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3] "조선 선비가 자기 역사를 모르다니"...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 저술 나선 권문해

  • 김진규 소설가·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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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1-22   |  발행일 2021-11-22 제18면   |  수정 2021-11-22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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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예천군 용문면에 자리한 초간정.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 대동운부군옥을 저술한 권문해가 지은 정자로, 물을 굽어보는 바위 위에 터를 닦아 앉은 풍모가 더없이 매혹적이다.

연산군때 무오사화로 가문 큰 고초
1560년 별시문과 급제 집안 일으켜
방대한 자료수집 대동운부군옥 집필
지리·나라·성씨 등 11개 항목 20권
초고집필 초간정 1739년 옛터 재건


#1. 오복(五福)을 이을 자손

사랑채 대소재(大疎齋) 마루에 한 청년이 서 있었다. 학가산 능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신을 신고 발을 내디뎠다. 수십 보를 걸어 닿은 곳은 집 앞에 자리한 향나무 아래였다.

"할아버님, 기뻐해 주십시오. 소손, 향시에서 장원을 했습니다."

권지(權祉)의 아들, 19세의 초간(草澗) 권문해(權文海·1534~1591)였다. 울컥해진 그가 향나무를 향해 말을 이었다.

"소손이 집안을 일으킬 것입니다. 나아가 이 나라에 커다란 보탬이 될 것입니다."

50여 년 전만 해도 뜨르르한 가문이었다. 특히 할아버지 권오상을 비롯한 오행·오기·오복·오륜 5형제는 모두 과거에 급제해 조정으로부터 '오복문(五福門)'이라 칭송받기도 했다. 하지만 복은 오래 머물러주지 않았다. 1498년(연산군4)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화근이 돼 무오사화가 터진 것이다. 김종직이 부관참시되는 등 수많은 선비가 화를 면치 못했다. 김종직의 문인이었던 셋째 권오복도 예외가 아니었다. 잔인하게 능지처참 당했고 다른 네 형제도 유배를 떠났다. 가문의 몰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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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정 인근에 있는 초간권선생신도비.

다행스럽게도 1506년 중종반정으로 다섯째 권오상이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전남 강진에서 고향인 예천 죽림리로 돌아온 그의 짐에 작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바로 지금 권문해가 보고 선 향나무였다.

마음을 가다듬은 권문해는 퇴계 이황을 찾아갔다. 대학자의 그늘에서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등과 더불어 학문의 지경을 넓혔다. 이는 1560년(명종15) 별시 문과 급제로 이어졌다.

권문해는 형조좌랑·예조정랑 등을 거쳐 1570년(선조3) 영천(榮川·지금의 영주)군수로 나아갔다. 임기를 마친 후 도성으로 돌아가 성균관전적·사간원정언 등을 지낸 뒤 안동부사·청주목사·공주목사의 지방관직을 다시금 수행했다. 그렇게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치는 동안 권문해는 한 가지 사실로 늘 마음이 아팠다. 우리나라의 문화를 얕잡아보는 뭇지식인의 태도였다.

"조선의 선비들이 중국의 역사와 역대 치란흥망(治亂興亡)에 대해서는 상세히 꿰면서도 정작 우리나라의 역사는 문자가 없던 옛날의 일처럼 아득하게 여긴다. 눈앞의 물건을 보지 못하면서 천리 밖을 응시하는 짓과 다를 바가 없으니 실로 안타깝구나."

그러면서 권문해는 '운부군옥(韻府群玉)'을 떠올렸다. 운부군옥은 원나라의 음시부(陰時夫)가 중국의 역사를 운별로 정리, 배열해 지은 사전이었다.

"우리에게도 일목요연한 사전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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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용문면 예천권씨 초간종택은 1589년(선조 22) 권문해의 할아버지인 권오상이 지은 집으로, 오른쪽 뒤편에 있는 사당에 권문해의 불천위가 모셔져 있다.

#2. 대동운부군옥의 탄생

초간정사(草澗精舍) 아래로 물소리가 야단스러웠다. 권문해는 바로 앞의 원고에 몰두하느라 아무 소리도 듣지 못했다. 공주목사에서 물러나 예천 고향으로 돌아온 이래 하루같이 매달린 작업이었다. 바로 동방(東方)에 자리한 대국(大國) 우리나라의 운부군옥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의 초고 집필이었다. 이를 위해 방대한 분량의 자료도 모았다. '삼국사기' '계원필경' '신라수이전' '은대문집' 등을 포함한 우리나라 저서 174종과 '사기' '한서' 등을 비롯한 중국 저서 15종 등이 그것이다.

집필의 원칙도 명료했다.

"하나, 민족자존의 견지에서 방언과 속명 등 우리 고유의 것들을 그대로 기록한다. 둘, 원본에 충실하여 서로 모순되는 기록이라도 내 마음대로 가감하지 않는다. 셋, 자료를 최대한 광범위하게 다룬다. 넷, 후대에 교훈이 될 만한 내용은 더욱 중요하게 다룬다. 다섯, 유학의 뜻을 존숭한다."

집필에 여념이 없던 어느 날 조정에서 어명이 내려왔다.

"임금께서 그대를 원합니다. 속히 입궐하십시오."

권문해는 다시 도성으로 불려 올라갔다. 사간원과 사헌부에서 그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청직의 소임을 다하는 동안에도 권문해는 자료 수집과 초고 집필을 쉬지 않았다. 이는 1584년(선조17)년에 부사의 직을 명 받아 대구로 내려와서도 계속되었다. 그리고 1587년(선조20) 11월26일(음 10월27일) 본격적으로 정서 작업에 돌입했다. 분류체계는 '운부군옥'을 참고해 한자의 상평성(上平聲) 15운, 하평성(下平聲) 15운, 상성(上聲) 29운, 거성(去聲) 30운, 입성(入聲) 17운의 총 106운으로 세웠다. 내용은 우리나라의 지리, 나라, 성씨, 인명, 효자, 열녀, 수령(守令), 신선, 나무, 화초, 동물 등 11가지 항목으로 설정했다. 범위는 단군 시기부터 당시 조선 선조조까지를 망라했다.

"하면 제1운은 '동운(東韻)'이 되리."

권문해가 조심스럽게 붓을 놀렸다.

'움직인다는 뜻이다. 봄을 가리키는 방위다.((東/動也 春方也)/진나라 황제가 고구려왕 연을 정동장군 낙랑공에 봉했다[출전:남사](征東/晉帝封高句麗王璉爲征東將軍樂浪公[南史])'

집필 의도에 걸맞게 권문해는 역사에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다. 삼한, 삼국, 고려의 역대 왕은 물론이고 말갈, 거란, 몽골, 왜의 역사까지 실었다. 1589년(선조22) 20권 20책으로 집필이 완료되었다. 만일에 대비해 두 질을 더 만들어 두기까지 했다.

대장정을 마무리한 권문해가 성주에 머물던 벗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찾아갔다. '대동운부군옥'의 완고 소식에 정구가 반색했다.

"식견을 넓히고 싶으니 부디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내심 걱정이 됐지만 권문해는 한 질을 빌려줬다. 그런데 얼마 뒤 정구의 집에 불이 나는 바람에 흔적도 없이 타버리고야 말았다. 권문해는 속이 상했으나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고 너그러이 넘겼다.

그로부터 2년이 흐른 1591년(선조24) 사간이 된 권문해를 퇴계 이황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이 찾아왔다. '대동운부군옥'을 살펴본 김성일이 감탄했다.

"그냥 두기 아깝습니다. 이러한 역작은 나라에서 보급해야 합니다."

권문해는 흔쾌히 또 한 질을 김성일에게 넘겼다. 그러는 동안 권문해는 몸에 이상을 느꼈다. 집필로 인한 과로의 후유증이라 할 수 있었다. 결국 권문해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8월11일(음 6월23일)에 사간의 직을 내놓고 도성의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나이 57세였다. 그의 부음을 들은 임금이 명했다.

"예조는 들으라. 권문해의 상여를 지극정성으로 고향까지 호송하라."

김성일은 벗의 이른 죽음을 통탄하며 홍문관의 책임자로서 대동운부군옥 간행을 준비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터지면서 북새통 와중에 사라져 버렸다.

이 사실에 아들 권별(權鼈)은 절통했다. 남은 하나를 소중히 보관하며 한 질을 더 필사해 두었다가 훗날 정산서원(鼎山書院)에 모셨다. 나아가 아버지가 수집해둔 장서의 힘으로 '해동잡록(海東雜錄)'을 펴냈다. 14책 규모의 방대한 인물사전이었다. 부전자전이었다.

세월이 흘러 1798년(정조22) 7세손 권진락(權進洛)이 다시 출간을 준비했다. 대사헌을 역임한 정범조(丁範祖)에게서 서문을 받는 것부터 차근차근 단계를 밟았다. 그리고 1812년(순조12) 본격적으로 간행을 시작해 1836년(헌종2) 드디어 대동운부군옥을 완간했다. 권문해 사후 245년만의 일이었다.

#3. 초간(草澗)으로서의 삶

'풀 초(草)'와 '산골 물 간(澗)'의 호처럼 권문해는 청섬(淸贍), 맑음이 넘치는 삶을 살았다. 그가 '대동운부군옥'의 초고를 집필한 정자 '초간정(草澗亭)'도 그의 호에서 따왔다. 정자의 이름은 본래 '초간정사(草澗精舍)'였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 소실되고 말았다. 1626년(인조 4) 권문해의 아들인 죽소(竹所) 권별(權鼈)이 재건했는데 이 역시 화재로 타고 말았다. 100년이 넘도록 방치되다 1739년(영조 15)에 현손인 권봉의(權鳳儀)가 옛 터에 중수했다. 전면 세 칸 측면 두 칸, 건물 중앙에 방 한 칸을 배치했다. 계곡 쪽으로 난간을 설치했다. 계곡의 바위 위에 막돌을 쌓아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에 세운 팔작지붕 건물이다. 금곡천이 보이는 4m 높이 절벽에 바짝 붙어 자리한 정자의 풍모는 더없이 매혹적이다. 처마 남쪽에는 초간정사(草澗精舍), 북쪽에는 초간정(草澗亭), 동쪽에는 석조헌(夕釣軒)이라고 쓴 편액이 걸려 있다.

권문해의 정신은 '초간일기'에도 남아있다. 생전의 그는 1580년 11월부터 1591년 10월까지 약 10년간의 일정을 '선조일록' 117장, '초간일기' 90장, '신란일기' 34장으로 구분해 기록했다. 조정과 지방관아에서 일어난 일, 관리들의 생활, 당쟁에 관련된 인물을 비롯해 정치·국방·사회·교육·문화·지리 등을 아울러 꼼꼼하게 적었다.

권문해는 사후에 나라가 내린 불천위(不遷位)가 됐다. 신주가 모셔진 초간종택 사당에서 초간정사까지 도보로 40여 분 거리. 그사이를 풀향과 물소리가 부지런히 오간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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