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정의 소소한 패션 히스토리] 보라…귀족의 우아함을 발산하다

  • 한희정 계명대 패션디자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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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3-12-15 08:05  |  수정 2023-12-15 08:06  |  발행일 2023-12-15 제1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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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웨스트우드 디자인의 웨딩드레스.

빨강과 파랑이 혼합된 보라색은 파란색의 안정감과 빨간색의 힘이 함께 들어 있다. 보라색은 자연에서는 흔히 발견할 수 없는 색이며, 보라색으로 그려진 세계는 주로 신비로움, 환상과 꿈, 마술과 미지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또한 중간적 이미지로 특정한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모호한 것 그리고 중성적 성별과 환각, 슬픔, 기만을 나타내기도 하며, 이와 전혀 다른 의미로 왕실과 종교적 의미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색이기도 하여 고귀하고 부유함, 지혜와 힘, 영성을 상징하기도 한다.

보라색의 영어 단어를 검색하면 바이올렛(violet)과 퍼플(purple), 두 가지로 나오는데 우리나라의 색 개념에서 퍼플은 자주에 좀 더 가깝고, 바이올렛은 자주보다 좀 더 파란색의 기운이 있는 푸르스름한 색으로 이해할 수 있다. 보라는 인간의 눈으로 식별할 수 있는 가시광선 영역 안에서 파장이 짧은 색상으로, 보라와 인접하고 파장이 더욱 짧은 광선을 자외선(紫外線, ultraviolet, UV)이라 한다. 그러나 퍼플과 바이올렛의 정확한 경계는 사용자에 따라 다소 모호한 부분이 있어 여기서는 영어의 퍼플과 바이올렛을 아우르는 범위로 보라색을 표현하고자 한다.

신비로움·환상·꿈·미지의 세계 연상
비잔틴 시대 1천년 이상 통치자의 色
로얄 퍼플·임페리얼 퍼플 '고귀함'


보라색의 고귀함은 고대 페르시아와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고대 그리스 식민지 비잔티움 부지에 서기 330년에 세워 1천년 이상 동안 지속된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틴 시대 통치자들의 의상 색으로 대표적인 왕족을 포함한 상류층의 색상이었다. 고대 페르시아 왕 키루스(Cyrus)는 왕실 제복으로 보라색 튜닉을 채택했으며, 일부 로마 황제는 시민들이 보라색 옷을 입는 것을 금지하였고 이를 위반 시 사형까지 집행했다고 한다. 또한 비잔틴 제국에서 보라색은 숭배의 색으로 왕족들은 보라색 옷을 입고 보라색 잉크로 칙령에 서명했으며, 그들의 자녀들은 '보라색으로 태어난' 것으로 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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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틴 시대 보라색 의상의 유스티안 황제.

비잔틴 시대의 짙고 붉은 보라색은 티리언 퍼플(Tyrian purple)로 하며 로얄 퍼플, 임페리얼 퍼플이라고도 한다. 이 보라색은 바위 달팽이에서 추출된 점액에서 만든 것으로 1온스의 염료를 얻기 위해 약 25만 마리가 필요하였다. 염색을 위한 수만 마리의 달팽이와 달팽이 껍질을 깨뜨려 생산하는 상당한 노동력이 필요하여 그 염료의 가치가 아주 높았다. 이러한 고귀함의 보라색은 비잔틴 제국 멸망 후 왕족들 사이에서 그 사용이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보라색은 종교적으로도 의미 있는 색이다. 가톨릭 교회 그림에서도 보라색은 사랑과 희생, 그리스도의 수난을 상징하는 색으로 보라색 의상을 입은 예수와 성모 마리아가 자주 묘사된다. 성경에 따르면 예수께서 로마 총독 앞에 끌려가셨을 때 조롱의 표시로 예수에게 (자줏빛의) 보라색 옷을 입혔다고 한다. 종교의 시대인 중세의 보라색은 주교와 대학 교수들이 착용할 수 있었으며, 1200년경에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보라색을 참회의 휘장으로 정의하였다. 이후 자주빛의 보라색은 로마 교황 비오 11세(Pius XI, 재위 1922~1939) 재임 기간 중 법령에 의해 예복으로 확정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 그림에서도 보라색은 음양의 이원성을 초월한 통일, 우주의 궁극적 조화를 상징하는 것을 찾아볼 수 있다.

보라색 의상 입은 성모마리아 묘사
20C후반 아방가르드한 이미지 연출
연말 분위기 내는데 잘 어울리기도


18세기 보라색은 여전히 왕족과 귀족 등 상류층이 입는 색으로 좋은 품질의 보라색 원단은 높은 가격으로 일반인은 접근하기 어려웠다. 19세기 들어 보라색은 합성적인 방법으로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1856년 합성 퀴닌을 만드는 실험에서 최초의 합성 아닐린 염료인 모베인(mauveine)이라 불리는 보라색이 생성되었고 이후 산업 공정이 개발되고 염료를 톤 단위로 생산 가능하게 되었다. 1862년 보라색은 빅토리아 여왕이 연보라색의 실크 드레스를 입은 이후 유럽의 귀족과 상류층에게 매우 유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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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의상을 착용한 미국 팝 가수 프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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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정 (계명대 패션디자인과 교수)

20세기 후반 들어 보라색은 영국의 전통과 펑크 스타일의 대표적 디자이너인 비비안 웨스트우드를 통해 아방가르드한 이미지로 연출되기도 하였으며, 영국의 하드록 밴드로 헤비 메탈의 선구자인 딥퍼플(Deep purple)의 그룹명으로 사용되는 등 이전의 고귀하고 우아함의 상징과 전혀 다른 이미지로 연출되어 왔다. 역사적으로 오랜 상징성을 지닌 보라색은 시대가 변화함에 따라 그 고귀함 이상의 깊고 다양한 이미지를 표출해왔다.

1980년대 미국을 대표하는 팝 음악가 프린스(Prince)는 보라색의 귀족적 스타일의 의상을 자주 착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보라색은 그가 마치 왕자처럼 느끼게 만들어서라고 한다. 고귀함과 몽환, 신비로움과 아방가르드함 등 다채롭고 깊은 이미지의 보라색은 연말 분위기를 나타내는 데도 잘 어울릴 듯하다.

계명대 패션디자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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