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재향 영양 .8] 국권 강탈 당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간 의병장 김도현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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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0-19   |  발행일 2021-10-19 제12면   |  수정 2021-10-19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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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산이 재산을 털어 쌓은 검산성은 항일 유격전의 근거지였고 의병 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규모는 다소 작았지만 돌들의 이음새에 허술함이 없다.

검산(劒山, 혹은 검각산)은 경북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 마을의 뒷산이다. 일월산의 줄기가 남쪽으로 달려 이룬 작은 산이다. 상청리 마을 한가운데를 통과해 산비탈의 밭 가운데로 난 길을 오르면 정면에 성이 보인다. 검산성(劍山城)이다. 이 성은 구한말 항일을 위해 개인이 쌓은 성이다. 싸우기 위해 그는 자신의 재산을 털었고, 그의 일족과 소작인들은 돌을 날랐다. 그리고 이곳에서 거듭되는 혈전이 있었다. 뺏기고 빼앗으며 왜적과 의병들이 갈마들어 주둔했다. 나라를 빼앗긴 어느 날, 결국 그는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구한말 영양의 의병장 벽산(碧山) 김도현(金道鉉)이다.

을미사변 일어나자 청량산서 의병 모집
경북지역 7개 의병과 연합의진 결성
일본군 병참부대 공격 전과 거두기도
열등한 무기로 패퇴에도 유격전 지속
일제 횡포에 맞서 거병 준비하다 체포
옥고 치른 뒤 옛 영양관아 객사 수리
영흥학교 설립하고 구국의지 이어가
국권 강탈 당하자 통곡하고 목숨 끊어


#1. 검산성

벽산 김도현은 1852년 7월14일 상청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김녕(金寧), 자는 명옥(明玉)이다. 아버지는 참봉 김성하(金性河)이며 단종 복위사건에 가담하여 처형되었던 백촌(白村) 김문기(金文起)의 14세손이다.

벽산은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세상이 크게 어지러울 징조라 여기고 병서를 주야로 탐독했다고 한다. 이후 1894년 동학군이 봉기하고 민심이 흉흉해지자 향리의 동지와 점고회(點考會)를 조직해 병사를 훈련시켰다. 1895년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벽산은 가재를 털어 봉화 청량산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지역 유생과 일가권속이 나라를 위해 의병으로 나섰다. 벽산이 이끄는 영양 의병은 곧 경북 지역 7개 의병과 연합의진(聯合義陣)을 꾸리고 3월에는 상주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해 상당한 전과를 거두기도 했다.

벽산은 1896년 4월 삼척전투에서 패한 뒤 영양으로 돌아와 검산성에 본진을 두고 진영을 재편성했다. 그가 재산을 털어 쌓은 검산성은 규모는 다소 작았지만 돌들의 이음새에 허술함은 없었다. 지금 성벽은 서쪽 200m가량과 남쪽 일부 구간만이 남아 있다. 원래는 검산의 정상부에서 서쪽과 남쪽에 자연석을 이용해 벽을 쌓아 올리고 서쪽의 경사면에는 토석으로 성벽을 쌓았다고 한다. 급경사를 이루는 동북쪽은 자연 지형을 그대로 이용해 성벽으로 삼았다. 아래에는 해자처럼 천이 흐르고, 산의 경사면을 따라 흐르는 성벽은 동쪽의 단애를 만나 마무리되어 지형지세를 살핀 축성이다. 입암면에서 올라오면 바로 보이는 요충지에 위치하고 있고 성에 오르면 망루와 같이 시야가 훤하다.

진영을 재편한 벽산은 검산성을 중심으로 영양, 안동, 청송, 영덕, 영해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그가 이끄는 의병진은 열등한 무기로 인해 패퇴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영양, 예안 등지를 전전하며 유격전을 지속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조정의 명으로 일단 의병은 해산됐다. 벽산은 을미의병 때 마지막으로 의병을 해산한 인물로 기록되었다. 그는 자신의 항일 의병 투쟁 전말을 일기체로 기록한 창의록을 남겼다. 의병 봉기를 모의한 1895년 12월1일부터 의병진을 해체한 1896년 10월15일까지 약 10개월 동안의 일들이 날짜순으로 기록되어 있다.

검산성은 벽산이 일월산을 중심으로 펼쳤던 유격전의 근거지였고 의병활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 지금 성 안에는 잡초가 무성하다. 성 밖의 밭에는 지난여름 해바라기가 환하게 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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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양군 청기면 상청리에 위치한 벽산 생가. 검산성 아래 자리한 이 집에서 벽산이 태어나고 자랐다. 오른쪽은 검산성 아래 위치한 창의순절기념비. .

#2. 벽산생가

성 아래 마을에는 벽산이 태어나고 자란 집이 있다. 마을에 들어서면 '벽산생가'라 새겨진 커다란 바윗돌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조금 들어가면 그의 생가가 나타난다. 아주 단출한 집이다.

건물은 임진왜란 때 군자감정(軍資監正)으로 선조를 호위한 김응상(金應祥)이 1580년경에 처음 지었다고 하나 현재의 건물은 18세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벽산은 유년기에 조부 김하술(金夏述)의 가르침을 받았다. 조부는 생가 근처에 괴암서당(槐巖書堂)을 열었는데 벽산은 그곳에서 글을 배웠다. 어린 시절 아이들과 놀 때면 나무를 깎아 병사를 만들고, 모래로 그림을 그려 진을 치고, 돌을 모아 성채를 만들어 군진놀이를 했다고 한다. 8세 때는 마을 앞 개천에서 돌로 둑을 쌓고는 '수중기일성(水中起一城)'이라는 글을 지었는데 조부가 이를 보고 범상치 않은 아이라고 칭찬했다고 한다.

벽산생가는 정면 4칸, 측면 4칸 규모의 'ㅁ'자형 건물이다. 생가 주위에는 방형의 토석담장을 둘렀으며, 전면에는 3칸 규모의 대문채가 초가를 이고 서 있다. 대문채 처마도리에 '벽산정사(碧山精舍)'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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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산의 업적을 기리고 그 뜻을 이어가기 위해 세웠다.

벽산은 1896년에 의병진을 해체하고 은거했지만 이후에도 항일 활동을 계속했다. 1902년과 1904년에는 의병을 다시 일으킬 것을 촉구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외교권이 박탈되자 이른바 을사5적의 처단을 촉구하는 상소를 올렸고, 각국 공사관에 포고문을 보내 조선을 강제 병합하려는 일제의 횡포를 막는 데 힘써 달라고 호소했다. 1906년에는 고종황제로부터 밀지를 받는다.

'밀칙으로 경에게 분격장군을 내리고 겸하여 은밀히 효유하노라. 경은 모름지기 우리 선왕들을 은혜롭게 하고 우리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 의로운 군대를 고무하여 먼저 도적들을 피곤하게 하고 간흉을 제거하여 나라의 원수를 물리치도록 하라!'

벽산은 거병을 준비하던 중 1907년 봄에 체포되어 달성 감옥에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감옥에서 나온 뒤 벽산은 지역의 유지들과 옛 영양관아의 객사를 수리해 영흥학교(英興學校)를 설립했다. 그는 교장에 선임되어 교육을 통한 구국의지를 펴기도 했다.

1910년 8월29일, 일제에 의해 국권이 강탈당하자 며칠을 통곡하고 자결을 결심한다. 그러나 부모보다 먼저, 그것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었다. 그에게 남은 재산은 없었지만 부모 봉양에는 극진했다고 전한다.

1914년 7월, 그를 후원하고 지지했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벽산은 상례를 마무리 지은 후 시를 지어 뜻을 밝혔다.

'늦게야 죽으려니 묻힐 땅이 어디인가. 옛 나라의 남겨 둔 땅이 없구나.'

그리고 동짓날이었던 11월7일 영해 대진의 북쪽 산수암(山水岩)에서 유서 한 통을 바위 위에 놓고 바닷가로 나가 상복과 신발을 벗어 접어놓은 뒤 옷깃을 여미고 몸을 단정히 했다. 벽산은 상중에 쓰는 대지팡이를 짚고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가 파도의 가운데로 한 걸음 한 걸음 들어가는 것을 나루터 주변의 사람들이 모두 둘러서서 바라보았다고 한다. 그 마지막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다로 그대로 걸어 들어가서 시신도 떠오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벽산의 나이 63세였다.

'조선왕조 오백년 마지막에 태어난 나/ 붉은 피 온 전신에 엉키었구나/ 중년의 독립운동 19년에/ 머리칼은 늙어 서리 끼었는데/ 나라가 망하니 눈물이 하염없고/ 어버이 여의니 마음도 아프구나/ 머나먼 바다가 보고팠는데/ 이레가 마침내 동지이더라/ 홀로 외롭게 서니 옛 산만 푸르고/ 온갖 헤아려도 방책이 없네/ 희고 흰 저 천길 물속이/ 내 한 몸 넉넉히 간직할 만하여라.'

벽산이 남긴 임절시(臨絶詩)다. 1962년 정부에서는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73년에는 산수암에 도해단(蹈海壇)이 세워졌다. 해마다 벽산의 생일인 음력 7월14일에 '도해단 전례'가 열린다. 검산성 아래에는 창의순절기념비와 벽산선생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디지털 영양군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국학진흥원 누리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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