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봉화 2·28 1주년 기념 학도예술제' 대회장 류종하씨 인터뷰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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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2-22 20:15  |  수정 2021-02-22 20:27  |  발행일 2021-02-23 제2면
"2·28 민주운동이 있었기에 4·19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
"60년 후 2·28민주운동이 대구지역에서 재조명되고 있어 만감 교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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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8민주운동에 참여한 후배들에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1961년 2월27·28일, '혁명봉화 2·28 1주년 기념 학도예술제'(이하 학도예술제) 대회장을 맡았던 류종하씨<사진>는 "역사에는 우연이 없다. 대구의 2·28민주운동이 있었기에 4·19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면서 60년 전의 소회를 밝혔다.

 

류씨는 영남일보가 최근 존재를 확인한 학도예술제 팸플릿에서 대회장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 이어 류씨는 "최근 대구에서 이뤄지는 2·28 재조명 움직임을 매우 반갑게 생각한다. 2·28 이후 일어난 4·19 혁명은 이미 전국적으로 공인된 민주운동이지만 대구인(人)의 민주 의지를 담은 2·28에 대한 국민 인식은 다소 아쉬운 측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학도예술제 대회장에 나선 계기는 무엇인가.
"당시 경북대 법대 3학년 재학생이자 학보사 편집국장이었다. 2·28의 주역은 아니었지만 4·19에 동참한 혁명 원로 자격으로 학도예술제를 이끌었다. 지금 보면 건방지게 느껴지지만, 당시만 해도 이집트 나세르 혁명과 쿠바 혁명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관련 책도 열심히 읽었던 대학생이었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뭔가 꿈을 이뤄보고자 학생운동에 열심이었다. 경북대 재학 시절 교정에 누워 책을 보던 시절이 지금도 떠오른다."


▶행사를 주최한 민족계몽협회가 어떤 단체인지 궁금하다.
"학도예술제는 내가 몸담았던 민족계몽협회가 주최했다. 민족계몽협회는 대구지역 고교생·대학생 70여명으로 구성됐으며, 2·28민주운동 전부터 활동했던 학생운동 단체다. 대구 향촌동에서 모여 의견을 자주 나눴고, '왜색 음악 안 듣기 운동'과 '농촌계몽 운동' 등을 전개하곤 했다. 이미 고인이 된 백승홍 전 국회의원이 발이 넓어 적극적으로 활동했고, 훗날 대구 연극계를 이끈 이필동도 열심이긴 마찬가지였다."


▶행사 비용은 어떻게 마련했나.
"행사비용은 지역 기업의 도움을 통해 마련할 수 있었다. 대구 제일모직·삼화방직 공장을 방문해 행사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당시 나는 대회장으로서 이효상 참의원과 대구여고 김영기 교장을 찾아 학생들에게 힘을 북돋아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졸업 후에는 어떻게 지냈나.
"1963년 추계 졸업 후 AP와 로이터통신 등 외신 기사를 취급하던 동화통신사 기자로 입사했다. 이후 정당인 생활을 했으며 대구지역 한 언론사의 이사 겸 논설실장으로도 있었다. 대학 후배 중엔 영남일보에 입사한 이들도 많았다. 지금은 자유인으로 살고 있다."


▶학도예술제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면.
"행사가 끝난 뒤 왜 학도예술제 3부 공연 연극을 '밀주'로 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히려 2·28 정신과 잘 어울리는 프랑스혁명 배경 연극을 하지 않았다는 후회가 있다. 하지만 당시 대구지역 학생들의 활발한 참여로 행사가 열린 대구 키네마극장(현 CGV대구한일)은 만석이었다. 60년이 지난 지금 2·28민주운동이 대구지역 사회에서 재조명되고 있어 만감이 교차할 뿐이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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