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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의 베이지색 패션. 자연스러움과 부유층의 세련미를 동시에 전달했다. <출처: montclair.edu>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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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영국군의 짙은 베이지색 군복. 베이지색은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군복에서 위장색의 역할로 주요하게 사용됐다. <출처: militarysunhelmets> |
베이지색의 우리말은 옅은 황갈색으로 표현된다. 회색-그레이, 검정-블랙, 빨강-레드와 같이 많은 색이 우리말과 영단어가 복합적으로 다수 사용되는 것과 달리 베이지색은 우리말 표현이 많이 사용되지 않는다. 아마 이는 20세기 현대패션을 착용하면서부터 베이지색이 대중적으로 사랑을 받게 됐으며 그 서양복식에서 들여온 역사적 의미 때문일 것이다.
'베이지(beige)'란 단어는 19세기 프랑스에서 자연적으로 염색되지 않은 양모의 색을 의미하는 것으로 사용됐다고 한다. 베이지는 염색되지 않은 양모, 린넨 등 자연에서 얻은 재료의 색상으로 편안하면서 자연적인 이미지로 친숙한 색상이다. 물감으로 베이지를 만들려면 흰색, 갈색, 노랑, 회색 등 몇몇 색을 섬세하게 혼합해야 하며, 약간의 치우침으로도 원하는 베이지색을 얻기 어렵다. 이처럼 베이지는 혼합되는 각 색의 이미지, 즉 중립적, 차분함, 겸손, 실용성, 따뜻함, 생동감 등을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고 각 색의 비율에 따라 다양한 톤과 느낌을 연출할 수 있다.
베이지는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군복에서 위장색의 역할로 주요하게 사용됐다. 우리나라에서는 카키색을 톤이 낮은 녹색빛으로 여기지만 외국에서는 약간 어두운 베이지색이다. 군복의 색을 카키색이라 하는데 우리나라의 군복색은 녹색빛이 강하지만 미군의 군복은 다소 짙은 베이지를 다수 사용하며, 이는 위장해야 하는 환경이 흙이나 숲 중 무엇을 중심으로 하는지에 따른 차이 때문일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 세계를 주무르던 영국의 군복은 밝은 빨간색이었으나 당시 인도 식민지의 전투환경에서 병사들을 위장하고 먼지오염이 덜 보이게 하기 위해 눈에 잘 띄지 않고 실용적인 특성의 짙은 베이지색이 군복의 색상이 되었다. 당시 인도 환경에서 위장을 위해 인도의 흙과 혼합하여 짙은 베이지색, 즉 카키색을 염색했다고 한다. 이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국의 공식 군복색으로 베이지색이 채택됐고 짙은 2차 세계대전 동안에도 군복과 함께 다양한 군복장비에도 사용됐다. 이는 전후 일상생활에서도 널리 사용되는 계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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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희정 계명대 패션디자인과 교수 |
특히 1879년 영국에서 소규모 의류점을 했던 토마스 버버리(Thomas Burberry)는 방수가 되는 개버딘 소재를 발명하게 되어 1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인들을 위해 방수와 방한 기능의 트렌치코트를 제작했다. 이 코트는 기존의 무거운 군복을 대체하게 되었고 전후에도 많은 사람에게 실용성과 우아한 멋으로 사랑받으며 트렌치코트에 사용된 베이지색은 패션의 주요색으로 자리잡게 됐다.
1920~30년대는 고급스럽고 현대적인 아르데코(Art Deco) 스타일이 대두되면서 실크 새틴, 비즈장식 등 화려한 고급소재와 차분한 베이지색의 우아한 드레스와 코트가 많이 등장했다. 특히 1940~5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서 주연 배우들이 트렌치코트를 착용하면서 베이지색 트렌치코트의 세련되고 우아한 이미지는 확대됐고, 영화 카사블랑카의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의 트렌치코트는 그 상징적인 예이다.
베이지색은 흙과 유사한 색으로 현대 패션에서 자연, 사파리, 모험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패션에 사용돼 왔다. 1985년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에서 메릴 스트립은 다양한 베이지색 의상으로 아프리카 사파리 배경과 잘 어울리며 자연스러움과 부유층의 세련미를 동시에 전달했다. 또한 영화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에서 해리슨 포드는 옅고 짙은 베이지색의 재킷, 셔츠, 바지를 자주 입어 모험가의 이미지를 강조했다.
20세기 중반 이후 베이지는 다양한 스타일과 용도로 사용되며 고급스럽고 세련된 이미지로 그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자연스러운 톤으로 다양한 색과 잘 어울리며 단순하면서 중립적이고 안정감과 고급스러운, 그리고 클래식 이미지를 대표하는 패션색이 됐다. 1947년 크리스찬 디올이 2차 세계대전 후 여성미를 강조한 디자인으로 발표한 뉴룩(New look)도 밝은 베이지색의 실크 재킷으로 우아함과 여성스러움을 강조했고, 20세기 초중반 현대적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상징하는 트위드 슈트를 디자인한 샤넬의 슈트에도 베이지색이 다수 사용되어 세련된 디자인으로 사랑받았다.
이렇듯 꾸준한 주요 패션색으로 자리잡은 베이지는 1990년대 미니멀리즘과 에코패션이 유행하면서 다시 주목받았다. 미니멀리즘 패션의 대표격인 캘빈클라인, 실용적 멋의 랄프 로렌, 모던하고 클래식한 스타일의 셀린느, 고급 캐시미어 패션 등 클래식하고 세련된 패션브랜드뿐 아니라 캐주얼 패션의 필수 품목으로 남녀노소 모두에게 애용되는 카키 팬츠(Khaki Pants) 등에서 베이지는 그 문화적, 역사적 배경으로 세련된 편안함을 연출하고 있다. 이는 2000년대에도 이어져 베이지색은 럭셔리 룩, 밀리터리 룩, 사파리 룩, 스트리트 패션 등에서 시대를 초월한 스타일과 안정감으로 중요한 패션색으로 그 역할을 지속하고 있다.
계명대 패션디자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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