할 것이라고 호기까지 부린다. 그게 태영의 허술함인데 식탁 장면에서 그게 잘 드러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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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로서 틀에 얽매이지 않는 행보가 인상적이다. 최근 감독과 제작자로도 보폭을 넓히고 있는데, 다양한 위치에서 한국영화 시장을 본 느낌은 어떤가.

"한국영화가 산업화 됐다고 하지만 아직 완성된 건 아니다. 그 쪽으로 흘러가는 과정 속에서 여전히 장점과 단점이 돌출되고 있다. 단점은 대작 위주로 영화가 만들어지다 보니 다양성의 훼손이 발생한다는 점이다. 개성과 색깔이 뚜렷한 영화를 만들었다 하더라도 처음 의도한 대로 고집있게 편집할 수 있는 감독과 제작자는 많지 않다. 이 영화 역시 그런 고민 속에서 완성됐지만 감독님이 의도한 방향성은 나름 잘 유지됐다고 본다. 대중을 대상화시켜 선입견 가득한 시각으로 대하게 되면, 익숙하고 편한 영화만 만들어지고 낯설거나 독특함이 느껴지는 영화들은 다 외면받는다. 그러다 보면 개성 없이 서로 비슷비슷한 영화들로 갈무리된다. 그런 측면에서 '지푸라기라고 잡고 싶은 짐승들'은 좀 더 용기와 자신감을 갖고 접근했던 작품이다. 어쨌든 산업은 자본으로 돌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투자에 대한 책임은 가져야 한다. 다만 대작영화는 대작영화에 맞게, 중급영화는 중급영화에 맞게 툴을 인정하고 접근해야 한다. 규모에 상관없이 더 많은 관객을 좇다보면 다양성을 시도할 수 있는 여지와 가능성이 상당히 줄어든다. 건강하지 않은 시장이 형성되는 것이다. "

▶그 해결책은 뭐라고 생각하나.

"사실 1천만 영화도 필요하지만 200만~300만 영화가 많이 나와야 영화시장이 건강하게 성장할 수 있다. 흥행에 대한 과도한 욕심은 지양해야 한다. 그보다는 제작비 규모에 맞는 똑똑한 결과물을 어떻게 만들지에 대한 고민이 있어야 한다. 초심을 잃어서도 안 된다. 소박하게 시작했다가 개봉을 앞두고 허황된 욕심으로 갑자기 편집을 바꿔 독창성과 개성을 훼손시키는 경우를 종종 목도했다. 누구 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 배우 역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정해진 예산이 있는데 내가 들어왔다고 예산을 더 늘려야 한다는 얘기를 하면 안된다. 배우는 연기로만 책임을 지면 된다. 그리고 내가 캐스팅됨으로써 제작이 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기고, 좀 더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고 생각하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배우는 배우대로, 감독과 스태프는 그들대로 자신의 룰에 맞는 역할과 작업을 해나가면 된다. 리스크 케어를 자본에만 맡기지 말고 같이 조금씩 나누는 게 필요하다."

▶잘 생긴 배우로서 일종의 핸디캡을 깨는 노력을 줄곧 해왔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나 스스로 자유로웠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동안 나에게 규정된 이미지, 수식어를 깨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를 벗어나는 게 쉽지 않았다. 20대부터 어떤 이미지로 규정되는 게 싫어서 '쟤는 왜?'라는 의외의 선택들을 꾸준히 해왔다. 하지만 관객은 그리 달가워하지 않았다. '똥개'(2003)의 철민 역을 했을 때 '왜 니가 무릎나온 추리닝을 입고 사투리를 하냐', 또 ''마담 뺑덕'은 왜 선택을 했냐'는 얘기를 들었다. 그래도 흔들림 없이 내 길을 걸어왔다. 다행히 그런 노력과 시도가 받아들여진 때문인지 지금은 그런 모습을 인정해주는 것 같다. 덕분에 나 역시 좀 더 자유롭고 유연해질 수 있었다. 사실 배우 입장에서 제일 좋은 건 관객이 별다른 기대 없이 극장에 와서 영화를 즐기는 거다. 그리고 각자의 취향에 따라, 저 배우의 연기가 이번엔 '좋네, 시원찮네'라고 평가받는 거다. 최소한 내가 구현하는 캐릭터들은 그렇게 편안한 마음으로 즐겼으면 한다."

▶그간 많은 장르와 캐릭터를 거쳤지만 멜로물에 등장하는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팬들도 많다.

"그래서 다양성 얘기가 나오는 거다. 예전에 비해 멜로물이 많이 줄었다. 한국은 사회적 분위기와 굉장히 맞물려 있다. 사회 분위기가 좀 안정되고 편안해졌을 때는 알콩달콩한 사랑 이야기를 보고 싶어 하지만, 언젠가부터 극장에서 보기 힘든 장르가 됐다. 멜로를 포함해 다양한 장르가 제작되는 시대가 오기를 바란다. 개인적으로 멜로는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가 아직까지 대표작으로 남아있다. 나뿐만 아니라 멜로를 했던 배우들은 모두 멜로 장르에 대한 로망과 기대를 갖고 있다. 만약 하게 된다면 전도연씨와 로맨틱 코미디로 다시 호흡을 맞추고 싶다."

글=윤용섭기자 yys@yeongnam.com
사진제공=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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