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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재괴(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 |
"대한제국의 대신들은 날마다 새로운 시대의 영광스러운 자리를 얻기 위해 분주하고 기뻐했다."
을사오적의 매국으로 늑약이 체결된 지 5년 만인 1910년, 대한제국이 결국 망하자 중화민국 초기 계몽사상가인 양계초가 '일본병탄조선기'에서 쓴 내용 중 일부다. 고종은 분노했다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그는 영민하지 않았다. 왕이 영민한데 나라가 망한 사례는 역사에 없기 때문이다. '국권과 언어를 강탈당한 민족'이라는 상실감과 분노는 온전히 백성의 몫이었다.
대한제국 황실을 떠난 민심은 1917년 7월 신규식·박은식·신채호·조소앙 선생 등 14명의 명의로 발표된 '대동단결 선언'에 확연히 나타나 있다. '황제권이 소멸한 때가 바로 민권이 발생한 때'라며 왕권을 부정하고 민권을 강조한 것이다. 순종의 주권 포기를 근거로 '삼보(인민·영토·정치)'를 계승하는 국민주권설을 정립함으로써 독립운동의 지향점을 확실히 보여 줬다. 민권은 '모든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보편적 권리이며 그 권리는 평등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이 갑자기 민권을 들고나온 것은 아니다. 이즈음 민권은 세계를 바꾸고 있었다. 1911년 중국에서는 신해혁명으로 청 왕조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세워졌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파시즘과의 대결에서 의회 민주주의가 승리했다. 1917년 러시아에서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노동자·농민이 중심이 된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이 탄생했다.
1919년(기미년)에 일어난 3·1운동 역시 세계사적 흐름인 민권의 기초 위에서 일어났다. 민족대표 33인과 경신학교 졸업생 정재용이 파고다공원에서 낭독한 독립선언서는 사전에 전국으로 배포됐다. 그동안 일본의 압제에 억눌렸던 감정이 폭발하며 한반도뿐 아니라 미주·만주·연해주 등에서도 독립만세를 외쳤다. 학생과 지식인이 수행한 역할이 적잖았지만 일반적으로 농촌지역이 대다수인 관계로 농민이 주역이었다. 전국에서 체포된 인사 가운데 55.6%가 농민이었다. 피해 상황은 정확하지 않지만 각종 정보를 수집해 기록을 남긴 박은식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 따르면 한국 측 사망자는 7천509명, 부상자 1만5천961명, 체포된 자 4만6천948명이었다.
3·1운동은 대한민국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먼저, 임시정부가 중국 상하이에 설립돼 해외에 산재하던 독립운동가들이 집결하는 계기가 됐다. 그것은 세계 여론에 호소해 독립을 달성하려는 민족자립 전략이 중심이었다. 둘째, 민권의 가치를 위한 운동이었다. 1919년 3월 말에서 4월 초 사이 집중적으로 방방곡곡에서 들끓듯이 일어난 것은 독립을 통해 귀천이 없는 평등사회에서 살고자 하는 열망 때문이었다. 즉 민권의 나라에서 살고 싶은 열망의 표출이었다. 이 시기에 복벽(復壁·임금의 복위)을 주장하는 독립운동가는 없었다.
셋째, 정치적 연대의식을 표출한 최초의 운동이었다. 3·1 독립운동은 단군 이래 정치적 연대의식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백성들이 상호 공감과 가치를 공유한 운동이었다. 이를테면 전국 네트워크가 없던 시절에 '독립'이라는 동일한 목적과 공통의 정치적 구호로 연대의식을 표출한 최초의 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치와 이념은 1919년 4월11일 대한민국 임시헌장에도 명시돼 있다. '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로 한다' '3조 대한민국 인민은 남녀 귀천 및 빈부의 계급이 없고 일체 평등하다' 등 임시헌장의 가치는 오늘날 대한민국 헌법이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104년 전 3·1운동은 자존과 자결을 위해 스스로 들고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역사적 소명이었다. 자주독립과 민권의 가치를 위해 우리 독립운동가들이 헌신했듯 오늘날에도 자유와 평등을 위해 보편적 가치를 지키기 위한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현재 여야 정쟁과 국론 양극화로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3·1운동이 민족을 하나로 통합했듯 다양성을 인정하고 협치의 동반자로 인식해 국론분열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는 통합정신에 우리 민족의 미래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변재괴(광복회 대구시지부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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