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재근의 시대공감] 왜 예능 조작의 시대가 되었나

  • 하재근 문화평론가
  • |
  • 입력 2022-01-07   |  발행일 2022-01-07 제22면   |  수정 2022-01-07 07:21
SBS예능 프로그램 '골때녀'

제작진 득점순서 조작 파문

스포츠의 진정성 훼손 논란

리얼 내세우면서 재미 위해

옛날식 편집하다가 된서리

2022010601000180000007051
하재근 (문화평론가)

최근 SBS 인기예능 프로그램인 '골 때리는 그녀들'(이하 '골때녀')에서 조작 파문이 나타났다. 구척장신 팀과 원더우먼 팀이 경기를 했는데, 일방적으로 진행된 경기를 마치 흥미진진한 대추격전이 펼쳐진 것처럼 방송했다는 것이다. 가장 재미있는 점수차라는 펠레스코어, 즉 3-2도 중반에 나왔다. 하지만 실제는 전반에 4-0 또는 5-0이었기 때문에 3-2는 완전히 허구였다.

이렇게 되자 중계 중에 "원더우먼이 펠레스코어를 만들었습니다"라며 3-2를 언급한 배성재 아나운서에게도 조작 가담 의혹이 제기됐다. 제작진은 '일부 회차에서 편집 순서를 실제 시간 순서와 다르게 방송했다'면서 사과했고, 배성재 아나운서는 1년 동안 제작진이 촬영 현장에서 요구하는 멘트를 그대로 읽어줬다고 했다.

의혹이 더욱 심화됐다. 1년 동안 그런 녹음을 했으면 조작이 과거에도 있었을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제작진이 조작을 인정하면서 '이번 회차'라고 하지 않고 '일부 회차'라고 했기 때문에 또 다른 조작의 가능성이 더 커졌다. 결국 SBS사 측이 직접 나서서 추가 조작을 인정하며 프로그램 연출진 징계를 천명했다.

이 사건에 많은 이들이 충격받은 것은 '골때녀'가 축구 리그 프로그램이었기 때문이다. 운동경기 내용까지 조작할 거라고는 시청자들이 상상하지 못했다. 물론 경기 결과는 사실대로 방송됐고 경기 진행 순서만 바뀐 거였지만, 진행 순서의 중요성도 매우 크기 때문에 논란이 일파만파 확산됐다. 예컨대 진행 순서에 따라 똑같은 점수차라도 일반적으로 끝난 경기가 후반 추가시간 극적인 대역전극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런데도 제작진은 경기결과를 바꾸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해 마치 진행 순서 조작은 별거 아니라고 여기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출연자인 김병지 감독도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며, 내용은 편집으로 재밌게 해도 되는 걸로 여겼다고 해명했다. 이 해명에도 질타가 쏟아졌다.

이 사건은 예능을 대하는 예능계 인사들과 시청자들 간의 거리가 얼마나 먼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예능계에선 출연자를 일반적으로 '연기자'라 부른다. 드라마가 아닌데도 이런 말을 쓰는 것에서, 예능이 연출에 의해 이야기를 꾸며나가는 부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골때녀' 제작진은 "이번 일을 계기로 예능적 재미를 추구하는 것보다 스포츠의 진정성이 훨씬 더 중요한 가치임을 절실히 깨닫게 됐다"고 사과했는데, 사람들은 제작진이 진정성의 중요성을 이제야 깨달았다고 실토한 것에서 크게 놀랐다. 이번에 논란이 터지지 않았다면 제작진은 여전히 진정성의 중요성을 모른 채 예능적 재미를 만들어갔을 것이다. 이렇게 일반인과 예능계의 시각이 달라진 계기는 리얼의 등장이었다. '무한도전' '1박2일' '패밀리가 떴다' 같은 리얼버라이어티가 국민예능이 되고 그후 리얼예능·관찰예능 전성기가 전개되면서 리얼이 예능의 대표 키워드가 됐다.

시청자는 그 리얼을 진짜 리얼로 받아들였는데, 예능계에선 단지 예능의 새로운 장르 정도로면 여긴 것 같다. 장르가 바뀌었어도 재미를 위해 뭔가를 꾸미는 작업방식은 바뀌지 않았는데 바로 그 점이 시청자에게 충격과 실망을 안겨줬다. 요즘 진정성의 중요성이 매우 커졌다. 정치인도 거짓말 논란으로 한순간에 추락한다. 시청자는 예능에도 진정성을 요구하게 됐다. 네티즌 수사대가 프로그램의 진실성 여부를 바로바로 검증한다. 이런 시대가 됐는데 제작진이 리얼을 내세우면서도 옛날식대로 편집하다가 된서리를 맞은 것이다. 대중이 진정성을 요구하는 시대라는 점을 방송계가 유념할 일이다.

문화평론가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

영남일보TV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