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석의 電影雜感 2.0] 이준익 감독의 흑백영화 '자산어보' '동주'

  • 장우석 영화감독·물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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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4-16   |  발행일 2021-04-16 제39면   |  수정 2021-05-07 09:44
컬러 빼고 담은 '인간의 본질'…깊은 여운을 남기다

이준익 감독 열네 번째 작품이자 두번째로 만든 흑백 영화 '자산어보'

유배지서 해양생물 기록 정약전, 어부 창대, 주민들과 따뜻한 이야기

해무 가득한 우이도, 한폭의 수묵화처럼 담은 장면 다채로운 빛 발해

서정적인 톤과 詩인용 대사·내레이션 '동주'도 흑백 스크린으로 호평

자산어보(이준익.연출)_poster
'자산어보' 포스터
동주(이준익.연출)_poster
'동주' 포스터

이준익 감독은 대학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이때 사군자도 치면서 수묵화를 꽤 그렸단다. 이후 그는 정부종합청사 수위부터 날품장사까지 수십 가지 직업을 거쳐 한 잡지의 디자인을 맡게 되면서 인생이 변하기 시작했다. 같은 회사에서 내던 다른 잡지의 편집장을 맡고 있던 고(故) 이세룡 감독이 서울극장 기획실장으로 옮겨가면서 그를 선전부장 겸 도안사로 데려간다. 당시만 하더라도 마케팅이 지금처럼 분업화되지 않던 시절이라 이 감독은 포스터, 신문광고, 전단까지 만들면서 영화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한다. 이황림 감독에게 배운 노하우에 젊고 신선한 감각까지 더해진 그의 솜씨는 대한극장이나 명보극장 같은 다른 영화관서도 의뢰가 들어올 정도였다고. 1987년 석명홍(현 시네라인-투 대표, '친구' '말아톤' 제작자)과 함께 영화광고대행사 씨네시티를 차린 이 감독은 한때 시장의 80%를 점유할 정도로 막강한 세를 과시했다.

1992년 씨네시티는 영화 제작을 내세운 이준익 감독의 씨네월드와 광고 대행업을 내세운 석명홍 대표의 시네라인으로 나뉘게 된다. 이 씨네월드의 창립작이 바로 이준익 감독의 첫 연출 데뷔작으로 기록되어 있는 '키드캅'(1993)이었다. 아이들과 함께 볼 만한 가족영화를 표방한 영화는 그러나 흥행에는 참패했고 이후 비디오대여점들에서 뒤늦게 입소문을 타면서 어느 정도 인기몰이를 하지만 그땐 이미 이 감독이 연출을 접고 '택시' '메멘토' '헤드윅' 같은 작품을 수입하거나 '간첩 리철진' '아나키스트' '공포 택시' 같은 작품을 차례로 만들었다. 이 가운데 특히 '공포 택시'가 흥행 부진으로 고전했지만 '달마야 놀자'로 만회하면서 다시 주목받는 제작자로 떠올랐다. 이후 사극과 코미디를 사투리라는 무기로 버무린 '황산벌'(2003)로 10년 만에 감독으로 복귀한 그는 광대들과 연산군의 열망을 비극적이고 아름답게 그린 '왕의 남자'(2005)로 천만 영화감독으로 등극한다.

자산어보(이준익.연출)_스틸이미지1
'자산어보' 촬영현장

'자산어보'(2021)는 이준익 감독의 열네 번째 영화이자 두 번째 흑백 영화다. 제목이기도 한 '자산어보'는 '목민심서'로 유명한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쓴 책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 백과사전이다. '자산'은 '흑산'의 별칭으로 정약전은 전남 신안군에 위치한 흑산도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고등어, 꽁치, 갈치, 노래미, 방어, 숭어 같은 물고기는 물론 갯지렁이, 해삼, 말미잘, 물개, 고래, 미역에 이르기까지 총 226개 해양 생물의 생김새와 습성·분포·쓰임 등을 연구해 기록한 이 책을 완성했다. 이 책에 온전히 기댄 '자산어보'를 통해 이 감독은 역사적인 전쟁이나 정치사들을 다룬 여느 사극과는 달리 그 시대에 몸부림치며 살아왔을 사람들의 흔적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의도를 분명히 한다. 그는 정약전을 조명하는 동시에 '자산어보' 서문에 잠시 언급이 되는 '창대'라는 인물을 새롭게 찾아내 이 두 사람의 관계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배우 설경구는 '소원'(2013)에 이어 두 번째로 이준익 감독과 작업을 하게 되는 것인데 올해로 연기 경력 28년이 되는 그의 첫 사극 출연이란다. 굳이 묻거나 말하지 않아도 그가 연기하는 그대로가 정약전이 되었다는 이 감독의 얘기처럼 설경구는 마치 오랫동안 사극연기를 해온 사람 이상으로 정약전이라는 캐릭터에 몰입한다. 창대로 분한 배우 변요한은 설경구에게 압도당하지 않고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진심을 다한 연기를 펼친다. 설경구 역시 이 작품이 변요한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빛나는 작품이 될 것이라고 극찬한 것처럼 그는 어느새 비슷한 나이대의 배우들보다 훨씬 큰 존재감을 드러내는 배우로 성장했다. '기생충'으로 많은 찬사를 받았던 배우 이정은 역시 정약전의 곁을 지키는 가거댁으로 분해 특유의 능청스러운 연기로 극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거기에 동방우(명계남), 정진영, 김의성, 방은진, 류승룡, 조승연, 최원영, 조우진, 윤경호 같은 배우들이 대거 우정 출연하면서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채운다.

이준익.감독._in.자선어보.촬영현장
자산어보 촬영현장에서 모니터링을 하고 있는 이준익 감독.

그렇다면 이준익 감독의 첫 번째 흑백 영화는 무엇인가. 바로 '동주'(2015)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 윤동주의 시가 어떤 시대와 사람들을 거쳐 이 땅에 남게 되었는지를 다룬 일련의 과정들을 온전히 스크린에 담고 싶다는 이준익 감독의 열망에서 시작된 영화였다. 한국영화 사상 최초로 윤동주 시인의 삶을 스크린에 옮긴 영화는 화려한 기교나 과장 없이 정직한 이야기에 서정적인 톤과 단선적이지 않은 서사 구조와 윤동주의 시를 인용한 대사와 내레이션으로 많은 관객의 사랑을 받았던 작품이었다.

이준익 감독은 무엇보다 '동주'를 통해 윤동주보다 송몽규를, '자선어보'를 통해 정약용보다 정약전을, 아니 그보다 창대를 관객에게 공들여 소개한다. 윤동주보다 먼저 등단하지만 이후 시를 쓰기보다 독립운동에 전념하며 학생들을 조직하는 데 앞장서는 송몽규, 흑산도에서 나고 자랐지만 물고기를 잡는 것보다 글공부를 더욱 중시해 성리학으로 꿈을 펼치고 싶어 스승을 떠나는 창대. 그 둘이 마주한 세계는 그러나 그들의 바람을 처절하게 부순다. '동주'를 흑백으로 찍을 수밖에 없었던 건 충분치 못한 제작비 탓이 컸었지만, '자산어보'는 현란한 컬러를 배제하면 물체나 인물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형태가 더욱 뚜렷하게 전달된다는 것을 전작의 경험으로 알게 된 이준익 감독의 철저한 의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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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산어보'는 무엇보다 흑백이 얼마나 다채로운 빛을 낼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귀한 영화다. 이런 영화적 경험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산어보'는 명민한 제작자에서 시네아스트로 변모해가는 이준익이 보여줄 수 있는 최전선이다. 특히 해무가 가득한 우이도를 한 폭의 수묵화처럼 그려낸 장면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 포스터의 카피로도 쓰였던 "벗을 깊이 알면 내가 더 깊어진다"는 정약전의 대사는, "배운 대로 못살면 생긴 대로 살아야지"라는 창대의 대사와 함께 코로나 블루 시대를 힘겹게 통과하는 우리를 크게 위로한다. 무엇보다 사람이 절실했는데 그렇게 말해주어 고맙다는 인사 전하고 싶다.

영화감독·물레책방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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