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최근 '주작'이란 낱말을 처음 알았다. 남쪽 방위를 지킨다는 붉은 봉황을 형상화한 사신도의 주작이 아닌 '조작'을 뜻하는 주작이다. 인터넷을 보니 '주작'이란 말이 많이 쓰이고 있다. '주작질'이란 표현도 있다. e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알기 어려운데 이 낱말은 2010년 스타크래프트 승부조작 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모양이다. 특정 개인 방송에서 '조작'을 금지어로 정하자 이를 회피하기 위해 '주작'을 대신 사용했는데 이것이 널리 퍼진 것이다.
국어사전은 없는 사실을 꾸며 만드는 것을 주작(做作·지을 주, 지을 작)이라 설명한다. 좋지 못한 목적 아래 무슨 일을 지어내거나 꾸며내는 것을 조작(造作)이라 하니, 주작과 조작은 거의 동의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왜 그동안 주작이란 말의 존재를 알지 못했을까? '주작'은 사전에 박제된 사어(死語)였다. 누군가 이 죽은 말을 끄집어내었는지 아니면 우연히 사용된 것인지 알 순 없으나 결과적으로 "나의 사전에 주작이 있다"는 사실만은 이번에 확인되었다.
사전에 있는 말이지만 내게 있어 '주작'은 신조어다. 사전에 인쇄만 돼 있던 부활한 신조어다. 인터넷 나무위키를 보니 1950년대 중반까지는 신문 기사에 '주작'이란 말이 사용되었으나 이후 1992년 기사에 한 번 나올 뿐이라 한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니 조작(造作)이 574회, 주작(做作)이 116회 나온다. 그러나 두 낱말의 쓰임새는 다른 듯하다. 조작은 주로 물건을 만드는 뜻으로 쓰이고, 주작은 주로 나쁜 일을 꾸미는 것을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주작은 형벌, 상소, 무고죄 등의 낱말과 함께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지금 우리 사전은 조작과 주작을 비슷한 의미로 설명하고 있으나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제조나 제작을 뜻하던 '조작'이 주작을 대신하면서 '주작'은 점차 제자리를 잃은 것으로 보인다.
![]() |
최근 수년간 우리 사회에 국적 불명의 신조어가 넘쳐나는 현상을 염려하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과도한 말 줄이기, 외래어와 우리말의 야합 수준의 결합, 특정 세대와 직업군의 은어가 당당한 듯 커밍아웃하는 모습이 정녕 자연스러운 것일까 의심이 든다. 어느 시대에나 신조어는 있었지만 요즘처럼 매스컴이 앞서 무차별적으로 보급 운동(?)을 펼치는 것을 그다지 본 적이 없다. 별도로 설명해 주지 않으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생면부지의 말을 신문이나 인터넷 보도는 괄호를 쳐가며까지 애써 가르치고 전파한다. '주작' 역시 이 현상의 한 산물이리라.
나는 사람들에게 한자 공부할 것을 권하고 있지만 '주작'은 조상들이 쓰던 한자어를 되살린 것이므로 괜찮다 반길 생각은 없다. 우리 사회가 한자 공부에 좀 더 너그러웠다면 굳이 잠든 한자어를 깨울 필요 없이 품격있고 현대 한국어와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감각의 한자어들이 많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세상이 변하므로 말도 그에 걸맞게 변화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겠으나 여기에도 기준과 속도 조절은 필요하다. 누가 이 역할을 책임져야 하나.
과거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국력을 기울여 서양의 말을 신조어로 번역해 낸 역사를 교훈으로 삼는다면 오늘 이 시간까지 일본제 신조어를 무상으로 넙죽 받아 챙기고 시치미를 떼는 우리의 행태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젊은 세대의 감수성이란 핑계로 더 숙성돼야 할 날것을 신조어란 미명으로 무분별하게 퍼뜨리는 일을 언제까지 할 것인가. '주작'의 부활을 바라보는 느낌이 개운치 않은 이유다.
이경엽 <한자연구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