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연필의 무게 걸음의 무게] 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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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31   |  발행일 2020-07-31 제38면   |  수정 2020-07-31
대구 서성로집 냉골방에 웅크려 지내다 나와 쓴 '봄은 고양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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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 생가터
대구 친일파 부호 父·계모·21명 형제
모성결핍과 가족 냉대, 남루하고 말라

스물아홉 살의 음울한 죽음
생가터 옆 고택 유독 컴컴한 작은 방
'상화와 고월'에 묘사한 죽어간 방일까
친우와 향우 백기만·이상화·이근상
사흘간 추도한 조양회관 유고 전람회

詩·소설 번역물, 생애동안 42편 작품
만년필 한자루·날깃한 노트 한권 남겨


불행한 사람들이 있다. '헐벗은 버들가지에 걸려 낡고 지처 우는' 연(鳶)처럼 고독하고 절박한 상황에 처해도 고흐처럼 '생활'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예술에 혼신을 다해 매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신산한 삶의 궤적을 읽거나 보고 들으며 우리는 깊은 밤 슬픈 꿈에 깨어나 운 것처럼 가슴 아파한다. 백여 년 전 대구에서 '세상을 등진 채 오랫동안 권태와 우울과 참회로 된 무거운 보퉁이를 둘러매고' 걸어간 이가 있다. 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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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월(古月) 이장희(李章熙)
그 걸음을 따라 비 내리는 어느 여름날 오후 '옛 생각의 그림자'가 되어 대구 서성로 1가 105번지로 간다. 고월의 생가터다. 나무대문이 굳게 닫힌 옆집은 동무였던 상화(尙火)의 백부 이일우(李一雨) 고택인데 오래 발길이 닿지 않았던지 보도 블록에 이끼가 짙다. 돌과 흙을 섞은 오래된 담 그리고 석회로 마감한 낡은 지붕의 처마도 처연하다. 생전에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아 문학사상사에서 한만영(韓萬榮) 화백에게 의뢰하여 제작했다는 그의 초상화가 길에 겹쳐 떠오른다. 고흐의 자화상 같은 허허로운 눈빛과 푸르스름한 낯빛, 고흐와 고월 이름마저 닮은 건가.

문득 비 젖은 고택의 담벼락에 이어진 '닥트' 공장의 내부가 눈에 들어온다. 예사롭지 않은 유리 미닫이가 덧달린 장지문과 기와지붕이 공장의 천막 천장 아래 그대로다. 양해를 구하고 둘러보니 사랑채와 중간 마루, 뜰도 백여 년 동안 거의 손을 안 댄 짜임새 있는 고가(古家)다. 흙이 드러난 뒤란을 돌자 입구에서 분명히 보았지만 보이지 않던 행랑채 끄트머리에 '한 칸이 채 안 되는' 방이 나온다. 유독 컴컴하다. 혹시 목우(牧牛) 백기만(白基萬)이 '상화와 고월'에서 묘사한 고월이 죽어간 그 방은 아닐까.

'실체 없는 그대의 이름! 실로 무겁고 답답하다. 실체가 없거든 이름도 없을 일 아닌가. 실체가 가거든 이름마저 갈 것 아닌가.' 원효의 게송처럼 1929년 11월 고월의 부음을 신문 기사로 알게 된 공초(空超) 오상순(吳相淳)은 조사(弔辭)를 읊듯 이렇게 탄식했다. 고월과 특히 각별했던 그가 방랑하며 머물던 동래 범어사에서 소식을 접하고 한달음에 달려왔지만 장례는 이미 치러진 뒤였고 백기만, 이상화, 이근상 등 고월의 향우들이 설계해 사흘간 추도한 조양회관 유고전람회에서 공초는 그렇게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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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희 추도식
대구에서 손꼽히는 친일파 부호였던 아버지 이병학과 오래 불화했던 고월은 죽기 전 사나흘 간 문 밖 출입을 않더니 기거하던 방의 바닥에 어항 속 갇힌 금붕어를 그려놓고 쥐 잡는 약을 먹었다. 의사가 위세척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아버지가 절망하며 뒹굴었으나 고월은 끝까지 앙다문 입을 열지 않더라 했다. 유서도 유언도 없었다. 1929년 11월3일 오후 1시, 스물아홉 살, 더없이 음울한 죽음이었다.

아버지 이병학은 중인 집안 출신으로 조선말 궁내부 주사를 지냈다. 관직을 내려놓은 후 대구로 와 소금 도매업으로 치부했다. 병약했던 어머니 박금련은 고월이 다섯 살 때 사망했고 아버지가 곧장 들인 두 계모와의 사이에 의붓동생들이 태어나 도합 스물한 형제가 되었다. 부잣집 아들이었으나 남루한 형색과 영양실조에 걸린 듯 파리한 얼굴, 삐쩍 큰 키에 소극적이고 침울한 아이였다는 백기만의 회고로 보아 생모의 부재, 모성 결핍, 계모와 많은 의붓형제와의 반목, 아버지의 냉담과 방치가 거의 학대에 가깝지 않았을까 싶다.

어머니 어머니라고/ 어린마음으로 가만히 부르고 싶은/ 푸른 하늘에/ 다스한 봄이 흐르고/ 또 흰별을 놓으며/ … ('청천(靑天)의 유방(乳房)' 일부) 늘 땅바닥을 보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걷더라던 아이는 대구보통학교를 졸업한 열세 살에 교토 경도중학교로 유학보내진다. 친일과 사업 확장에 혈안인 아버지 이병학의 복안은 총명한 아들의 미래에 투자한 것에 다름없을 터. 어쨌든 고월은 육년간 교토에서 집안사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를 펼치며 마음껏 문학을 접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특히 일역(日譯)된 베를렌, 보들레르, 하기와라 사쿠타로(萩原朔太郞)에 경도되는데 당연한 시적 자양분에 보태어 그들에 대한 오마주는 고월의 태생적 염결성에 염세성을 더하게 되었으리라 유추된다.

그동안 이병학은 대구의 대표적 친일파 박중양 등과 조선총독부의 중추원 참의로 특히 문화재 도굴과 밀반출, 조선미술품제작소, 선남은행, 남선전기 등으로 조선에서 거금을 착취해 간 오구라 다케노스케와 짝패가 되어 맹활약 중이었다. 그때 유학에서 돌아온 아들에게 일인을 상대하는 자신의 사업을 돕거나 총독부 직원이라도 되어주길 요구했으나 고월은 일절 듣지 않았다. 치부와 영달을 위해 친일매국을 불사하던 이병학은 당연히 아들을 인생 낙오자로 취급하고 거의 모든 금전적 지원을 끊어버렸다.

빙허(憑虛) 현진건(玄鎭健)이 혀를 차며 따뜻한 곰탕집에 데려갈 만큼 서울 장사동 집과 대구 서성로집 냉골방에 웅크려 지내던 고월을 백기만이 주선하여 1924년 양주동, 유엽, 이상백, 김동환 등이 발행하는 '금성' 3호에 '봄은 고양이로다' 등 5편의 시와 톨스토이의 소설 '장구한 귀양'을 번역 발표한 것을 시작으로 생애 동안 총 42편의 시를 썼다.

등단과 동시에 '절대 자아의 순전함을 추구하는 상징주의' '감각적 낭만주의'라는 호평과 '상징을 위한 상징' '붓장난' 같은 혹평을 받았다. 소실된 유고 8편은 교남학교 교가 사건 때 일경의 가택수사를 당한 상화의 집에서 사라져 전하지 않는다. 1927년 '고월(苦月)'이란 필명으로 '신민' 10월호에 '학대받는 사람들' 이란 의미심장한 제목의 소설도 발표했다.

고월이 죽기 사흘 전 피골이 상접한 채 공초가 묵던 남산동 여관을 찾았더란 이야기는 전설처럼 회자된다. 공초의 부재에 눈물이 글썽한 채 황혼에 힘없이 돌아선 그의 뒷모습을 전해들은 동무들은 통곡했다. 오래된 만년필 한 자루, 날깃한 노트 한 권만을 세상에 남긴 채 고월은 그렇게 홀홀히 저 세상으로 건너갔다.

박미영 시인
'어쩌면 그렇게 차갑게 살았을까. 어쩌면 그렇게 곱게 살았을까. 어쩌면 그렇게 아프게 살았을까.' 6·25 때 '국경의 밤'을 쓴 김동환과 생이별한 후 대구에 피란온 소설가 최정희가 고월의 삶을 또 이렇게 한탄했다. 교토 유학 시절 말 한 번 건네지 못한 포목상집 딸 '에이코'에 대한 그리움을 시 '동경(憧憬)'으로, 고월이 단 한 번도 곁을 주지 않았던 집안이 정한 정혼자가 조양회관 추도식 구석자리에 앉아 홀로 울고 있더란 풍문이 있지만 그가 생전에 밝힌 바는 없다.

아무것도 업든 우리집 뜰에/ …/ 밝은 봉선화는/ 이 어둠 컴컴한 집의 정다운 등불이다.('봉선화' 일부) 장마에 비는 종일 내리고 길고양이들이 젖은 채 골목을 쏘다닌다. 며칠 전 들여다보았던 그 '닥트' 공장의 내부에 고월의 고혼(孤魂)이 혹시라도 서려 있었다면, 지금 걷는 골목 언저리에 핀 저 빠알간 봉선화의 애틋함에 기대어 깊은 애도를 보낸다.
박미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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