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2] 문종·단종을 가르친 조선 초 성리학의 대가 윤상은 어떻게 거위 뱃속의 진주를 꺼냈을까

  • 김진규 소설가·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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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1-15   |  발행일 2021-11-15 제11면   |  수정 2021-11-15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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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이 세상을 뜨고 한 해 뒤인 1456년에 그를 제향하기 위해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에 건립한 불천위사당 윤별동묘. 단정하게 정리된 입구를 따라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사당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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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별동묘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사당에는 윤상과 그의 부인 정부인 안동전씨(安東全氏)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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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은 생전에 미호리 동쪽의 등성이에 자리한 정자 청심대(淸心台)를 즐겨 찾곤 했다.

#1. 관솔불 아래 책벌레

1374년 9월 신하의 손에 잔인하게 살해당한 제31대 고려 공민왕의 뒤를 이어 10세의 우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보다 한 해 전인 1373년 10월 예촌 별동리(別洞里)에 똘망똘망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향리 윤선(尹善)의 아들 윤상(尹祥·1373~1455)이었다.

윤선은 늘그막에 본 아들을 보며 감격에 젖었다.

"꿈에서 학을 받아 기이히 여겼더니 태몽이었구나."

학은 관복의 흉배에 수놓는 길한 짐승이었다. 아들의 미래가 기대된 윤선은 밝고 슬기롭다는 뜻의 '철(哲)'로 이름을 지었다. 훗날 진사시에 합격해 '상(祥)'으로 바꿀 때까지 윤상은 20년 동안 윤철로 살았다.

"집안이 별것 없기는 해도 윤선 어른의 소생이니 성품은 보장이 아닌가."

"아무렴, 덕행은 두텁고 몸가짐은 청아한 분이 낳았는데 오죽하려고."

마을 사람들이 한입으로 예견한 대로 윤상은 어려서부터 행실이 남달랐다. 한마디로 어린 선비였다. 공부 욕심도 많았다. 한창 나가서 놀 나이에도 글을 익히느라 밤낮을 가리지 않았고, 예천 관아의 사동(使童·잔심부름을 맡아하던 급사)이 되고부터는 공부에 더 집요해졌다.

"간밤에 상이 어쩌고 있는지 보았는가? 관솔불 아래서 책에 고개를 파묻고 있더군."

"보다말다, 그러다 머리카락 태울까 걱정이야. 아무래도 예천에서 큰 인물이 날 듯하이."

그런 윤상을 당시 수령이던 조용(趙庸·미상~1424)이 눈여겨보았다. 당대 성리학계의 대표 격이던 대학자 조용은 유심한 관찰 끝에 결심했다.

"나이답지 않게 신중하고 침착할 뿐만 아니라 총명하기까지 하니 내 키워봄직하다."

조용은 결심하고 윤상을 직접 가르치기 시작했다. 윤상은 근면과 성실로 주경야독함으로써 스승의 기대에 부응했고 이는 곧 결실로 드러났다. 1392년(태조1) 약관 20세의 나이로 진사시에 합격한 데 이어 이듬해에는 생원시 합격자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다. 당시는 조선 건국 초기로 분야별 업무가 산적한 시기였다. 이때 윤상은 동판내시부사(同判內侍府事)의 역할을 다해 왕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윤상 등은 보조(補助)의 이익이 크니 그 공을 기록할 만하다. 포상하라."

그리고 그로부터 3년이 흐른 1396년(태조5) 윤상은 24세의 나이로 식년 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했다. 집안을 일으켜 세운 커다란 경사였다.


1373년 고려말 별동리서 출생
관솔불 밝히고 주경야독 공부
1396년 24세때 식년문과 급제
김시습·김숙자 등 제자 길러내

78세에 물러나 미호리 터잡아
가르침 구하는 선비들 줄이어
별세 다음해 불천위사당 건립
'진주 삼킨 거위' 이야기 주인공



#2. 성리학의 대가, 두 왕을 길러낸 스승

급제 후 선주유학교수, 보주유학교수, 서부교수, 산음감무, 조봉대부상주교수, 황간감무 등 지방관으로 내공을 쌓은 윤상은 집현전학사와 예문관제학 등을 거쳤고,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그러던 1421년(세종3)이었다. 왕이 윤상을 불렀다.

"세자의 스승이 되어 국본을 세우라. 내 그대를 믿는다."

윤상은 기꺼이 받잡아 세자(문종)의 교육에 힘썼다. 그렇다고 윤상이 세자의 스승이기만 하지는 않았다. 본디 권력과는 먼 학관으로서 그를 따르는 제자들이 무수했다. 실제로 그의 나이 63세이던 1435년(세종17)에 성균관의 수장인 대사성(大司成)이 되고부터는 후진 양성이 더 본격화되었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쓴 김시습(金時習), 영남사림의 기반을 구축한 김숙자(金叔滋), 대제학 김구(金鉤) 등 그가 배출한 제자들이 이름을 혁혁히 날렸다. 그러는 동안 윤상의 머리에 서리가 잔뜩 내렸다. 결국 윤상은 69세가 되던 해에 사직을 청했다. 하지만 왕이 반려했다.

"불가하다. 그대가 늙었다 하나 학술이 정명하고 덕행이 높아 타의 지극한 모범이다. 아울러 따르는 제자가 많으니 그들이 실망할까 염려된다. 하니 과인의 곁에 더 머물라."

한술 더 떠 원손(단종)의 성균관 입학을 계기로 박사(博士)로 임명해 힘을 더 실어주기까지 했다. 꼼짝없이 붙들린 윤상은 훗날 왕이 될 세자와 세손의 스승으로 도성에 계속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즉위한 1450년, 팔순을 고작 2년 앞두고서야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무려 성균관 대사성만 16년을 역임한 역대 최고의 학관이었다. 이때 왕이 믿고 의지하던 스승과의 이별을 못내 아쉬워하며 승정원에 "전송에 성의를 다하고 예천관아로 하여금 매월 식물(食物)을 공궤(供饋)하게 하라"고 명함으로써 윤상의 말년을 알뜰하게 챙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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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보문면 미호리 예천윤씨 집성촌. 윤상이 벼슬에서 물러나 터를 잡은 곳이다.

#3. '진주 삼킨 거위' 구한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

성균관의 말단 정자에서 시작해 우두머리인 대사성으로 벼슬살이를 마무리한 윤상은 고향 예천의 미호리에 터를 잡았다. 하지만 그는 조용히 지낼 수 없었다. 윤상에게서 가르침을 받겠다며 선비들이 몰려들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윤상은 조선 개국 이래 으뜸가는 사범(師範)이라 불리는 대학자였다. 선비들이 멀리서도 찾아올 만했다.

윤상을 찾는 유생들이 끊이지 않다 보니 조정도 술렁였다. 급기야는 윤상을 다시 불러들이려는 시도까지 있었다. 하지만 워낙 연로한 탓에 고향에 남아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집중했고, 가히 당시 성리학의 주종이라 일컬음을 받았다.

그러던 1455년 윤상은 자신을 스승으로 모시는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쫓겨나기 약 석 달 전인 3월에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예천군 북쪽 성북산(城北山)의 볕이 잘 듣는 산기슭에서 장례를 치르는 동안 스승과의 영원한 이별을 슬퍼한 제자들의 곡소리가 산을 울렸다.

그로부터 한 해 뒤인 1456년(세조2)에 윤상을 제향하기 위한 불천위사당(不遷位祠堂) 윤별동묘(尹別洞廟)가 미호리에 건립되었다.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로, 낮은 기단 위에 세워진 사당에는 윤상과 그의 부인 정부인 안동전씨(安東全氏)의 위패가 함께 모셔져 있다. 해마다 음력 3월8일이면 예천윤씨(醴泉尹氏) 종가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1995년에는 경북도 유형문화재 제293호로 지정되었으며, 사당 내에 보관돼 있던 별동집 목판은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으로 옮겨진 뒤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했다.

생전에 윤상은 미호리 동쪽의 등성이에 자리한 정자 청심대(淸心台)를 즐겨 찾고는 했다. 산이 수려하고 내성천이 맑아 머리를 식히기도 하고 제자들과 더불어 강론하며 시간을 보냈다. 하루는 윤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자신이 겪은 이야기를 풀어주었다.

"내 오래전 모처에 다녀오던 중에 날이 저물어 주막에 들렀지. 마루에 앉아 있는데 주인의 손자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구슬 한 개를 들고 촐랑대다가 그만 손에서 떨어뜨렸네. 마침 아이 옆에 있던 거위가 먹을 것인 줄 알고 그 구슬을 날름 집어 삼켜버렸고."

눈을 반짝이는 제자들에게 윤상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한데 그 구슬이 꽤나 귀한 물건이었던 모양인지, 주인이 이만저만 화를 내지 않더군. 결국 그 화가 나한테까지 미쳤네. 한마디로 내가 훔쳤다, 이것이지. 그러면서 관에 가자고 성화를 부리기에 '저 거위도 묶어 하룻밤만 같이 있게 해주게. 하면 내일 아침에 틀림없이 구슬을 찾을 수 있을 것이네' 하고 부탁했네. 주인 입장에서야 난데없는 소리였겠으나 들어줘서 손해 볼 일도 아니고 날도 저물었으니 그러기로 되었지."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인의 무례함을 성토하는데 윤상이 다시 말을 이었다.

"하면 어찌 되었을꼬. 날이 밝아 거위가 똥을 누면서 해결이 됐지. 거기서 구슬이 나왔거든. 당연히 주인이 민망해하면서 왜 거위가 삼켰다고 진즉 말하지 않았느냐 하더군. 해서 '그랬다가는 홧김에 거위를 죽였을 것 아니오. 내가 하룻밤만 고생하면 될 것을' 했더니 진심으로 미안해하며 사과를 하더군."

그리고 인자한 얼굴로 덧붙였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범사에 침착하고 인내함으로써 큰 뜻을 이루기를 바라는 나의 진심을 알아들었으면 좋겠구나."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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