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규 기자의 '지구촌 산책' .22] 프랑스 스트라스부르, 중세도시로 떠난 시간 여행…거대하고 섬세한 대성당에 경이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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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4-15 08:11  |  수정 2023-01-20 08:13  |  발행일 2022-04-15 제35면
유럽 각국 연결하는 중심지에 자리한 '길의 도시'
서양 첫 금속활자·인쇄술 발명 구텐베르크 동상 광장
한개 첨탑으로 건축, 정면서 보면 비대칭 '노트르담'
죽음의 인형이 구원의 드라마 연출 천문시계 눈길
400년전 목조주택으로 만든 쁘띠 프랑스 마을과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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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의 첨탑이 있는 건물 부분. 142m나 되는 높이에다 전체의 건물 규모도 너무 커서 주위에서는 전체를 담을 수가 없을 정도다.

얼마 전 TV 뉴스를 시청하던 중 프랑스 스트라스부르가 언급되는 것을 들을 수 있었다. 러시아군 포격이 이어지는 우크라이나 서부 르비우의 상황과 관련한 뉴스였다. 여러 구호단체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을 넘어와 구호품을 르비우에 전달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중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한국계 난민 구호단체 사람들이 르비우에 들어가 음식과 생필품을 전달했다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승합차에 고기와 소시지, 커피 등 800kg을 싣고 1천500㎞를 달려 르비우에 도착, 피란민들에게 전달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했다.

한편 뉴스를 보며 몇 년 전 스트라스부르를 여행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스트라스부르는 2015년 봄 독일 몇몇 도시를 여행하다 찾아가 잠시 둘러본 도시인데, 매우 인상적이었던 곳이다.

스트라스부르는 작은 도시이지만, 오래된 역사와 각별한 사연을 품고 있다. 유럽연합(EU)의 입법기구인 유럽의회가 있는 도시인 점이 말해주듯이 현재도 유럽의 중요한 도시이면서, 과거 중세의 모습도 잘 간직하고 있는 매력적인 도시다.

스트라스부르에는 유럽의회를 비롯해 유럽평의회, 유럽인권재판소, 유럽학교, 유럽과학재단 등 유럽연합 관련 기관 20여 개가 있다. 유럽의회의 소재지가 이곳인 이유는 전후 독일과 프랑스의 화해 상징으로 독일과 접해있는 프랑스의 이 유서 깊은 도시가 적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길'을 뜻하는 독일어 '스트라세(Straße)'와 '도시'를 뜻하는 프랑스어 '부르(Bourg)'를 더해 만든 이름인 스트라스부르. '길의 도시'라는 뜻처럼 스트라스부르는 실제 유럽 각국을 연결하는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다.

20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이 도시는 음식, 언어, 문화 등에서 독일과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라인강과 일강 사이에 있는 북부 라인강 평야의 비옥한 이 지역은 중기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스트라스부르는 원래 켈트족 마을이었다. 로마인 지배 때는 아르젠토라툼이라는 수비대 마을이었고, 아르젠토라툼은 기원전 12년에 처음으로 언급되었다. 스트라스부르는 이를 기점으로 1988년, 2천 주년 기념일을 축하하기도 했다.

17세기까지는 독일에 포함된 지역으로, 신성 로마 제국에 소속된 도시였다. 17세기 프랑스가 30년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전리품으로 알자스 로렌 지역을 차지하면서 스트라스부르도 프랑스에 넘어갔다. 이후 프랑스와 독일이 알자스 로렌을 놓고 쟁탈전을 벌일 때마다 스트라스부르의 주인도 계속 바뀌었다. 1870년 보불전쟁으로 다시 독일 땅이 되었지만, 제1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승리하면서 49년 만에 다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17세기 프랑스가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정책적으로 독일어 사용을 억제하고 프랑스어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역민 대다수는 독일어 방언을 사용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지속적인 프랑스어 교육으로 프랑스어가 많이 보급되었다. 현재 지역 주민들은 대부분 프랑스어를 능통하게 할 수 있다. 주민들의 상당수는 여전히 독일어에도 능통하지만, 그 비율은 점점 적어지고 있는 추세다.

그리고 이곳은 서양에서 처음으로 금속활자와 활판 인쇄술을 발명, 금속활자 성경책을 처음으로 찍어낸 것으로 유명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살면서 활동하던 곳이다. 그래서 구시가지에 그의 동상이 있는 구텐베르크 광장이 있다. 당시 스트라스부르는 유럽 인쇄술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시가지 중 오랜 역사를 품은 유적지와 옛 건축물을 잘 간직하고 있는 그랑딜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지정됐다. 그랑딜은 일강이 둘러싸고 있는 작은 섬 지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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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천문시계의 맨 아래 왼쪽 부분. 쇠창살 문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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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스부르 대성당 내부의 스테인드글라스 중 하나.

◆스트라스부르 대성당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은 구시가지에 있는 성당으로, 정식 명칭은 스트라스부르 노트르담 대성당. 노트르담(Notre Dame)은 '성모마리아'를 뜻한다.

빅토르 위고가 극찬한 이 성당은 1176년에 건축을 시작해 1439년 완공됐다. 첨탑 부분의 높이는 142m에 달한다. 이후에도 1880년까지 증축을 거친 뒤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700여 년의 긴 세월을 거치며 완성된 성당은 고딕 양식과 로마네스크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근처의 보주산맥에서 채석한 붉은 사암으로 지어져 붉은 빛이 나는 이 성당은 다양한 건축 양식에도 불구하고 조화로움을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주위에서는 한꺼번에 전체 모습을 담을 수 없을 정도의 웅장한 규모, 섬세하고 화려한 외관 장식 및 조각들이 우선 압도하며 눈길을 끈다. 보통 고딕 양식 성당들은 첨탑 2개가 대칭 구조를 이루는데 이곳은 첨탑이 하나뿐이다. 첨탑 건축 당시 경제적인 이유로 하나밖에 못 지었다고 한다. 정교하게 조각된 입구와 하나뿐인 탑으로 이루어진 이 성당은 정면에서 보면 비대칭이다.

빅토르 위고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대해 '거대하고 섬세한 경이'라는 표현을 했다.

내부도 외부 못지않게 웅장하고 화려하다. 12세기에서 14세기까지 다양한 시대에 만들어진 스테인드글라스의 아름답고 정교한 모습을 볼 수 있고, 거대한 천문시계(天文時計:천문 관측용 정밀 시계)도 관광객의 눈길을 끈다.

1771년 학업을 위해 스트라스부르에 온 21세의 괴테는 이 시계를 보고는 "웅장한 모습에 내 혼이 진정되었고, 세세한 모습을 차분히 음미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하나하나를 구분해 설명하는 것은 불가능했다"라고 했다.

중세의 대표적 천문시계 중 하나인 이 시계는 이자크 하브레히트(1544~1620)가 1574년에 처음 만들었다.

성당 내부 3층 높이 석조 구조물 안에 설치된 천문시계는 정오가 되면 퍼포먼스를 펼친다. 종이 울리고 인형들이 움직이며 '구원의 드라마'를 연출한다. 첫 번째 무대는 한 손에는 낫을 들고 다른 손에는 인간의 뼈를 든 죽음의 인형이 15분 간격으로 종을 친다. 종소리에 맞춰 귀엽고 통통한 소년, 청년, 군복을 입은 남자, 가운을 입은 노인이 그 앞을 지난다. 인간의 삶의 여정이 덧없고 무상함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처럼 인간적인 모든 것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다, 마지막 순간 맨 위쪽 무대가 돌아가며 12사도 인형이 지나가고 예수의 형상이 나타나 시간을 알리던 죽음의 신을 몰아낸다.

이 성당의 원래 천문시계는 18세기 후반에 작동이 멈춰 철거되고, 현재의 것은 19세기에 만든 복제품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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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라스부르 쁘띠 프랑스의 독일식 목조주택 거리 풍경. 왼쪽 건물이 1572년에 건립됐다.

◆옛거리 '쁘띠 프랑스'

'작은 프랑스'라는 뜻의 쁘띠 프랑스 구역에서는 여러 개의 운하와 16~17세기에 지어진 전통 목조주택 등이 있는 잘 보존된 오래된 거리를 만날 수 있다. 좁은 거리에 다양한 식당과 가게, 카페 등이 즐비하다.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서 멀지 않은 곳인 그랑딜의 서쪽 지역인 쁘띠 프랑스는 400여 년 전에 조성된 마을이다. 이곳은 일강으로 통하는 수로들이 있는데, 당시 물과 관련된 어부, 물방앗간 운영자, 제분업자, 가죽공방 장인 등이 주로 살면서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거리는 특히 물가를 따라 늘어선, 하얀 벽과 검은색·갈색 나무 골조가 어우러진 전통 목조주택들이 인상적이었다. 4~5층 건물이 대부분인데, 건축 연대가 표시되어 있는 건물도 눈에 띄었다. 300년~400여 년 전의 주택들로, 독일식 목조건물이라고 한다. 1572년에 지어진 테너스 하우스가 대표적인데, 지금은 식당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목조주택들을 살펴보니, 우리 한옥과는 구조나 장식 등이 매우 달랐다. 기본적으로 다층 건물인 데다 지붕도 다르고, 우리와 달리 벽체 뼈대를 이루는 나무 골조를 다양하게 사용한 점이 특히 눈에 들어왔다. 우리 한옥이 문살에 꽃살문, 격자문 등 다양한 장식을 표현하는데, 이 건물은 벽체 나무 골조 자체를 다양한 모양으로 많이 사용해 멋을 부리고 있었다.

나무 골조 사이를 흙으로 메운 벽을 근간으로 만들어, 해체와 조립이 용이하다. 그래서 부동산이 아닌 동산으로 분류되고, 땅 주인과 건물주가 달라 건물만 사서 다른 곳으로 옮겨 조립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내부 리모델링 외에는 일체의 다른 공사를 할 수 없도록 보호하고 있다고 한다.

글·사진=김봉규 전문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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