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응상의 ‘천 개의 도시 천 개의 이야기’] 포르투갈 파티마

  • 권응상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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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6-18   |  발행일 2021-06-18 제36면   |  수정 2021-06-18 09:45
세계 3대 성모 발현 聖地
3개 성당 성스러운 위용
순례자·관광객으로 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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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성지 광장. 가운데가 파티마 대성당, 왼쪽 유리 건물이 성모발현 예배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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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위일체 성당 안의 예수상.
'파티마(Fatima)'는 포르투갈의 도시 이름이었다. 나에게 파티마는 병원 이름으로 익숙하다. 우리 집 큰아이가 태어난 곳이 대구파티마병원이다. 서울에서 조교로 근무하며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30년 전, 집사람은 출산을 위해 동대구역 근처의 친정에 머물고 있었다. 어느 날 집사람이 진통이 시작된 것 같다며 전화를 했다. 퇴근하자마자 새마을호 기차를 타고 동대구역에 내렸다. 그리고 서른 살을 앞두고 아버지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곳이 바로 파티마병원이었다. 개인적인 여러 기억 중에서 손꼽는 추억의 이름이 파티마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파티마라는 이름이 살갑게 다가왔고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파티마는 인구 1만2천여 명의 작은 도시로 바탈랴 수도원과 파티마 대성당이 대표적 관광지다. 나처럼 가톨릭에 문외한들이야 관광지라 부르지 사실 두 곳 모두 가톨릭에서 손꼽히는 성지다. 코임브라에서 한 시간 남짓 만에 바탈랴 수도원에 도착했다. '바탈랴(Batalha)'는 포르투갈어로 '전투'라는 뜻이다. 1385년 스페인 전승 기념으로 포르투갈 왕 주앙 1세의 명으로 건립된 수도원이다. 이 수도원은 150년에 걸쳐 건축된 포르투갈 고딕 양식과 마누엘 양식의 대표 건축물로서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수도원 입구에는 포르투갈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는 페레이라 장군의 기마상이 우뚝 서 있어서 왠지 수도원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기야 수도원 이름이 '전투'이니 승전 장군의 기마상이 서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도 하겠다 싶다. 그러고 보면 수도원의 외관도 뽐내는 듯이 화려한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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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탈랴 수도원.
먼저 찾은 곳은 이곳에서 가장 인상적인 건축물이라고 하는 '설립자의 예배당'이었다. 이 건물은 15세기 초에 건설된 포르투갈 최초의 왕실 묘지로서 포르투갈에서 스테인드글라스를 단 최초의 건물이라고 한다. 주앙 1세와 그의 아내 필리파는 물론 주앙 1세의 후계자 두아르테 1세와 항해왕이라 불린 엔리케 왕자의 무덤도 있다. 중앙에 있는 주앙 1세 부부의 석관 위에는 서로 손을 잡은 석상이 조각되어 있다. 이것은 포르투갈과 잉글랜드의 오랜 동맹을 상징한다. 필리파 왕비는 잉글랜드의 왕자이자 권력자인 랭커스터 공작의 딸이었다. 1386년 주앙 1세는 스페인(카스티야)이 쳐들어왔을 때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아 승리한다. 이후 스페인을 견제하기 위해 잉글랜드와 동맹의 필요성이 있었고 결국 이듬해 필리파와 결혼한 것이다. 실제 당시 체결한 동맹은 지금까지도 굳건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양쪽 벽에는 여러 아들의 무덤이 늘어서 있는데, 그 가운데 엔리케 왕자의 무덤 앞에만 월계관이 놓여 있어 눈길을 끌었다.

예배당을 잇고 있는 회랑도 매우 인상적인 공간이었다. 사방으로 이어진 회랑은 너비 50m, 길이 55m의 중정을 만들고 있는데 회랑을 장식하는 섬세한 미누엘 양식의 장식은 중정의 풍경을 신비롭게 만들어주었다. 회랑 한쪽의 3단 분수는 수도사들이 손을 씻거나 이발할 때 사용하는 실용적 목적이라는데 분수 자체의 조형미도 뛰어났다. 분수대를 돌아가면 사제단회의실이 있다. 이곳은 현재 무명용사의 무덤으로 사용되고 있어서 두 명의 군인이 지키고 서 있었다. 특이한 것은 내부에 기둥을 세우지 않고 아치형의 천장이 지탱하도록 만들어 방 전체가 탁 트여 있다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공법이어서 사고를 대비해 사형수들을 동원해 건축했다고 한다. 결국 두 번의 붕괴 끝에 완성했는데 설계자인 우게트는 우려를 불식하기 위해 하루를 이곳에서 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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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탈랴 수도원 회랑.
수도원을 나가 동쪽으로 가면 미완성 예배당이 있다. 이곳은 주앙 1세의 후계자이자 아비스왕조의 창시자인 두아르테 1세가 짓기 시작했다. 수도원의 건축은 포르투갈 왕이 여섯 차례 바뀔 때까지 계속되어 16세기 초 주앙 3세에까지 이어졌지만 그는 리스본의 다른 수도원을 짓는 데에 집중하여 미완성인 채로 남게 된 것이다.


인구 1만2천명 작은 도시의 대표적 관광지 바탈랴 수도원
수도원 입구 국민영웅 페레이라 장군 기마상 화려한 모습
스테인드글라스 단 최초 건물 '설립자의 예배당'도 눈길

양치는 세 아이 앞에 나타난 성모마리아 '파티마의 기적'
파티마 대성당·성삼위일체 성당·성모발현 예배당 건립
광장서 보면 학처럼 우아함 깃들어…내부는 소박한 위엄



바탈랴 수도원은 포르투갈 고딕 양식의 시초이자 한 세기 후에 지어진 리스본의 제로니무스 수도원에 보이는 후기 마누엘 양식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이런 건축학적인 의미 외에 이곳은 포르투갈을 다스렸던 중세 왕들의 신앙심의 상징이기도 하다.

하지만 파티마를 세계적인 도시로 만든 것은 '파티마의 기적'이다. 파티마는 프랑스의 루르드, 멕시코의 과달루페와 함께 세계 3대 성모 발현 성지다. 파티마의 기적은 1차 대전의 끝 무렵인 1917년 5월13일 일어났다. 전 유럽이 전화에 휩싸여 있을 당시 파티마의 벌판에서 양을 치던 세 어린이 루치아, 프란시스코, 하친타 앞에 성모 마리아가 출현했다. 성모 마리아는 세 아이에게 앞으로 5개월 동안 매월 13일에 이곳에 와서 평화를 기원하겠다고 말했다. 어른들은 세 아이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지만 이 이야기는 점점 퍼졌다. 마지막 발현일인 10월13일에는 7만여 명이 모여 성모 마리아를 기다렸다. 당시 기사에 의하면 비가 억수같이 내린 뒤 갑자기 구름이 열리고 여러 가지 빛깔의 찬란한 빛이 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은 우여곡절 끝에 1930년이 되어서야 레이리아의 주교에게 인정되었고 이곳은 성지가 되었다. 지난 연말에 개봉되었던 '파티마의 기적'(2020)이 바로 이 이야기를 다룬 영화이다.

당시 성모 마리아를 만난 세 아이 가운데 프란시스코와 하친타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계를 휩쓴 스페인 독감으로 그로부터 각각 2년, 3년 후에 사망했다. 이 두 아이는 성모 발현 100주년이던 2017년 5월13일에 시성이 되었다. 이는 오랜 가톨릭 역사상 어린아이가 순교하지도 않고 성인이 된 최초의 사례라고 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루치아는 파티마의 기적을 인정한 교황청에 의해 특별 관리를 받으며 평생 수녀로 살다가 2005년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지금의 파티마는 더 이상 양이 풀을 뜯는 벌판이 아니었다. 거대한 성당이 지어졌고 그 주위로 호텔과 기념품점, 음식점들이 빼곡히 들어섰다. 매년 수백만 명의 순례자와 관광객이 찾는 도시가 된 것이다. 이 성지에는 세 개의 성당이 지어졌다. 광장 양 끝에는 파티마 대성당과 성삼위일체 성당, 그리고 중간에 성모발현 예배당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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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티마 대성당 내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올리브 나무가 늘어선 숲을 지나니 곧바로 파티마 대성당이 나왔다. 로사리오 바실리카로도 불리는 이 성당은 성모 발현을 기념하기 위해 교황청의 명으로 지었다. 바실리카는 흔히 '대성당'으로 번역되는 높은 등급의 성당을 말한다. 이 바실리카는 1928년 5월13일에 건축이 시작되었으며, 1953년 10월에 축성 받았다. 성당 안에는 성모를 만난 세 아이의 무덤이 있었고 정면 입구 양쪽 면에 마리아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세비야나 톨레도의 대성당에 비하면 수수하다. 하지만 성지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차분한 성스러움이 느껴졌다. 광장에서 바라본 대성당의 모습은 우아한 학처럼 보였다. 양쪽으로 날개처럼 펼쳐진 회랑 덕분인데 성당 안의 소박함과 달리 위엄이 있었다. 이 주랑은 수녀원과 병원 등 여러 채의 건물과 연결해 주고 있었다.

성모발현 예배당은 대성당의 오른쪽 날개 쪽에 있었다. 이곳이 바로 성모가 발현했던 실제 장소라고 한다. 이곳에서는 새벽부터 밤까지 매일 여러 차례 미사가 열린다고 한다. 얼핏 보면 유리 온실처럼 보이는 소담한 크기인데 오픈된 뒤쪽 출구까지 사람들이 꽉 들어차 미사를 올리고 있었다. 우리 일행도 각자의 방식대로 예를 표했다. 예배당 옆에는 성모를 만난 세 아이가 기도를 올렸다는 성모발현 나무도 푸르게 서 있었다. 나무 옆에는 초를 봉헌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예배당 근처를 두르고 있었던 긴 줄이 초를 봉헌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대기줄이었던 것이다.

광장을 가로질러 예배당으로 이어진 하얀 포석로는 순례자들이 무릎걸음으로 참회하며 예배당까지 오는 '참회의 길'로 불린다. 불교의 오체투지와 다를 바 없는 고행이었다. 교만을 떨쳐버리고 어리석음을 참회하는 수행의 방법은 어느 종교나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마음의 욕망을 덜어내기 위한 육신의 학대를 보면서 인간은 참 나약한 존재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것이 종교의 이유일 것이다.

참회의 길을 밟으며 광장 맞은편의 성삼위일체 성당으로 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전위적 느낌의 가늘고 긴 십자가 조형물이었다. 그 옆에는 이 성당의 초석을 기증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동상이 있었다. 성삼위일체 성당은 원형의 비잔틴 양식으로 2007년에 건축되었다. 8천50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세계에서 넷째로 큰 성당이라고 한다. 이 성당이 더 의미 있는 것은 총공사비 8천만 유로 전액이 전 세계 순례자들의 헌금이라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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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각국 언어로 성경 구절을 써놓은 성삼위일체 성당의 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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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상 (대구대 교수)
건물 한쪽 벽에는 세계 각국의 언어로 성경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한글도 보였는데 띄어쓰기가 잘못된 곳이 보여 아쉽기도 했다. 이것 역시 전 세계 순례자들을 배려한 조형물로 보인다. 성당 안에 들어서니 생소한 예수의 모습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성당 앞의 예사롭지 않았던 십자가 조형물처럼 여기에 계신 예수님은 갈색 피부에 인종도 성별도 구분할 수 없는 묘한 얼굴이었다. 그야말로 모두의 예수님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껏 내가 만난 예수님은 하나같이 하얀 피부의 백인 남성이었다. 우리나라 교회나 성당도 예외가 아니지 않은가. 이곳에서 처음으로 나를 닮은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하느님 앞에서 인간에 대한 생각이 더욱 많아졌다.

대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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