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연의 문학 향기] 위대한 평민들

  • 박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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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19 07:51  |  수정 2021-02-19 08:09  |  발행일 2021-02-19 제15면

이정연

중국 작가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는 허삼관이라는 사람이 피를 파는 이야기다. 400㎖의 피를 팔아 받는 35위안은 '반년 동안 쉬지 않고 땅을 파도 그렇게 많이는 못 버는' 돈이다. 생사 공장 노동자 허삼관은 피 판 돈으로 마을에서 제일 예쁜 허옥란과 결혼하고 일락, 이락, 삼락 삼형제를 낳아 가정을 이룬 후 가정에 문제가 닥칠 때마다 피를 팔아 그 위기를 넘긴다.

그런데 허삼관이란 인물은 찌질하다. 큰아들 일락이가 아홉 살 때 허옥란의 아버지가 결혼 전 사윗감으로 생각하던 하소용의 아들이란 걸 알게 되었다. 일락이가 사고로 방씨네 아들을 다치게 했을 때 치료비 마련을 위해 피를 팔러 가기 전 허삼관은 이락, 삼락 두 아들을 불러 세워놓고 "너희가 크면 이 아버지를 대신해서 하소용에게 꼭 복수하도록 해라. 너희들, 하소용한테 딸이 둘 있는 거 알지? 너희가 다 크면 가서 하소용네 딸들을 강간해 버려라"라고 시키는 인물이다. 뭐 이런 인간이 있지? 싶은데 읽다 보면 허삼관의 따뜻한 인간미에 울고 웃게 된다.

계속되던 가뭄으로 온가족이 한 달 넘도록 옥수수죽으로 연명할 때 허삼관은 피를 팔고 받은 돈으로 일락이만 빼고 국수를 사 먹으러 간다. 남은 일락이가 친아버지를 찾아갔다 퇴짜를 맞고 울며 집을 나갔을 때 허삼관은 일락이를 찾아 업고 국숫집을 향한다. 겉으로는 욕을 퍼부으면서. 또 아내 허옥란이 문화대혁명의 와중에 '매춘부'로 낙인 찍혀 인민재판을 받게 될 때였다. 자식들조차 어머니를 부끄러워할 때 허삼관은 아내를 위해 매일 도시락을 배달하고 자신이 '바람 폈던?' 치부를 드러내며 아내를 감싼다.

이번에 다시 읽다 보니 한국어판 서문에 작가가 이 소설을 '평등에 관한 이야기'라고 한다. 도대체 어떤 부분이 평등에 관한 이야기란 거지? 그러다 얼마 전 한진중공업 35년 해고노동자 김진숙의 외침을 듣고 알았다. "문재인 대통령님 내가 보이십니까. 함께 싸워왔던 당신이 촛불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여전히 해고자인 내가 보이십니까."

어떤 삶이 더 고귀하고 위대한 삶인가. 암 환자인 그가 민주주의를 위해 부산에서부터 청와대 앞까지 34일간을 걸어 와 "포기하지 맙시다. 쓰러지지도 맙시다. 저도 그러겠습니다. 웃으면서 끝까지 함께 투쟁!"이라고 외칠 때 홀연히 이해가 됐다. 그이의 삶이 허삼관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위대한 평민들의 존엄한 무기는 유머임을. 평등은 웃픈 현실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사람들 사이에 흐르고 있음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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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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