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의 바다인문학] 멸치의 재발견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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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31   |  발행일 2020-07-31 제37면   |  수정 2020-07-31
"어야라 차이야~" 뭍에서 그물 털며 또한번 하늘 난후 밥상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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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는 청어목 멸치과로 배는 은백색이며 등은 암청색이다. 위턱이 아래턱보다 길다. 4~5천개의 알을 낳는다. 수만 개의 알을 낳은 물고기에 비하면 적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몸집에 비하면 엄청난 양이다. 여름과 가을이 산란철이지만 겨울을 제외하고 일년 내내 알을 낳는다. 사진은 멸치털이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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횃불로 멸치를 유인해 잡는 멸치잡이(제주).

선창 후미진 곳 오두막에서 희미한 불빛과 함께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 밤중에 작은 창고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것일까. 잠시 후 어머니가 막 삶은 멸치를 채반에 담아 나왔다. 이미 가로등 아래에 여러 개의 채반이 널려 있었다. 남편은 화덕 위에서 멸치를 삶고 아내는 삶은 멸치를 채반에 담아 널고 있었다. 멸치잡이로 평생을 살아온 노부부다. 조심스레 오두막집 안으로 들어서니 하얀 수증기 사이로 남편이 은백색 멸치를 가마에 붓고 있었다. 펄떡이던 멸치들은 솥 안으로 미끄러졌다. 부뚜막 아래 바구니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멸치도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펄떡거린다. 싱싱하다. 오두막 앞에서 보이는 어장에서 건져온 멸치다. 5분 거리에 있는 마을 오두막에서 비추는 가로등 불빛 덕분에 밤 조업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비렁길로 유명한 전남 여수 금오도 동쪽 끝자락에 있는 멸치마을인 장지마을, 그 여름밤의 반짝거리는 풍경이다.

멸치 맛은 갈치가 안다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생선
겨울 제외 일년내 산란, 4~6월 금어기
크기별 세멸·소멸·중멸·대멸·특대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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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남해에 가면 죽방렴으로 멸치를 유인해 통째로 잡아 건조하기 때문에 가장 비싸다.

멸치도 생선이다. 대한민국 백성들이 가장 사랑하는 생선이다. 멸치는 행어, 잔어, 멸오치, 몇, 멸, 멸치, 명아치, 메르치, 멧치, 메레치, 열치, 잔사리, 추어, 돗자라기, 시화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 '자산어보'에서는 속명을 멸어(蔑魚)라 했다. 이름부터가 업신여긴 흔적이 역력하다. 등마루는 검고 배는 희며 비늘이 없고 아가미가 작다. 장마철을 만나 썩어 문드러지면 밭에 거름으로 쓰는데 잘 삭은 분뇨보다 낫다 해서 실제로 화학비료가 없을 때는 제주나 남해 바닷마을에서는 정어리나 멸치 등을 어비로 사용했다.

멸치는 청어목 멸치과로 배는 은백색이며 등은 암청색이다. 위턱이 아래턱보다 길다. 4천~5천개의 알을 낳는다. 수만 개의 알을 낳은 물고기에 비하면 적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몸집에 비하면 엄청난 양이다. 여름과 가을이 산란철이지만 겨울을 제외하고 일년 내내 알을 낳는다. 산란 후 하루이틀이면 부화를 하며 성장 속도가 빠르다. 잡혀먹기 전에 빨리 자라야 하며 개체 수도 많아야 한다. 모두 생존전략이다. 겨울은 제주도까지 내려갔다 봄철에는 연안으로 들어와 산란하고 여름에는 서해와 동해로 북상을 했다가 가을철에는 제주도로 내려온다. 산란기에 해당하는 4~6월은 멸치를 잡을 수 없는 금어기다.

멸치는 크기에 따라 세멸·소멸·중멸·대멸·특대멸로 구분되지만 어민들은 지리·가이리·고바·주바·오바라는 명칭에 익숙하다. 멸치의 어법과 이용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일제강점기의 수산업 수탈의 아픈 상처이기도 하다.

멸치 잡는 방법들
긴 자루그물·후릿그물·전통식 죽방렴
젓갈용 유자망…부산 대변항 멸치털이
제주 돌그물·한림해수욕장 햇불 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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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조림

우리나라에서 멸치잡이 어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일제강점기. 통영과 거제 일대에 일본인 이주어촌이 형성되면서다.

멸치를 잡는 방법은 낭장망(囊長網), 죽방렴, 분기초망(焚寄抄網·챗배), 휘리망(揮罹網·후릿그물), 기선권형망(機船權現網), 유자망(流刺網) 등이 있다. 낭장망은 수심이 깊지 않고 조류가 빠른 해역에 긴 자루그물을 넣어 멸치를 잡는다. 진도, 해남, 완도, 부안 등 서남해와 서해 일부에서 많이 하는 멸치잡이 방법이다.

죽방렴은 남해, 창선, 사천 일대에 남아 있는 500여년을 이어온 멸치잡이 방법이다. 그런가 하면 함경도와 강원도 연안 어촌에서는 후릿그물로 멸치를 주로 잡았다. 챗배는 남해와 제주에서 멸치를 잡을 때 사용한 어법으로 특히 가거도 멸치잡이 방법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유자망으로 잡은 멸치는 젓갈용으로 부산 대변항 일대에서 멸치털이로 유명하다. 기선권현망은 어선(40t 규모) 2척이 하나의 그물을 끌면서 중층과 표층에 있는 멸치를 잡는 어업이다. 어군을 찾는 어탐선, 그물을 끄는 본선 2척, 멸치를 삶아 운반하는 가공운반선 2척 등 5척이 선단에 30여명의 선원이 조업한다. 이러한 멸치잡이 방법 중 가장 많은 어획량을 올리는 어법은 80%를 차지 하는 기선권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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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기장군 기장읍의 명물인 멸치구이(대변항).

바다가 다르면 멸치 잡는 방법도 다르다. 제주의 멸치잡이는 독특했다. 제주목사 이형상은 '남환박물'에서 '제주도의 바다는 사방 칼날 같은 돌로 묶여있다'고 했다. 그 바다에는 예나 지금이나 그물을 놓을 수가 없다. 겨우 들망으로 자리를 뜨는 정도다. 이런 제주바다에서도 봄이면 멸치를 기다렸다. 검은 돌을 얼기설기 바다에 쌓아 담을 쳤다. 제주사람들은 바다건 집이건 어디에서나 돌 쌓는 기술만큼은 장인급이었다. 비양도가 바라보이는 금능마을에는 그렇게 만든 돌그물이 세 개나 있었다. 제주에서는 이를 '원담'이라 불렀다. 원담에 멸치가 들면 서귀포에서 상인들도 멜을 사러 왔다. 어떤 멸치보다 실하고 맛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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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젓갈.

원담에 멜이 드는 날은 '멜이요, 멜들어요'라며 소리를 질러댔다. 이 소리를 들은 마을주민들이 쪽바가지를 가지고 나와 필요한 만큼 퍼갔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다른 마을 사람들에게 파는 것은 원담지기 몫이었다. 10년 전에 금능원의 원담지기한테 들은 이야기다.

한림해수욕장에서는 가끔 횃불을 들고 멸치를 쪽바가지로 뜨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한다. 주광성인 멸치가 연안으로 들어오면 횃불을 들고 나가서 쪽대로 떴다. 비양도 어장에서는 6~8월 잠깐 들어오는 꽃멸(샛줄멸)은 유자망을 드리워 잡기도 한다.

멸치맛에 빠지다
부산·통영·남해에서만 맛보는 멸치회
싱싱한 멸치 급랭보관 사철 멸치쌈밥
전라·남해안 김장 멸치젓, 제주 멜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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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젓갈.

멸치축제가 열리는 부산시 기장군 기장읍 대변항이나 경남 남해 미조항은 봄이면 멸치털이가 한창이다. 유자망에 걸린 멸치를 가져와 포구에서 터는 일이다. 10여명이 '어야라 차이야, 어야라 차이야' 소리에 맞춰 그물을 털면 멸치가 하늘로 솟구쳤다가 떨어진다. 바다에서 그물에 걸려 뭍에서 하늘을 난 후 비로소 젓갈이 되어 밥상에 오른다.

부산·통영·남해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것이 멸치회다. 봄에 잡은 대멸의 머리와 뼈를 제거하고 채소와 함께 무친다. 남해도에서는 멸치쌈밥이 인기다. 제철만 아니라 싱싱한 멸치를 급냉 보관했다 사철 멸쌈밥을 전문으로 내놓기도 한다. 기장의 대변항에서는 멸치구이와 튀김까지 나온다. 경기·충청지역은 김장을 할 때 새우젓을 많이 사용하지만 전라도나 남해안 지역에서는 멸치젓을 많이 이용한다. 이외에도 동해안 지역에서는 꽁치나 청어젓, 제주에서는 멜젓이나 자리젓을 이용했다.

멸치젓의 역사는 로마시대 '가룸'이라 불렸던 발효생선에서 시작된다. 가룸이 있어 멀리까지 군대를 이끌고 나갈 수 있었다. 로마군이 프랑스 갈리아를 점령할 수 있었던 것도 가룸이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에는 액젓을 넣지 않는 요리가 없었다. 빵과 보리죽 외에 먹을 것이 없었던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룸은 비타민·미네랄 등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는 음식이었다. 로마 갈리아 지방의 항구가 액젓생산의 중심이었다. 그곳의 바닷가 작은 목욕탕처럼 생긴 구덩이가 멸치젓을 담갔던 곳이다.

참치와 고등어로 만든 가룸이 최상품이었고, 멸치로 만든 것은 저렴해 서민들이 즐겼다. 비싼 가룸은 향수의 값과 견줄 만큼 비쌌다. 가룸은 로마의 음식 요리에 빼놓을 수 없는 조미료였다. 지중해 연안의 나라들의 엔초비 소스의 원조가 가룸이다.

멸치로 만든 소스를 이야기하려면 베트남을 빼놓을 수 없다. 베트남에서는 음식을 만들 때 많이 사용하는 조미료가 '느억맘'이다. 멸치와 소금으로 발효시킨 어장이다. 캄보디아, 타이, 라오스,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에서 모두 멸치로 만든 어장을 사용한다. 그리고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에서는 우리나라처럼 멸치국물로 조리를 한다.

인간뿐 아니라 갈치, 농어, 다랑어, 고래류 등에게도 멸치는 소중하다. 또 물새들도 멸치를 기다리고 있다. 먹이사슬에서 멸치는 어업생산량을 가늠하는 지표가 된다. 플랑크톤이 해양생태계의 기초라면 멸치는 바다의 육식동물의 생존기반이다. 인간에게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특히 낭장멸치는 슬로푸드국제협회에서 '맛의 방주'로 지정했다. 맛의 방주는 사라질 위기에 있는 품목이나 음식을 지키고 보존하는 슬로푸드운동의 핵심 프로젝트다. 또 전통멸치잡이 어법인 죽방렴은 명승과 국가중요어업유산으로 지정했다. 가거도의 멸치잡이노래는 중요무형유산이다. 작고 보잘것없는 생선처럼 보이지만 수산인문학적 측면에서 바라보면 멸치의 역할은 너무나도 크다.

(광주전남연구원 책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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