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림 풍에 갇히면 '그림 그리는 기계'…해마다 봄 오듯 성실히 그려왔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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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11-06   |  발행일 2020-11-06 제34면   |  수정 2020-11-06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백세 앞둔 화백 전선택

한 그림 풍에 갇히면 그림 그리는 기계…해마다 봄 오듯 성실히 그려왔다
요즘은 다리근육이 약해져 산책도 못한채 아파트 안에서만 머무른다. 현관 바로 문간방이 그의 아틀리에다. 눈앞에 있는 개인전 준비를 위해 초침처럼 정확하고 성실하게 움직인다.

무려 왕복 40리. 학창 시절, 난 등교 시간에 맞추기 위해 매일 마라토너처럼 뛰어다녀야만 했다. 국민학교 2학년 때 비로소 내 유전자 한 곳이 뜨겁게 상기된다. 담임선생으로부터 '너 그림 참 잘 그리는구나'라는 칭찬을 받는다. 첫사랑처럼 벅찬 감흥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교실 창문 너머로 윤슬 가득한 대낮의 바다, 세상에 그렇게 영롱한 보석함도 없었다. 바닷가에서 본 온갖 생선들. 그게 오랫동안 내 그림의 소재가 되어주었다. 5학년 때 민족운동가 남강 이승훈이 세운 오산중학교에 입학했다. 김소월·백석 시인, 그리고 화가 이중섭이 선배였다. 날 화가로 승격시켜준 유학파 화가도 거기서 만난다. 임용련 선생이었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을 피해 도미, 미국 시카고미술학교와 예일대를 졸업한 국내 첫 미국 유학파 화가였다. 그는 나의 신세계. 그래서 일거수일투족을 벤치마킹했다.

이중섭 다니던 오산중 입학
北에선 맘껏 못그릴 거 같아
월남 후 미술선생으로 부임

대구서 그림인생 2막 시작
1960년부터 국전 4연속 입선
야박한 대구 화단, 차츰 인정


◆이중섭은 내 중학교 선배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 도쿄 가와바타 미술학교에 입학한다. 학비는 신문 배달로 조달했다. 나는 비교적 다른 학우보다 데생 테크닉이 나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1943년 귀국했고 광복하던 해 고향 곽산보통학교에서 70여 점을 갖고 좀 유치한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북으로 진주한 소련의 기세를 보니 거기선 도저히 그림을 자유롭게 못 그릴 것 같아 월남했다.

1947년 충북 영동중 미술선생으로 부임한다. 6·25전쟁 직후 김천농림고를 거쳐 54년 내 22년간의 신산스러웠던 방황기는 경상중으로 발령나면서 일단락된다. 맘에 평화가 찾아왔다. 제2의 고향인 대구에서 비로소 내 그림 인생의 2막이 장대하게 펼쳐진다. 50년대는 제대로 된 유화물감을 구하기 어려워 소묘와 수채화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난 초창기 누구보다 인생 데생에 심혈을 기울였다. 1955년 4월 대구 미공보원 화랑에서 이중섭 개인전이 열릴 때 나는 선배인 이중섭을 내 집으로 초대했는데, 그때 그림에 임하는 그의 태도를 들을 수 있었다.

아무튼 내 그림은 60년대로 접어들면서 정물·구상주의란 틀에서 벗어나려고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한 그림 풍에 갇히면 그림 그리는 기계…해마다 봄 오듯 성실히 그려왔다
자신의 지난 삶을 정리한 에세이집 표지의 드로잉으로 그려진 30대의 전선택이 60년 뒤의 그를 응시하고 있다.

◆처음엔 무정했던 대구화단

50년대 대구화단은 내게 좀 야속하고 야박하기만 했다. 월남 화가라서 그런지 쉽게 포용해주지 않았다. 황해도 해주에서 월남한 신석필은 동향 의식 때문인지 나와 죽이 맞았다. 2017년 그가 작고했을 때 빈소에서 가족을 잃은 듯 슬퍼했다.

1960년부터 내리 네 번 국전에 입선했다. 지역에서도 차츰 내 존재감을 인정해주었다. 하지만 난 파당적이고 암투적인 국전이 적성에 맞지 않았다. 등을 돌리고 작업에만 매진했다. 교사 생활조차 창작에 방해가 되었다. 대륜중에서 16년 봉직한 뒤 자유로운 작품활동을 위해 63년 사직서를 던졌다.

내 화풍에도 큰 변화가 왔다. 곧이곧대로의 세상이 아니라 전선택만의 프리즘을 통해 사물을 재편집해나갈 수 있었다. 어떨 때는 몬드리안의 그림 같은, 기하학적 분할기법의 산과 하늘, 그리고 꽃과 새. 이집트 벽화처럼 평면으로 내려앉은 형태를 좇았다. 내 방식대로 느껴진 선과 면, 색조를 호출시켰다. 세상은 내 맘대로 바꿀 수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물감을 갖고 현실을 맘대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그것도 또 다른 방식의 '천지창조'라 할 수 있다.

나는 70년대로 접어들면서 자연(풍경)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었다. 대상이 가진 본래의 부피를 평면으로 환치시켰다. 청동 조각 같은 질감도 도입했다. 하지만 모든 형상을 뭉개고 오직 색만 남기는 극단적 초현실주의는 거부했다. 그게 유행했지만 난 그 대열에 편입되고 싶지 않았다. 이해될 수 있는 미학의 극치점을 향해 진군했다.

1978년에 그린 '소녀'는 한 포기 식물 같았다. 초창기 인물화가 그렇게 모던하게 진화한 것이다. 산의 계곡 주름도 사라졌다. 삼각형, 사각형, 원형 등 도형적 이미지로 변주했다. 색면화(色面) 같았다.

교직 떠나자 화풍에도 변화
70년대 극단적 초현실주의
그 대열에 편입되기 싫었다

95세 단짝 아내는 요양원에
이제는 내 아이가 된 아내
작업실 못와도 마음은 함께

◆4회 개인전부터 인정받아

대구화단의 저력은 상당했다. 1920년대 서울·평양과 함께 서구미술의 유입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다. 서동진, 이인성, 이쾌대, 박명조, 김용조, 서병오, 서동균 등 지역 출신의 근대 서화가들에 이어 1950년대 전쟁의 아픔을 딛고 문화예술의 재건 운동에 앞장섰던 주경, 손일봉, 정점식, 강우문, 장석수 등은 대구미술의 신지평을 열었던 주역들이었다. 대구 미술계는 일제강점기 서양화단을 주도했던 화가들의 작고와 절필, 월북 등으로 침체기를 겪게 되지만 서울 정규대학에서 미술교육을 받은 지역출신 미술인들이 지역미술대학 교수로 부임해 오면서 새로운 활력을 띠기 시작한다. 70년대 초를 강타했던 대구 강정현대미술제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도약대랄 수 있다.

나는 그런 흐름과 맞물려 1969년 공화화랑에서 4회 개인전을 열었는데 비로소 주류 화단으로부터 제대로 된 축하를 받는다. 신경향의 현대미술 인프라 구축을 위해 1970년 '이상회'란 미술단체를 결성했다. 서창환, 강우문, 이복, 김진태, 권영호, 홍성문, 박병영, 변유복, 그리고 나도 그 주역 중 한 명이었다. 81년 그게 '한국신구상회'로 바뀐다. 이제 많이들 세상을 떠나고 나와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80~90대 현역 원로화가라고 해봐야 김종복, 최학노, 김진태 정도밖에 없다.

◆일과 예술 사이

일에 매진하는 것과 예술(그림)에 매진하는 것. 매진한다는 측면에서는 공통점이 있지만 일이란 창조적인 구석보다는 단순반복적인 흐름이 지배적이고 그림은 항상 그걸 넘어서려고 하니 일의 고단함과 달리 예술의 결핍성 때문에 화가는 매 순간 자기를 부정해야 하고 저항해야 한다. 그 너머의 그 너머, 또 그 너머의 그 너머. 이렇게 무한대로 달아나는 창조성의 도달점. 시도는 할 수 있어도 도달할 수는 없다. 그게 예술의 한계이자 예술의 위대성이다. 괜찮다 싶은 풍의 그림에만 갇혀 있다면 엄격히 말해 그런 화가는 '그림 그리는 기계'에 불과하다. 그림이 중년기에 접어들면 구상도 비구상으로 넘어가기 위해 크게 요동질을 친다. 중력을 벗어나 '무중력권'으로 가려는 '극치의 작가정신'이랄 수 있다. 그리고 말년기, 죽음의 그림자가 밀려들 때쯤엔 '세월의 한 수'가 개입하게 된다. 미완의 완작(完作) 같은 마스터피스(Masterpiece·불후의 명작)를 남기게 된다. 모든 아티스트는 그걸 위해 존재한다.

무명시절에는 그림값이 제대로 책정되지 않는다. 어느 정도 알려지면 호당 가격이 형성되고, '모나리자급'이 되면 돈을 주고도 작품을 살 수 없게 된다. 그 작품은 이미 창작자의 손에서 벗어나 하나의 '역사'가 된다.

나는 매년 봄이 오듯, 나무에 이파리와 열매가 달리듯,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듯 성실하고 꾸준하게 그려왔다. 내가 지금 비록 아흔아홉이라지만 난 여전히 처음 물감을 푸는 미술학도와 다를 바가 없다.

내게는 기괴광란(奇怪狂亂)의 혈기가 별로 없다. 내 예술적 열기는 지극히 평순했다. 예전 스스로 도배질하는 선비처럼 그렸다. 단아한 손가락으로 한지를 정성스럽게 잘라 벽에 무심하게 붙이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캔버스 앞에 앉은 내 얼굴. 말갛게 내려앉은 초겨울 계곡물 같다. 내 생의 한쪽은 늘 그렸고 또 한쪽은 늘 가르쳤다. 그림과 가르침 속에 나만의 세상이 녹아 있다. 나는 지금도 나의 44번째 개인전(고산도서관)에 내놓을 작품을 정리하고 있다. 연주하다가 죽음을 맞는 예술가. 은퇴가 없는 예술인 탓이기 때문에 우린 그걸 당연시 여겨야 한다. 내가 왜 존재하는지를 깊게 생각하지 않는 이들은 나에게서 나이만을 읽고 가려 한다. 내게 장수비결을 묻는 건 결례다. 수명이 길고 짧은 건 내 소관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의 그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지니고 있는가? 기존 그림과 어떻게 다르게 그릴 것인가? 그런 질문을 해주길 바란다. 그러니 나는 후학들을 위해 '세상은 자고로 이러하거늘'과 같은 늙어빠진 덕담을 하고 싶지 않다.

직장인이 퇴근할 무렵인 오후 8시에 난 취침한다. 그리고 다음날 오전 4시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난다. 이른 아침을 먹고 나면 나만의 그림세상이 가능해지는 문간방 캔버스 앞에 앉는다. 그렇게 종일 8시간 그린다. 못 그리는 날, 그날이 저승에 드는 날이다. 얼마 전까지 손을 맞잡고 사진도 찍었던 95세의 내 단짝 아내. 지금은 요양원에 누워지낸다. 아내는 이제 아이가 돼 있다. 비록 내 아트리에에는 못 들어와도 마음은 늘 함께한다. 물론 어린이를 주제로 잡은 44회 개인전의 반은 아내의 손이 그린 것 아니겠는가.

◆전선택의 제작삼락

군자삼락처럼 내겐 '제작삼락(製作三樂)'이 있다. 제작에 필요한 좋은 생각이 머리에 떠오를 때, 어렵사리 작품이 완성될 때, 그리고 작품을 여러 사람에게 보일 때다. 그리고 건강의 비결을 굳이 들자면 제작삼락의 생활을 전제로 모든 걸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무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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