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력있는 호국의 도시 상주 .2] 경상도의 중추도시

  • 류혜숙 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 |
  • 입력 2023-04-26 07:35  |  수정 2023-04-26 13:40  |  발행일 2023-04-26 제12면
조선 초기 경상감영 소재지…경상도감사가 상주목사 겸직

2023042501000771300032141
상주 왕산의 동쪽, 북천과 남천이 만나는 삼각의 평야지대인 복룡동에는 옛 경상도의 중심지였던 상주경상감영을 재현한 '태평성대 경상감영공원'이 위치한다.

상주는 경상도의 대읍(大邑)이었다. 고려시대 경주의 경(慶)과 상주의 상(尙)을 합해 경상도라 한 것만 보아도 그 위상을 알 만하다. 고려와 조선 초기, 지방의 중심이 되는 대읍과 그 수령(守令)을 계수관(界首官)이라 했다. 상주는 계수관으로서 영동, 보은, 문경, 봉화, 영주, 안동, 의성, 군위, 대구, 성주, 구미, 김천 등을 포괄한 광범위한 지역을 관할했다. 과거를 위한 인재를 뽑아 올리고, 도량형을 점검하고, 민심을 수습하는 등 그 지역의 교통·경제·교육·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고려의 15개 계수관 중 하나였던 상주의 위상은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조선 태종 8년 경주→상주 감영 이전
당시 상주읍성은 '경상 3대읍성' 규모
임란 이전 경상도 행정·군사의 중심

경상감영 복원해 복룡동에 공원 조성
문과급제 68명 배출한 왕산 정상부엔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선생 기념비


2023042501000771300032142
태평성대 경상감영공원 내엔 조선시대 관찰사가 근무하던 청유당의 모습도 복원돼 있다.

◆경상도의 중추, 상주읍성

상주 시내 한가운데에 왕산(王山)이 있다. 해발 71.3m의 자그마한 봉우리지만 '왕'이라는 호칭을 가진 상주의 진산이다. 왕산은 장원봉(壯元峰)이라고도 불린다. 조선 초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68명의 상주 선비들이 문과에 장원을 비롯해 급제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왕산'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 안의 작은 산'이라는 기록으로 처음 등장한다. '해동지도'에는 성 안 관아 뒤의 작은 산으로 표시되어 있다. '성'은 상주읍성이다. 옛날, 왕산을 가운데 두고 상주읍성이 둘러서 있었다.

상주읍성은 고려 우왕 7년인 1381년에 축성되기 시작해 1385년에 완공됐다고 한다. 축성에 관하여 '1380년 왜구가 침입하여 상주에 7일간 머물며 관아와 민가를 불태웠으므로 다음 해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대규모 정규 군사시설이라기보다는 행정적 기능과 군사 방어적 기능을 함께 가졌던 것으로 여겨진다. 석성이었고 둘레는 1㎞가 넘었다. 성 안에 군창이 있었고 연못이 2개, 샘이 21개인데 겨울과 여름에도 마르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 태종 8년인 1408년에는 경주에 있던 경상감영이 상주로 옮겨져 경상도 감사가 상주목사를 겸하였다. 이는 상주가 경상도의 중추로서 행정, 문화, 군사적 중심이었음을 뜻한다. 세조 3년인 1457년에는 진이 설치되었고 1591년에는 성곽을 증축하고 참호를 설치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파죽지세로 올라온 왜군에게 상주성을 빼앗겼지만 정기룡 장군의 지휘 아래 민관군의 합동 작전으로 이내 수복했다. 상주성 탈환은 백성을 구하고 충청도와 전라도로 진격하는 왜군의 길목을 차단하여 승리에 이바지한 역사적인 전투로 기록되었다.

2023042501000771300032143
조선시대 초병들이 관아의 문루인 태평루를 지키고 있는 모습.

조선 세종 때 편찬된 '경상도지리지'에 경상도의 읍성 29개가 기록되어 있는데 상주읍성은 경주읍성과 진주읍성 다음으로 규모가 컸다. 정조 때 동문 중건, 순조 때 서문 건립, 철종 때 남문 중건 등 상주읍성의 중건과 중수의 기록은 고종 8년인 1871년까지 이어진다. 모든 자료들을 취합해 보면 상주읍성의 둘레는 대략 1.53~1.7㎞ 정도로 추정된다. 동문은 공락문(控洛門), 서문은 읍로문(相露門), 남문은 홍치구루(弘治舊樓), 북문은 현무문(玄武門)이라 하였으며 성 안에는 상산관(商山館), 태평루(太平樓), 사령청(司令廳) 등 22개의 관청과 누 등이 있었다고 한다.

상주읍성은 일제강점기 읍성 훼철령에 따라 철거되었다. 왕산은 왕의 기운이 서려 있다고 하여 앙산(央山)으로 이름이 바뀌고 산 정상부가 깎여나가는 수난을 겪었다. 1929년 '상산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임자년(1912년)에 이르러서 그 성을 부수고, 그 누각을 허물어 이번에는 시가 통로를 만들었다. 호지(壕池)나 성도 아울러 폐허가 되어 덧없이 미나리꽝이나 왕골밭이던 것이 이제는 전부 흙을 돋우어 가옥을 짓고 말았다. 예전의 성이나 연못이 있던 곳을 이제는 기억할 수 없다.'

◆보존한 것, 기억하는 것, 새로운 것

읍성 시대의 것들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객사인 상산관과 동헌의 문루였던 태평루, 관아 정자인 침천정은 상주시 만산동 소재 임란북천전적지 경내에 보존되어 있다. 상산관은 고려 시대에 지어진 건물로 현재 남아 있는 남부 지방 최대 규모의 객사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것을 선조 39년인 1606년 다시 세웠고 1940년 상주여자중학교로 이건 되어 교실로 사용되었다가 최근에 만산동으로 옮겨졌다. 태평루는 조선 순조 8년에 상주 목사 정동교가 세웠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읍성이 헐릴 때 사람들이 뜻을 모아 건물을 사들여 보존했다. 1921년에 상주향교 동산으로 옮겼고 1960년에 향교 구역 안으로 다시 옮겨 남산중학교 교사로 이용했다. 침전정은 선조 10년인 1577년 상주읍성 남문 밖에 세웠던 정자다. 선비들이 휴식하고 글 짓던 곳으로 당시에는 연당이라 했다. 태평루와 마찬가지로 상주읍성이 헐려 나가던 1914년에 지방의 뜻있는 유지 10여 명이 매입하여 현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왕산은 역사공원으로 조성되어 있다. '상주 경상감영 터'라는 안내판이 있고 상주 목사 등을 역임한 인물들의 공덕비가 줄지어 서 있다. 그리고 옛 기록을 더듬어 연못과 풍영루 정자를 복원해 두었다. 풍영루는 조선전기 대표적 사상가인 점필재 김종직의 문집에 등장하는데 고려 후기인 1370년경에 처음 지어 풍영정이라 했고 조선 초기인 1487년 다시 중수하여 풍영루라 했다 한다. 건물은 새것이나 역사는 참으로 오래된 누각이다. 수령 수백 년을 자랑하는 고목을 따라 계단을 오르면 상주 복룡동에서 발굴된 보물 제119호인 석조여래좌상이 있고 일제에 의해 훼손된 정상부에는 1905년 을사늑약 때 '시일야방성대곡'을 쓴 장지연 선생의 기념비가 서 있다.

왕산의 동쪽, 북천과 남천(병성천)이 만나는 삼각의 평야지대가 복룡동이다. 복룡동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의 생활 유구가 전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유적지로 현재 '태평성대 경상감영공원'이 들어서 있다. 옛 경상도의 중심지였던 '상주경상감영'을 재현하여 시민들이 역사와 전통을 체험하고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한 복합 문화공간이다. 조선시대 관찰사가 근무하던 청유당, 관아의 별관으로 가벼운 업무를 보거나 손님을 맞이하던 제금당, 향리가 행정업무를 수행하던 작청, 수령과 그 가족이 생활하던 공간인 내아와 조상의 신주를 모신 사우 등 상주경상감영을 구성하였던 18개 동의 건물이 복원되어 있다. 상주성도(尙州城圖)와 상주읍내전도(尙州邑內城圖)등의 문헌 자료를 토대로 하고, 전국에 남아 있는 다른 관청 건물들을 참고하여 실제와 가깝게 재현했다고 한다. 경상감영공원에서는 관찰사 복식 및 포졸, 아전, 주막 여인 등 다양한 의복 체험과 전통놀이도 즐길 수 있다.

◆읍성의 복원, 역사의 소환을 기대하다

상주읍성에 대한 기록은 상산지, 신증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등 여러 역사서에서 찾을 수 있다. 성을 묘사한 지도도 여럿이다. 그러나 그동안 상주읍성의 내부 모습이나 4대문의 형태에 대해서는 추측만 할 뿐이었다. 상주시는 2015년 서울의 골동품상으로부터 7장의 우편엽서를 입수했다. 엽서의 앞면을 장식하는 사진에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1910년대 상주읍성의 4대 성문과 읍성 내 시가지, 상주재판소, 상주수비대 등의 사진이 실려 있었다. 이후 2016년, 2017년, 2020년에도 연이어 상주읍성 관련 사진들이 쏟아져 나왔다. 사진에는 태평루, 상산관, 진남루, 남문, 작청, 청유당 등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이 몇 장의 사진들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최초의 것들로 어떤 문헌이나 연구, 증언보다도 더 구체적인 자료였다.

2019년에는 해자가 확인됐다. 2021년에는 상주읍성의 북동쪽 성벽 기저부가 발굴되었다. 단편적이나마 사진과 함께 읍성을 옛 모습대로 복원할 수 있는 실체가 확보된 것이다. 상주시는 2024년까지 상주읍성 북문과 동헌, 태평루를 복원할 계획이다. 상주읍성 4대문과 관아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비롯해 두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를 토대로 한다면 역사를 소환하는 가장 올바른 의미의 복원이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진형, 상주읍성, 상주시, 2022.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