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과 창] 일단 만들고 보자?

  • 박봉규 전 대구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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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02-22  |  수정 2023-02-22 07:17  |  발행일 2023-02-22 제26면
일만 터지면 새로운 제도나

조직부터 만드는 행태 지양

제도 정교화·조직 규모 확대

신설 후 축소나 폐지 불가능

부작용 고려해 신중 기해야

[시선과 창] 일단 만들고 보자?
박봉규 전 대구시 정무부시장

조선시대에는 지금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신분계층이 있었다. 엄연히 양반집 자식이면서도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신세였던 홍길동과 같은 서얼 계급이다. 서얼이란 양반 아버지와 평민 또는 천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자식들을 일컫는다. 일부일처제의 가족제도가 유지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첩을 인정하는 이중적 잣대를 지녔던 조선 사회 시스템의 희생양들이다.

이 제도는 조선 초 가족 사이의 질서유지라는 명분으로 '서얼금고법'이 제정되면서 시작되었다. 누가 봐도 불합리한 제도였지만 서얼금고법은 없어지기는커녕 시간이 흐름에 따라 오히려 차별의 대상은 넓어지고 내용은 깊어져만 갔다. 양반들의 사회 진출 통로인 관직의 수는 제한되어 있던 반면 양반의 숫자는 늘어남에 따라 자기보호와 기득권 지키기에 매달린 적장자들이 적서차별을 강화해 나간 까닭이다.

법률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있다. 사회문제가 생기면 정치력과 행정력을 이용하여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거나 기존의 시스템을 활용하여 해결할 생각을 하는 대신 새로운 법부터 만들고 보는 행태이다. 신법을 근거로 새로운 제도와 조직이 생기고 이를 집행할 사람들이 충원된다. 평소에는 작은 정부를 부르짖다가도 정작 문제가 터지면 빨리 대책을 세우지 않고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국민과 언론의 성화가 빗발치고 그 위에 대단한 일을 한 건 했다는 입법자나 관료의 행태가 보태져 손쉽게 새로운 제도와 기관이 생긴다.

그러나 문제 해결을 위해 새로운 법과 제도 그리고 조직을 만드는 일은 쉽게 생각하고 추진할 일이 아니다. 영웅주의적 접근이 발을 붙일 영역이 아니다. 새로 만들어진 조직은 당장은 일정 정도 긍정적 기능을 수행하겠지만 제도나 조직은 자체 생존력이 있어 미래 여건이 변화하는 경우에도 변화를 주기 어렵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제도의 내용은 깊어지고 조직의 규모는 커지는 것이 상례이다. 새로 만드는 것도 쉬운데 보태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 혁명적 상황이 아니면 만들어진 제도나 조직을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고 규제 완화를 위한 노력이 피부에 와닿지 않는 이유이다.

무엇보다 제도는 한번 만들어지면 구성원뿐만 아니라 제도의 존재로 이익을 누리는 집단이나 세력이 생기기 마련이다. 모두가 폐지나 축소에 공감하는 경우라도 그 제도에 목을 맨 집단이 죽기 살기로 덤벼들면 중립적인 다수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는 것이 우리 현실이다. 양보로 인한 피해가 당장 자기에게 미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얼에 대한 차별을 없애 이들의 능력을 국가경영에 활용하고자 한 선각자들과 왕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 제도는 갑오개혁으로 모든 신분제가 폐지될 때까지 조선 500년간 끈질기게 유지되었다. 힘을 가진 집단들이 저항했기 때문이다.

민간영역에서는 그나마 시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감이 어느 정도의 변화를 강요할 수도 있지만 공공영역에는 그런 채찍도 없다. 이는 중앙정부나 지방정부 모두 마찬가지이다. 일만 터지면 일단 새로운 제도와 조직을 만들고 보자는 사고는 지양되어야 한다. 당면한 문제의 해결도 필요하지만 신설된 제도나 조직이 먼 장래에 가져올 영향과 부작용도 함께 살펴야 한다. 만들어 놓고 떠나가면 나는 관계없다는 태도는 비겁한 것이다.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박봉규 전 대구시 정무부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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