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중심에 선 예천人 .5] 구한말 일본화폐의 유통에 맞서 '금융 주권' 지키려 했던 장화식

  • 김진규 소설가·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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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1-12-06   |  발행일 2021-12-06 제11면   |  수정 2021-12-06 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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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식은 벼슬길에 나아가기 전 예천 봉덕산 중턱에 자리한 서악사에 들어가 공부했다. 이 일을 계기로 서악사 입구 바위에는 '蓮坡讀易山(연파독역산)'이 음각되었다. 연파만(蓮坡晩·장화식의 이칭)이 역경(易經)을 읽은 산이라는 뜻이다.

#1. 포의(布衣) 선비가 재상이 되기까지

1853년 2월 예천 호명 내성천 옆 안질마을. 딸만 있던 장영제(張永濟)와 창원황씨(昌原黃氏) 부부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학암(鶴巖) 장화식(張華植·1853~1938)이었다. 늦둥이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던 만큼 장화식은 영특했다. 겨우 7세 나이에 천자문을 떼는 등 비상한 기억력으로 주변을 놀라게 했다. 부모의 사랑이 함박눈처럼 쏟아졌으나 오래 가지 못했다. 이듬해에 어머니가 세상을 뜬 것이다. 장화식은 애통비통하며 3년상을 치렀다.

"어른도 저리 못한다. 하늘이 내린 효자다."

상실의 슬픔을 장화식은 공부로 잊었다. 그런 아들을 아버지 장영제가 지극한 정성으로 보살폈다. 그러는 동안 철종이 승하하고 고종이 보위에 올랐다. 장화식에게도 변화가 찾아왔다. 의성 봉정리 사람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혼인해 아들 쌍둥이를 본 것이다. 용환과 봉환이었다.

젊은시절 봉덕산 서악사서 학문 연마
훗날 절 입구 바위 '연파독역산' 음각
한성부판윤·통신원총판 요직 역임
일본인 불법 전신주 아예 뽑아버려
불공정한 한일통신협정 반대운동도


어깨가 무거워진 장화식은 학문을 심화하기 위해 예천 봉덕산 서악사(西岳寺)로 향했다. 서악사는 1701년(숙종27) 창건해 1737년(영조13)에 이건한 직지사(直指寺)의 말사였다. 스무 살의 장화식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밀어두고 주역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이 일을 계기로 훗날 서악사 입구 바위에 '蓮坡讀易山(연파독역산)'이 음각되었다. 연파만(蓮坡晩·장화식의 이칭)이 역경(易經)을 읽은 산이라는 뜻이다.

절 생활이 한창이던 어느 날 낯선 스님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세상의 이치를 논하던 가운데 장화식이 "물은 온천처럼 뜨거운 물이 있는 반면, 불은 얼음처럼 차가운 불이 없습니다"하며 자신만의 논리를 풀었다. 스님은 탄복했다.

"훗날 큰 재상이 될 그릇이십니다."

장화식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1878년에 초시에 합격하고도 약 9년간을 조용히 지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때가 이르렀다. 1887년(고종24)에 의금부도사가 된 것이다. 이후는 스님의 예언처럼 흘러갔다. 참령(參領), 군부경리국장(軍部經理局長), 육군부령(陸軍副領)과 같은 요직을 거쳐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통신원총판(通信員總辦, 우체·전신·전화·전기·선박·육해운 수송 등의 분야를 관장하던 기관의 으뜸 관직) 등 재상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고종의 전폭적 신임 하에 이루어진 인사였음은 물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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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식이 일본제일은행권의 유통금지를 고시한 1903년 2월5일자 황성신문.

#2. 퇴계 이황의 신주를 새로 모시다

1901년이 저물어가던 12월, 원수부(元帥府, 국방·용병·군사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기관)의 군무국부장(軍務局副長) 직을 수행하던 장화식에게 손님이 찾아왔다. 퇴계 이황의 후손 참봉 이돈호(李敦鎬)였다.

"오늘자 황성신문에 퇴계 선생의 신주가 분실되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신문을 확인하기 전이었던 장화식은 경악했다. 바로 알아보니 유학의 성지 도산서원에 도둑이 들어 신주를 훔쳐갔다는 내용이 떡하니 찍혀 있었다. 서원 관리인이 수감되고 예안군수와 경북관찰사가 동분서주하는 동안 장화식이 고종을 찾았다.

"도산서원은 국학(國學)입니다. 국가의 원기가 흔들리고도 남을 변란입니다. 머리를 하늘에 두고 발로 땅을 밟고 선 자라면 모두가 절박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건의 전후좌우를 꼼꼼하게 조사한 후 다시 아뢰었다.

"오래전 김인후(金麟厚·인종의 스승)와 조헌(趙憲·의병장)의 위판을 분실했을 때 나라에서 제사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니 위판을 다시 만들어 봉안할 수 있도록 윤허해 주소서."

고종은 흔쾌히 허락했다. 장화식은 품질 좋은 위패목을 구해 공경을 다해 실어 보냈다. 이를 유림에서 받아 고증을 거친 규격에 따라 새로이 제작해 1902년 1월26일에 봉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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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화식이 한때 공부한 서악사. 1701년 창건해 1737년에 이건한 직지사의 말사다.

#3. 일제와 대립하며 국권을 수호한 한성부판윤

1902년(고종39) 9월17일 장화식은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명예와 권력의 자리였으나 실상은 전쟁에 나선 장수의 입장이었다. 특히 날로 증가하는 외국인의 주택과 토지 매입 문제가 골치 아팠다. 하지만 장화식은 단호하게 해결하며 국권을 지켜나갔다.

"독일인 상인 모세을의 초가 파손에 대해 사실을 조사한 결과 피해가 과장되었다. 보상을 불허한다."

"미국인 웜볼트의 토지 문서 발급 신청건을 면밀히 파악한 결과 허위로 밝혀졌다. 문서 발급이 불가하다."

뿐만 아니라 경운궁 인근 건축물에 대한 고도를 제한하고, 궁궐 담장 500m 이내의 신축을 금지하는 등 해묵은 미결사항 또한 엄격하게 집행했다. 그렇게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던 11월의 어느 날 보고가 들어왔다.

"농상공부 고문 일본인 가토 마스오(加藤增雄)가 자택에 전화를 가설하겠다며 공사를 시작했다고 합니다."

장화식은 대로했다. 통신원에서 승인하지 않았음을 모두가 아는데 이를 어긴 것이다. 안 그래도 전신(電信)·무선 등의 영역에서 멋대로 사업을 벌여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일본이었다.

"우리만의 전화 사업을 시작한 이상 외국인의 전화시설은 허가 못한다고 분명히 밝혔거늘 감히!"

장화식은 서둘러 조사를 시작했다. 그 결과 불법으로 세운 전신주가 무려 23개나 된다는 보고에 즉각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그럼에도 일본 측은 묵살하고 그대로 강행했다.

"백주대낮에 대궐 지척에서 무허가 전화 공사라니, 더는 용납할 수 없다."

장화식은 통신원에 협조를 구해 전신주를 아예 뽑아내버리는 강수를 두었다. 일본인의 불법 전화 시설 설치를 온몸으로 막으며 국권을 지킨 것이다. 일제에게 미운 털이 단단히 박혔음은 물론이었다.

장화식은 또 일본제일은행권의 유통 금지를 고시해 한국 화폐가치의 하락과 주권 침탈을 막는데도 진심을 다했다.

불법전화 설치 일로 분기탱천해 있던 그에게 어느날 또 다른 보고가 올라왔다.

"진고개에 사는 일본인이 집을 저당잡고 돈을 내주었는데, 일본제일은행에서 발행한 일본화폐라고 합니다."

"결국 일이 터졌구나."

장화식이 한성부판윤이 되기 전부터 일본제일은행권은 문제가 되고 있었다. '이 권면의 금액은 재한국 각 지점에서 일본통화를 가지고 태환함'이라고 적힌 이 은행권은 금화가 아닌 일본은행 태환권이었다. 즉 도쿄에서만 태환이 가능해 우리 백성에게는 식민지적 신용화폐에 불과했다. 장화식은 기가 막혔다. 우리 정부에서 발행하지도 않은 비정상적인 화폐가 유통되면 어떤 피해가 초래될지 예상되고도 남았다. 무엇보다 우리 화폐의 가치가 폭락해 주권이 흔들릴 것이 자명했다. 장화식은 1903년 2월5일 황성신문에 자신의 명의로 고시했다.

'일본인들이 일본제일은행권을 주조하여 우리나라 은행의 각 지점에 유통하고 있다. 일본인이 상호 간에 통용함은 간섭할 바 아니나 우리 인민이 통용했다가는 병폐가 생길 것이다. 이를 막지 않으면 장차 손해가 이루 말할 수 없기에 알린다. 대소인민은 그 은행권을 절대로 사용하지 말라. 몰래 주고받는 자는 적발하여 단호히 중벌로 다스릴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 물러서지 않았고 대한제국 정부는 굴복하고야 말았다. 일본제일은행권의 통용 금지를 진두지휘하다시피 한 장화식으로서는 한성부판윤 직을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소신, 통탄을 금치 못하며 사직을 청합니다."

1903년 2월12일 사직서가 수리되었다. 그렇다고 그의 의기가 꺾인 것은 아니었다. 1904년 통신원회판(會辦), 1905년 통신원총판(總辦)으로 일하는 내내 통신권 수호를 위해 항거했다. 핵심은 한일통신기관협정 조약 반대였다. 협정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하나, 국내에 있는 우편전신사업의 관리를 일본국 정부에 위탁한다. 둘, 이미 설치된 통신설비 일체를 일본에 이양한다. 셋, 통신기관의 운영에 필요한 토지 등을 무상으로 제공한다. 넷, 수익금은 면세로 한다.'

온갖 특권이 망라된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다. 장화식은 물리적 충돌도 서슴지 않고 반대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대세는 일본으로 기운 터였다. 결국 협정은 체결되었고 장화식은 총판직에서도 물러났다. 그러자마자 을사늑약이, 1907년에는 정미7조약이 체결되었다. 대한제국은 더 이상 나라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장화식은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고종 사후 19년째이자 순종 사후 12년째인 1938년, 한 서린 몸을 고향 봉덕산 서악사 후운평(後雲坪)에 뉘었다.

장화식의 충심은 두 아들에게로 이어졌다. 장봉환(張鳳煥)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립학교인 육영공원에서 수학한 수재였다. 벼슬길도 탄탄대로였다. 칙임검사, 육군보병부령, 시종원시종(侍從院侍從·비서관), 시위연대(궁궐수비대)대대장 등 고종의 최측근 요직을 거쳤다. 그러다 대구진위대장으로 근무하던 중 일제의 압력으로 보직해임됐다. 이유는 의병활동 지원과 의병봉기 선동. 그때가 1905년 아버지 장화식이 한일통신기관협정 조약을 반대하다가 통신원총판직에서 물러난 바로 그해였다. 그리고 장용환(張龍煥)은 고향 원곡서당(原谷書堂)에서 선생의 삶을 살았다. 1919년 3·1운동 때 예천 만세운동을 주도한 생도들이 다닌 바로 그 서당이다.

글=김진규<소설가·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 : 예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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