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향 영양. 7] 잉어가 얼음 깨고 나올 만큼 깊은 효심...오랑캐와 화의했다는 소식에 통곡...조검·조임 형제의 충효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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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09-28   |  발행일 2021-09-28 제13면   |  수정 2021-09-28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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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군 영양읍 하원리에 자리한 사월종택. 조임이 1602년 반변천변에 지은 집으로 옥선대를 바라보는 경승지이면서 일찍이 고승인 성지(性智)가 터를 잡은 명당이다. 토석 담장에 둘러싸인 사월종택은 정침과 누각인 사랑채가 붙어 있는 모습으로 조임은 사랑채를 월담헌이라 했다.

아주 오래전 영양은 고은(古隱)이라 했다. '숨겨진 곳'이라는 의미다. 그중에서도 병화가 닿지 않는 제일 명당이 영양읍 상원리(上元里)와 하원리(下元里)였다. 옛 이름은 원당리(元塘里)로 부드러운 산자락이 감싸고 마을 한가운데로 반변천이 흐르는 좁은 땅이다. 천변에는 신선이 내려와 놀았다는 선유굴(仙遊窟)이 있고, 옥부선인(玉府仙人)들이 바둑을 즐겼다는 옥선대(玉仙臺)가 있다. 또 반변천과 동천이 만나 비파와 같은 물소리를 낸다는 비파담(琵琶潭)이 있다. 선조임금 초, 아름답고 평온한 상원리와 하원리에서 한양조씨 조검(趙儉)·조임(趙任) 형제가 태어난다. 그들은 1519년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의 후손이었다.

기묘사화때 화입은 조광조의 후손
조모 슬하서 자란 형제, 효성 지극
병든 할머니 물고기 먹고 싶어 하자
조검 한겨울에 잉어 구한 일화 유명
조임, 전쟁으로 피폐해진 백성보며
임란 의병시의 백미인 '남정'남겨

병자호란땐 고령에 접어든 형제는
단 쌓고 오랑캐 몰아내도록 기도
남한산성 화의 소식 듣고는 통곡
후세사람 '축천단충절'이라 불러


#1. 한양조씨 조검·조임 형제

조광조가 화를 당한 후 그의 일가는 전국으로 흩어졌다. 영양으로 처음 들어온 한양조씨 입향조는 조광조의 손자인 참판공 조원(趙源)이다. 그는 영양에 살던 함양오씨(咸陽吳氏) 입향조 오필(吳)의 딸과 혼인하면서 영양 원당(지금의 상원리)에 정착했다. 조원은 1537년에 조광인(趙光仁), 1543년에 조광의(趙光義)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인 조광인의 아들이 조검(趙儉), 조임(趙任), 조적(趙籍)이며 부인은 광주안씨(廣州安氏)로 충순위(忠順衛) 안수인(安壽仁)의 딸이다. 3남인 조적의 생몰연대는 알려지지 않았다.

조검은 선조 3년인 1570년 상원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약(子約), 호는 수월(水月)이다. 그가 13세 무렵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세상을 떠났고 그와 형제들은 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조검은 어릴 때부터 소학을 손에서 놓지 않았고 선현의 좋은 행실을 따르는 데 힘썼다고 한다. 또한 효성이 매우 지극했는데 그에 대한 '비리동효행(飛鯉洞孝行)' 전설은 지금도 널리 알려져 있다.

어느 해 한겨울 병든 할머니가 강어(江魚)를 먹고 싶다고 했다. 조검은 엄동설한에 물고기를 구하러 다니지만 구할 수 없었다. 그는 강가에서 돌아가신 부모님께 울며 기원했다. 그러자 강에서 얼음을 깨고 큰 잉어가 스스로 뛰어올랐다. 조검이 그 잉어를 달여 할머니에게 드리니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고 전한다.

조임은 1573년에 하원리에서 태어났다. 자는 자중(子重), 호는 사월(沙月)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대한 열정이 높았다. 특히 충신열사들의 전기를 탐독했는데 나라가 위급할 때마다 충절을 다한 열사들의 이야기를 보고 들으며 언제나 의분으로 탄식했다고 한다. 또한 정암으로부터 가학을 이어받지 못하고 퇴계에게 배움을 청하지 못한 것을 한탄했고, 후에는 송간(松澗) 김윤명(金允明) 문하에서 수학했다.

#2. 임진왜란, 의병으로 일어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영양의 한양조씨들이 창의를 의논하고 있을 때, 조검은 곽재우의 편지를 받는다.

'(전략)의병을 모집하는 의논이 있었다 하니 힘을 얻게 됩니다. (중략) 오직 바라건대 즉일로 포산(苞山)에 이르러 함께 의리를 이루는 것이 하찮은 이 사람의 바라는 바이고(후략)'

이에 조검은 아우 조임과 함께 곽재우의 진영에 들어가 화왕산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다. 이때 조검은 선친으로 물려받은 재산 쌀 오백 섬, 기마 수십 필, 가신 40명을 보내 힘을 보탰다. 이 공로로 아버지 조광의는 판결사, 조검은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됐다.

당시 조임은 화왕산성으로 가는 길에 전쟁으로 피폐해진 마을과 백성들의 삶을 보며 시 '남정(南征)'을 남겼다. 이는 임란 의병시의 백미로 여겨진다.

'만력 임진 여름/ 요상한 기운 험한 바다 덮었네./ 어찌하여 천악이 넘쳐/ 온 천하가 모두 잠겨버렸네. (중략) 풍찬노숙의 괴로움 견뎌내면서/ 화살에 거는 마음 일성처럼 밝도다./ 어느 날 오랑캐를 평정하여/ 소의간식하는 임금님의 마음을 위로해 드릴고.'

그의 호 '사월(沙月)'은 1597년 의병이 해산될 때 곽재우가 조임의 의로움을 칭찬하며 지어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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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읍 하원리에 있는 숙운정. 조임이 1621년 비파담 위에 지은 정자로 도연명의 '구름이 처마 끝에 자고 간다(詹端宿雲)'라는 시구에서 뜻을 취했다고 한다. 1889년 후손인 조언겸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중수했다.

#3. 수월과 사월의 집

임진왜란 후에도 조검은 자신이 태어난 영양읍 상원리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상원2리를 비리곡(飛鯉谷) 또는 비릿골이라 부르는데 '잉어가 나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지금은 폐교된 상원초등(현 마주앙 펜션)에서 비리동천길을 따라 400m 정도 들어가면 정자나무 맞은편에 '비리동천'이라 새겨진 비석이 서 있다. 이 외에 상원리에 조검의 자취는 아쉽게도 남아있지 않다.

조임은 1602년 하원리 반변천변에 집을 지었다. 한양조씨 사월종택이다. 옥선대를 바라보는 경승지로 일찍이 고승인 성지(性智)가 터를 잡은 명당이다. 그는 차남이라 물려받은 재산이 거의 없었지만 영해의 안동권씨 종가와 혼인을 맺은 후 처외가인 인량리 대흥백씨 집안의 재산을 1천석 넘게 물려받으면서 넉넉해졌다.

토석 담장에 둘러싸인 사월종택은 정침과 누각인 사랑채가 붙어 있는 모습이다. 조임은 사랑채를 월담헌(月潭軒)이라 했다. 현판은 창석 이준(李埈)의 글씨다. '월담'은 주자의 무이구곡 제4곡인 '달은 빈산에 가득하고 물은 못에 가득하다(月滿空山水滿潭)'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대청 문을 열면 반변천 물길과 먼 산이 환하다. 조임은 이곳에서 이준, 오운(吳澐), 신지제(申之悌), 홍위(洪瑋) 등과 폭넓게 교유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조임은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광해군 5년인 1613년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1620년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 1621년 통정대부에 제수되었지만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1621년에는 '정절(靖節)선생'이라 불렸던 도연명의 '구름이 처마 끝에 자고 간다(詹端宿雲)'에서 뜻을 취해 비파담 위에 또 다른 정자인 숙운정(宿雲亭)을 건립했다. 숙운정에서 그는 산수를 벗하고 시가를 짓고 지기들과 울분을 삭이며 시사를 논했다고 한다. 현재의 숙운정은 1889년에 후손인 조언겸(趙彦謙)이 중수한 것으로 하원리 마을 입구에 있으며 정자의 오른쪽에는 조임의 신도비각이 자리한다.

#4. 단을 쌓고 통곡하다

인조 5년인 1627년에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조임은 '이 땅에서 먹고사는 것이 나라 은혜 아닌 것이 없는데 어찌 벼슬에 있지 않다고 하여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며 곳간을 열어 군량미를 나라에 헌납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조검·조임 형제는 이미 고령이었다. 형제는 집 뒤에 단을 쌓고 매일 밤 이 땅에서 오랑캐를 몰아낼 것을 하늘에 빌었다. 이후 남한산성에서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형제는 단에 올라 통곡했다고 전한다. 이를 후세 사람들은 '축천단충절(祝天壇忠節)'이라 했다. 축천단이 있던 자리에 1827년에 세운 비가 보존되어 있다. 비리곡 입구에 있는 마주앙 펜션(전 상원초등학교) 옆이다. 김유헌은 '어진 사람이 죽으면 서원을 짓고 빛나는 현판을 내 거는 것을 보았으나 평지 한 조각 땅에 축천단이라 이름하여 백대의 청풍을 일으키는 것을 누가 보았는가'라며 그들의 고절을 기렸다.

조검은 병자호란 이후 일월면 도계리(道溪里)로 이거해 집을 짓고 사의정사(思義精舍)라 했다. 이후 한양조씨 수월공파가 형성됐고 오늘날까지 도계리를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사의정사는 현재 참판공 종택으로 2002년에 옛집을 철거하고 새롭게 중건했다.

종택 옆에는 그의 충효를 기려 후손들이 지은 수월헌(水月軒)이 자리한다. 수월헌은 '물과 달이 어우러진 처마 높은 집'이라는 뜻이다. 원래 영양읍 상원리에 있던 것을 1922년에 지금의 위치에 다시 세웠고 2005년에 전면 보수했다. 세 칸 겹집인 소박한 정자 앞에는 연못이 푸르고 두 그루 은행나무가 곧다. 조임은 병자년 이후 문을 닫고 폐인을 자처하며 여생을 살았다. 자리 곁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朝聞道) 저녁에 죽어도 좋다(夕死可矣)'는 논어 구절을 새기고 평생 경계하는 삶을 살았다고 전한다.

조검은 1644년 2월14일 사의정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조임은 그해 3월19일 명나라의 의종황제가 죽고 명이 이자성의 난과 청의 침입으로 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필시(絶筆詩)를 한 수 남기고 7월5일 운명하였다.

'상전이 벽해로 변하는 미친 물결이 정북방에서 몰아치니/ 명나라를 위하는 생각으로 바람부는 구천에서 눈물 지운다/ 붉은 명정에는 숭정호를 적어 가지고 가니/ 남자의 한번 죽는 해로선 부끄럽지 않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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