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극복' 릴레이 엽편소설] 두번째 글 - 양준석의 '이팝나무 멜로디'

  • 이춘호
  • |
  • 입력 2020-12-18   |  발행일 2020-12-18 제36면   |  수정 2020-12-18

[코로나 극복 릴레이 엽편소설] 두번째 글 - 양준석의 이팝나무 멜로디
모두와 한 손을 잡고 동행하고 있는 삶인 것 같지만 실은 그리움과 외로움, 그리고 괴로움의 강을 사이에 두고 홀로 독행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함께 있는데 혼자 있다는 것만큼 경이로운 모순도 없다. 하지만 삶이 일정한 영역으로 접어들면 그가 있는 자든 없는 자든 상관없이 그 모순의 감옥에서 시달려야만 한다. 어떤 이는 늘 혼자이고 또 어떤 이는 평생 한 번도 혼자가 돼 본 적이 없다. 모르긴 해도 둘 다 불행한 일일 것이다. 지평선과 수평선 앞에 서면 인간은 자만과 오만에서 잠시 벗어나 자신의 원래 모습이 찾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는 집으로 가고 집으로 가지 못하는 이는 스스로 집이라 여기는 언저리를 배회하면서 임종의 날까지 살아갈 것이다. 삶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설아야, 넌 결혼은 하지 마렴. 정말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결혼은 하지 마."
어느 날 엄마가 미역국을 먹고 있던 설아에게 말했습니다.

설아는 엄마의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6월의 어느 날 하얀 이팝나무 꽃 아래서
약속한 건 준호가 정말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준호는 설아를 진실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는 말이죠.


"설아야, 넌 결혼은 하지 마렴. 정말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결혼은 하지 마."

어느 날 엄마가 미역국을 먹고 있던 설아에게 말했습니다. 아직 어린 설아는 지금까지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렇게 물었죠.

"왜?"

하지만 엄마는 똑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습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산다면 괜찮아. 정말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결혼은 하지 마. 알겠지?룖

열두 살 소녀 설아는 산골마을 밤재에서 엄마·아빠와 함께 삽니다. 언덕 중간 평평한 곳에 널판때기와 철판을 엮어 만든 단칸방 판잣집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왔습니다. 엄마는 밥을 짓고 개울가로 내려가 빨래를 합니다. 닭에게 모이도 줍니다. 아빠는 밤재 너머 광산에서 석탄을 캐는 광부입니다. 아침 일찍 탄광에 나가 밤늦게 들어옵니다.

설아는 아빠가 일하러 나간 후 백김치로 밥을 먹고는 학교로 갑니다. 학교는 언덕 저 아래 길을 한참 돌고 돌아야 도착할 수 있습니다. 걸어서 한 시간이 넘게 걸립니다. 학교로 가는 길은 내리막이라 힘들지 않지만, 집으로 오는 길은 오르막이라 숨이 벅찹니다. 멀긴 해도 오솔길 옆으로 민들레와 강아지풀, 나비들이 많아서 지겹지는 않습니다.

집 앞 멀지 않은 곳엔 키 큰 이팝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올 때면 설아는 나무 옆에 앉아 숨을 고릅니다. 그리고 멀리 하늘과 산을 바라봅니다. 바람소리도 들어봅니다. 가끔은 줄기에 손을 대며 이팝나무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 보기도 하지요.

"하늘 좀 봐. 구름이 고양이 얼굴을 닮았어."

설아의 말에 화답하듯 나무는 그 수많은 잎을 찰랑찰랑 움직여줍니다. 설아는 흙을 한 움큼 쥐어 나무의 밑동 위에 뿌려줍니다. 그리고 집으로 향합니다. 수제비를 만들려는 것인지 엄마는 밀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을 만들고 있습니다.

아빠는 언제나 설아가 잠들 때쯤 돌아옵니다. 아빠의 얼굴과 옷은 석탄가루로 지저분합니다. 언젠가부터 아빠의 몸에서는 항상 소주 냄새가 납니다.

술에 취한 아빠는 엄마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설아는 아빠의 목소리가 두려워 가만히 누워만 있습니다. 아빠는 크게 화를 내지만 설아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가끔 아빠는 밥그릇이며 컵을 집어던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엄마는 대답이 없습니다. 엄마가 아빠에게 무슨 잘못을 했는지 설아는 알지 못합니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아빠는 아무 말 없이 탄광으로 일을 나갑니다. 엄마도 말없이 아빠를 배웅합니다. 그리고 설아는 언덕을 내려가 학교로 갑니다.

집으로 돌아올 때면 어제처럼 이팝나무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설아는 그 옆에 앉아 잠시 쉬어봅니다. 아무 노래나 흥얼거릴 때도 있습니다. 이팝나무의 잎들이 바람에 흩날리는 소리도 설아에겐 예쁜 멜로디로 들려옵니다. 파란 싹을 틔워 태양을 받아들이고, 하얀 꽃으로 머리치장을 하고, 눈송이를 닮은 꽃잎을 아낌없이 뿌려주고, 헐벗은 잔가지를 겨울바람 앞에서 바르르 떠는 모습 모두가 세상을 향해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넌 키가 커서 좋겠다. 저 멀리 산 너머도 볼 수 있으니까. 거긴 여기와는 다른 곳이 있지?"

나무는 잎사귀 다섯 개를 소녀의 머리 위로 떨어뜨립니다. 설아는 나무를 올려보며 손으로 만져준 뒤 판잣집으로 뛰어갑니다. 여름이 되면 작은 마당 앞엔 달맞이꽃의 노란 꽃잎들이 짝을 지어 태어납니다. 꽃들은 방긋 웃는 표정으로 설아의 발걸음 소리에 귀를 기울여줍니다. 방금 개울가에서 올라온 엄마는 이팝나무처럼 설아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실잠자리 한 마리가 바지랑대에 앉아 있는 빨랫줄에 아빠의 작업복을 걸어둡니다.

아빠의 몸에서는 오늘도 소주 냄새가 납니다. 아빠는 이제 하루도 빠지지 않고 술을 마십니다. 그리고 엄마에게 소리를 지릅니다. 설아는 여전히 아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빠는 이러지 않았습니다. 소주를 마시지도, 엄마에게 화를 내지도 않았습니다. 아빠는 더 화가 났을 때 석탄가루 묻은 손으로 엄마의 뺨을 때리기도 합니다. 엄마가 주저앉으면 아빠는 몇 번을 더 때립니다. 그리고 엄마를 향해 더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하지만 엄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엄마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갑니다. 아빠는 그대로 드러누워 잠이 듭니다. 그리고 코를 곱니다. 엄마는 한참 뒤 다시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옵니다. 조용히 설아 옆에 누워 잠을 청합니다.

다음날 아침, 비가 내려도 아빠는 탄광으로 일을 나갑니다. 엄마는 말없이 아빠를 배웅합니다. 설아는 우산을 쓰고 언덕을 내려가 학교로 갑니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이팝나무가 설아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설아는 먹구름 사이로 비친 햇살을 바라보다 나무에 기대어봅니다.

"너도 바람소리를 들을 수 있니? 바람처럼 먼 곳으로 떠나서 엄마와 아빠, 나 모두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나무는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 길쭉한 꽃잎 여러 장을 떨어뜨려 줍니다. 설아는 나무에 귀를 대어 봅니다. 그리고 집에 도착합니다. 엄마는 한 손에 바구니를 들고 닭에게 모이를 주고 있습니다. 밤새 내린 함박눈처럼, 떡집에서 본 찹쌀가루처럼 가지를 뒤덮고 있는 이팝나무의 꽃들은 한참을 바라보게 할 만큼 고왔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떨어져 사라질 것이란 사실을 설아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밤늦게 탄광에서 돌아온 아빠의 몸에서는 독한 술 냄새가 납니다. 방에 앉으며 아빠는 엄마에게 밥을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소주를 가져오라 합니다. 하지만 집에는 술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빠는 어제보다 더 크게 화를 냅니다. 아무리 엄마에게 소리를 질러도 설아는 도무지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설아가 자는 척하고 있다는 것을 엄마도, 아빠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아빠는 오늘도 엄마의 뺨을 때립니다. 직접 본 적은 없어도 설아는 그 소리를 잘 알고 있습니다. 아빠는 몇 번을 더 때립니다. 얼마 후 엄마는 말없이 문을 열고 캄캄한 밖으로 나갑니다. 아빠는 엄마가 차려준 밥도 먹지 않고 그대로 누워 잡니다.

한참이 지나도 엄마는 집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설아는 걱정이 되어 잠을 이룰 수 없습니다. 벌써 자정이 다 되었습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들어오지 않자 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좁은 단칸방엔 아빠의 코 고는 소리만 가득합니다. 문을 열고 밖에 나가니 하늘에 반달이 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여린 달빛 아래에 엄마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엄마는 이팝나무 옆에 가만히 서 있습니다. 무얼 그리 생각하는지 그렇게 오랫동안 나무 옆에 선 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코로나 극복 릴레이 엽편소설] 두번째 글 - 양준석의 이팝나무 멜로디
양준석(소설가)'현대문학'으로 등단소설집 '마녀가 된 엘레나' 등 다수.

20년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살든 관계없이 이팝나무는 그동안 스무 번 꽃을 피웠습니다. 설아는 서른두 살의 여자가 되었습니다. 설아가 스무 살일 때 엄마와 아빠는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설아는 아직도 산골마을 밤재에 살고 있습니다. 방이 두 개로 늘긴 했지만 여전히 그 널판때기와 철판을 엮어 만든 판잣집에서 지냅니다.

7년 전 설아는 언덕 아랫마을에 사는 준호란 총각을 만났습니다. 설아와 준호는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얼마 뒤 둘은 그 판잣집에서 함께 살기로 했습니다. 이듬해 마당 앞에 노란 달맞이꽃이 피었을 때 딸 영이가 태어났습니다.

밤재 사람들은 대개 딸의 신랑을 부모가 정해주었습니다. 연애처럼 머리 아프고 복잡한 건 하지 않으려 했지요. 하지만 설아도 준호도 부모가 없었습니다.

"좋은 사람과 함께 산다면 괜찮아. 정말 좋은 사람이 아니라면 결혼은 하지 마. 알겠지?"

설아는 엄마의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6월의 어느 날 이젠 함께 살자며 하얀 이팝나무 꽃 아래서 약속한 건 준호가 정말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준호는 설아를 진실로 사랑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영이가 다섯 살이 될 때까지는 말이죠.

준호는 석탄을 캐는 광부입니다. 준호뿐만 아니라 밤재에 사는 남자들 모두가 광부입니다. 준호는 아침 일찍 탄광에 나가 밤늦게 돌아옵니다. 그동안 설아는 집에서 일을 합니다. 설아는 밥을 짓고, 빨래를 하고, 닭에게 모이도 줍니다. 영이가 잠들고 한참이 지나야 준호는 집에 들어옵니다. 준호의 얼굴과 옷은 석탄가루로 지저분합니다. 그의 몸에서는 항상 소주 냄새가 납니다.

술에 취하면 준호는 설아에게 화를 냅니다.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다행히 영이는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준호는 이제 설아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설아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준호가 더 화를 내려 할 때 설아는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갑니다. 어둠 속을 걸어가 마른 가지만 남아 있는 겨울의 이팝나무에게 다가갑니다. 나무 옆에 선 설아는 반달이 그려진 하늘을 올려봅니다. 멀리 산 너머를 바라봅니다. 바람소리도 듣습니다. 나무에 기대며 엄마의 얼굴을 떠올려 봅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