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포유 커버스토리] 고령대가야시장 설밑 풍경 2...꼭두새벽부터 이름표 꽂고 줄 선 깡통, 순서 뒤바뀌면 시장통 뒤집어집니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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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05   |  발행일 2021-02-05 제34면   |  수정 2021-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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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 펑~. 설을 추억하게 하는 상징 중에 뻥튀기 장수가 10분마다 쏟아내는 굉음과 훈김어린 곡물향 가득한 증기의 세례를 우린 잊을 수 없다. 지금도 대가야시장에는 뻥튀기 집이 네 군데 산재해 있다. 성산뻥튀기 주인 부부는 4년 전 만났을 때보다 더 활기찬 모습으로 살고 있다. 워낙 많은 손님이 한꺼번에 몰려들기 때문에 뻥튀기 기계 옆에는 명절 승차권 예매창구처럼 튀길 곡물이 담긴 깡통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지난달 29일 오전 11시30분. 대구를 떠난 지 30여 분 만에 고령대가야시장 언저리에 도착했다. 추위가 풀렸다고는 하지만 장터 옆 고령읍을 관통하는 회천의 강바람은 장꾼들에겐 맵차다. 1983년 우후죽순 난전 형태로 존재했던 고령장은 대가야시장으로 리모델링된다. 물론 예전 전통시장만의 정경이 퇴색된 것은 사실이다. 시장은 과연 현대화되어야 할까? 각종 법규와 세금문제가 얽혀 있어 어쩔 수 없이 현대화 수순을 밟았을 것이다. 하지만 토박이들은 반듯하지 않고 들쭉날쭉한 그 시절 장터의 풍광을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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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로 만든 등겨장. 검게 피어난 곰팡이, 그게 노인네들의 손과 얼굴에 피어난 검버섯을 빼닮았다.

하루 수백번 "뻥이요~"
대목 맞은 뻥튀기 가게
긴 침묵지키던 손님들
누구 하나 농담 던지면
만담 한 보따리 쏟아내
3代강정집 덩달아 분주


◆뻥튀기의 추억

아늑하게 내려앉아 있는 대가야시장. 15년째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성산뻥튀기'를 찾았다. 10분 간격으로 하루에도 수백 번 곡물이 튀겨지고 이때 생겨난 훈김과 곡물가루 등이 실내를 거무튀튀하게 변색시켜 버렸다.

설특수 때문에 오전 5시30분에 문을 연다. 잠이 없는 어르신은 기다리는 게 귀찮아 동이 틀 조짐이 보이면 버스를 타고 여기 와서 무작정 기다린다. 사람이 줄을 서는 게 아니고 튀길 곡물을 담은 각종 깡통이 2열 종대로 순서를 기다린다. 주인 부부는 겨를이 없다. 손님이 직접 매직볼펜으로 메모지에 자기 이름 혹은 동네 이름을 적어 올려놓는다. 류성문·강옥이씨 부부가 가장 유념하는 건 반드시 순서를 지키는 것, 새치기 깡통이 있으면 난리가 난다. 순서가 바뀌어도 난리가 난다. 다른 건 양보해도 순서가 바뀌는 건 절대 용납못한다. 청와대 빽도 여기선 안 통한다. 순서, 이게 여기 불문율.

차례를 기다리는 아낙네들의 입은 굳게 닫혀 있다. 그들의 입술에 자기만이 세월의 사연이 쌓여 있다. 그들의 시선은 깡통에 꽂혀 있다. 어두컴컴한 실내만큼이나 아낙네들의 침묵도 묵중하다. 하지만 누군가가 먼저 수더분한 농담을 날려주면 이때다 싶어 다들 자신만의 세월한담을 쏟아낸다. 그럼 판이 달라져 금세 훈훈해진다. 뻥튀기 굉음에 놀란 한 아낙네가 "어이쿠 시어머니야!"라 하자, 옆의 한 아낙이 "그 집은 아직도 시어머니가 그렇게 무서운 모양이네. 이젠 세상이 달라졌지. 그러니 '어이쿠, 며느리야'라고 해야 맞지"라 농담을 널어놓자 다들 "맞는 말"이라며 박장대소로 맞장구친다. 조금 전의 침묵이 일시에 유쾌한 분위기로 바뀐다. 그래, 이게 인생 아닌가 싶다.

여기는 이름과 택호가 공존한다. 택호(宅號)란 예전 시집 간 여성들만의 아호 같은 것이었다. 호촌마을에서 태어나면 호촌댁이 택호가 되는 것이다. 70대 미만의 여인들에겐 택호보다 이름이 더 친숙하다. 택호가 익숙하려면 족히 여든은 넘겨야 된다.

별별 곡물을 다 튀겨준다. 떡국, 땅콩, 무말랭이, 둥굴레, 우엉, 돼지감자, 연근, 누룽지, 조비(좁쌀)…. 단맛을 내기 위해 사카린을 적당량 넣는다. 깡통 하나 튀기는 공임은 4천원. 하지만 차용으로 튀겨지는 옥수수와 보리, 그리고 밤은 5천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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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경사회의 랜드마크랄 수 있었던 대장간. 하지만 이제 전국에 몇 개 남아 있지 않다. 고령대장간의 이준희 사장이 쇠질을 하고 있다. 이 집은 이미 전국적 포토존으로 유명해졌다. 웬만한 건 5천~1만원이면 구입할 수 있다.

 냉이·시래기·등겨장…
한편엔 '소일댁'의 난전
"살아보니 말벗이 중요
팔려도, 안팔려도 좋아"

70년 역사 고령대장간
엿가위·쇠스랑·갈고리…
뭐든지 1시간이면 '뚝딱'

6시 '칼퇴' 전설의 판집
키·됫박·채반·소쿠리…
없는 것 없는 박물관

◆뻥튀기집에서 강정집으로

현재 시장에는 뻥튀기집이 네 군데 있다. 튀밥이 완성되면 강정을 만들어야 된다. 어르신들은 구부정한 몸으로 포대에 담긴 튀밥을 들고 150m 떨어진 강정집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한때 고령읍내에서 알아줬던 추억의 과자 공장 '천일제과'. 24년 전 문을 닫았는데 이젠 간판없이 일을 쳐낸다. 12월 말부터 두 달 남짓 설밑 특수를 누리고 있다. 현재 3대가 강정 만드는 일에 매달린다. 60여 년 강정 가문이다. 조호조·익성씨 부자를 비롯해 익성씨의 어머니, 처남, 두 아들, 조카까지 가세한다.

손님과 주인이 손발이 맞아야 된다. 정사각형으로 생긴 곽판에서 갓 떼어져 나온 강정이 들러붙지 않게 손님들이 그것들을 일일이 떼놓고 있다. 할매들은 강정도 하나의 제수(祭需)라 믿어 수고스럽더라도 직접 뻥튀기를 해서 강정집에서 만든 걸 고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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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에 온 사람들의 허기를 책임지는 고령대가야시장의 명물 소구레국밥.

◆세월골목의 소일댁

대가야시장 서쪽 언저리에 '세월골목'이 있다. 그 명칭은 기자가 이날 취재를 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 그렇게 붙여 주었다.

갯바위 조가비처럼 다닥다닥 붙어 앉아 있는 어르신들. 얼추 여든은 다 넘은 것 같다. 이 골목 어르신의 택호는 묻지마 '소일댁'. 하루를 심심하지 않게 보내는 게 지상명령이다. 영감도 떠나고 자식도 떠나고 곁엔 아무도 없다. 살다보니 말벗이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 농사의 달인 아닌가. 장에 가서 팔 건 지천에 널렸다. 갓 캐온 달래와 냉이, 무말랭이, 시래기와 우거지, 약초, 꼴 같지 않게 방치된 결구배추 겉을 떼내 갖고와 여기서 판다. 세상에서 가장 작은 미니 무도 볼 수 있다.

나는 양지녘에 안지 못하고 건너편 응달에 앉은 등겨장(일명 시금장) 메주를 파는 어르신 곁에 앉았다. 등겨장, 그 한 단어에 지난 세월이 다 녹아들어가 있는 것 같다. 어르신은 '딩기장'이라고 했다. 지난해 여름철에 보라등겨를 갖고 만들었다. 등겨는 도정할 때 나오는 부산물이다. 예전에는 도정하기 위해서는 각 가정에서 디딜방아로 벼를 찧어서 도정했다. 처음 찧으면 벼의 껍질인 왕겨가 벗겨지고 그다음부터 벗겨지는 껍질이 등겨다. 그걸 가루로 만들어 물로 반죽해 도넛처럼 모양을 만들고 짚불에 그을려 메주처럼 매달아 발효과정을 거친다. 설밑이면 완성된다. 마른 덩어리를 갈아 조청, 고춧가루, 소금 등을 넣어 등겨장을 만들어 먹으면 된다.

"요즘 젊은 새댁들은 딩기장이라 하면 뭔지 몰라. 된장 다음으로 많이 해먹은 게 등겨장이었는데, 그냥 소일 삼아 몇 개 가져와 봤어. 한 개 3천원인데…. 굳이 살 필요는 없어.룖

곰팡이가 거뭇거뭇 잘 피어난 놈으로 한 개를 구입했다. 인테리어 소품처럼 보였다. 이젠 마트서도 볼 수 없는 등겨장 메주, 그 빛깔이 박수근·이중섭 그림의 바탕색처럼 다가섰다. 등겨장 할매는 합천에서 태어나 고령읍으로 시집 와 살고 있다. 딸기농사를 지어 4남매 다 출가시켰다. 이젠 할 일이 없어 심심한 입을 위해 이 골목에 나온단다. 소일댁은 물건 파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그냥 소일 삼아 팔려도 좋고 안 팔려도 좋다는 맘으로 여기에 나온다.

출출해 이 시장 명물 음식이 된 소구레국밥집을 찾아갔다. 3대 가업을 이은 최수영 사장이 지키는 고령원조소구레집. 소구레는 소의 속껍질에 들어 있는 물컹한 식감의 지방층이다. 예전에는 기름기가 별로 없어 요리하기 수월했는데 이젠 사료를 먹어 기름기가 많이 들러붙어 장만하기가 어려워 전문점이 갈수록 줄어든다. 대구권의 경우 달성군 현풍100년도깨비시장 소구레촌과 함께 고령대가야장 소구래촌이 크게 성장했다. 소구레전문집은 고령원조, 고령대가야소구레, 할매국수집, 오이소식당, 시장할매국밥 등 8곳이 밀집해 있다. 요즘은 소구레가 귀해 소양이 많이 들어간다. 선지와 소양, 소구레가 섞여 얼핏 양평해장국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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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 한편에 가면 '세월골목'이 있다. 팔려도 좋고 안 팔려도 좋다. 들녘에서 갓 캐온 냉이 한 바구니는 5천원, 보리로 만든 등겨장 한 개는 3천원. 난전을 형성한 소일할매들. 그들은 판매보다는 두런두런 나누는 세월이야기가 더 간절한 것이다.


◆장터에서 찾은 추억공간

각설이 출신의 뻥튀기 아저씨를 만나려면 중앙광장으로 가면 된다. 성주 출신의 김창수씨,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선글라스에 귀고리까지 착용한 센스파 품바. 특이하게 뻥 소리를 내기 직전 장터 사람들이 놀라지 않게 호루라기를 먼저 분다.

70년 역사의 고령대장간. 철로 유명한 대가야의 명맥을 잇고 있다. 아버지(이상철)로부터 가업을 이어받은 이준희씨의 쇠질소리는 야간열차의 바퀴 굴러가는 소리만큼 인간을 아련하게 만든다. 엿장수 가위, 쇠스랑, 정글도, 심마니용 삽, 마늘관리용 갈고리…. 짧게는 20분 내외, 길어도 1시간이면 연장 하나를 뚝딱 만들어낸다. 여긴 옛 전통방식 그대로 연장을 제작하고 있다. 풀무질(쇠를 달구거나 녹이기 위해 화덕에 뜨거운 공기를 불어넣는 작업)과 매질(쇠를 두드려 단단하게 만드는 작업), 담금질(쇠를 높은 열에서 굽고 식히는 작업) 등을 통해 연 3천개 이상 연장을 생산한다.

터줏대감은 누굴까. 북쪽 언저리를 지키고 있는 판집할배다. 막걸리 걸러내는 용수을 비롯해 키, 체, 됫박, 채반, 소쿠리, 싸리빗자루, 빨레방망이, 알미늄 오봉…. 옛날 물건 전시장 같다.

85세의 할배는 초침처럼 살아간다. 오전 6시에 나와 오후 6시에 칼같이 전을 걷는다. 아내가 직접 가져오는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하신다. 조국 근대화 그리고 한강의 기적을 만든 '전설의 판집'이었다.

공무원 출신의 전홍태씨. 그는 이 장터의 '모더니티'를 책임진다. 55세에 명퇴를 신청하고 2015년 읍내에서 테이크아웃 커피숍을 경영하다가 2017년 현재 자리로 이전해 방치된 가게를 고쳐 자기 이름을 건 커피공방을 차렸다. 덕분에 장터에 등대가 하나 켜진 셈이다. 그가 들어오기 전 그 포인트는 흉가 같았다. 하지만 커피문화를 보급해보겠다는 각오라서 버틸 수 있었다. 아내 이향씨. 시인인 그녀도 남편의 커피행진에 동행 중이다. 관광객은 그곳을 '장터에서 발견한 오아시스'라 엄지척한다.

글·사진=이춘호 음식·대중문화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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