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삼척 죽서루·공양왕릉…절벽 위 누각 올라서니 관동팔경 풍광에 시심이 이네

  • 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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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4-08-30  |  수정 2024-08-30 07:49  |  발행일 2024-08-30 제13면
미수 허목·율곡 이이·숙종·정조 등

당대 명사들 한시현판 수두룩 걸려

자연주의 전통건축의 美 살린 누각

오십천 푸른 물 탄성 지르며 '물멍'

고려왕조 마지막 임금 묻힌 공양왕릉

꼭두각시 왕 일대기에 애잔함 맴돌아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삼척 죽서루·공양왕릉…절벽 위 누각 올라서니 관동팔경 풍광에 시심이 이네
지난해 12월28일 국가 지정 문화유산 국보로 승격한 삼척 죽서루 전경.
푸른 물, 아찔한 푸른 절벽, 당대 대가들의 한시(漢詩) 현판이 주렁주렁 달린 누각, 삼척 죽서루. 지난해 12월28일 국가 지정 문화유산 국보로 지정됐다. 그런 탓인지, 죽서루 잔디마당은 곰실곰실한 햇빛이 시와 글씨처럼 깔려 있었다. 걸음마다 역사의 자취를 밟으며 걷는다. 죽서루는 시조새처럼 날렵하고 장중하다. 건물 전면에 눈썹 같은 현판, 죽서루(竹西樓)와 관동제일루(關東第一樓)는 조선 숙종 41년(1715) 삼척 부사 이성조의 글씨다. 명필이다. 이제 왼편으로 돌아선다. 그래야 비로소 누각에 오를 수 있다. 죽서루는 관동팔경의 제1경이자, 주위 자연을 그대로 살려 축조한 전통 건축의 백미(白眉)이다. 정말이지 죽서루는 애면글면 역사와 아름다움으로 우뚝하였다. 이를테면 자연 암반에 그대로 짓는 그랭이 공법을 많이 사용한 건축물이다. 죽서루의 17개 기둥은 길이가 완연히 다르다. 기존 암반을 그대로 살려 기둥을 세웠으므로 암반 높낮이에 따라 길이가 다른 것이다. 이러한 기둥 설치를 '덤벙 기초'라고 한다. 어디 그뿐이랴. 이 일대는 명승 제28호로 지정될 만큼 풍광이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누각에 오르기 전, 나는 어떤 알지 못할 공간의 무게 앞에 오래 서 있었다.

죽서루에 오른다. 일필휘지로 쓴 제일계정(第一溪亭) 현판에 눈길이 머문다. 조선 현종 3년(1662) 삼척부사였던 미수 허목이 68세 때 쓴 글씨다. 마치 글씨로 쓴 수묵화처럼 담박하고 유려하다. 한자 서체 중 전서를 깊이 연구하여 독자적인 '미수체'를 완성했다. 조선 서예의 양대 산맥이 미수 허목과 추사 김정희다. 허목은 조선왕조실록에 빈번히 등장하는 인물로 예송논쟁에서 송시열과 대립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볼수록 글씨에 몰입된다. 무뚝뚝하고 꾸밈이 없지만, 글씨는 빛과 시간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엄청난 흡수력을 가지고 있다. 비록 먹물이지만 거기에는 우주의 근원인 어둠과 그 어둠에서 탄생한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나는 취한 듯, 글씨 속으로 녹아들었다. 나는 나 자신을 현재 삼키고 있는지 모른다. 허목은 눈썹이 길어 눈을 덮으므로 별호를 미수(眉)로 정했다 한다. 또 그는 '죽서루기'를 남겼는데, 그 문장이 뛰어나 그 일부를 적어 본다. "누각 밑에 와서는 겹겹이 쌓인 바위 벼랑이 천 길이나 되고 흰 여울이 그 밑을 감돌아 소를 이루었는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 녘이면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이 바위 벼랑에 부딪쳐 부서진다." 풍경이 눈에 잡힐 것 같은 표현이다.

조금 안으로 들어가니, 해선유희지소(海仙遊之所) 현판이 있다. 조선조 헌종 3년(1837) 삼척 부사 이규헌의 글씨다. 역시 명필이다. 이외에도 현판이 수두룩하다. 허목이 쓴 '죽서루기'와 홍백련이 지은 '죽서루 중수기'를 비롯하여 율곡 이이의 '죽서루 차운', 조선 숙종과 정조가 직접 지은 시판 등 이곳을 다녀가거나 죽서루 그림 속으로 유람한 유명 인사들이 남긴 명문이 차고 넘친다. 말하자면 26개의 현판이 죽서루에 걸려 있다. 가히 주렁주렁하다는 말이 빗나간 말이 아니다. 천장은 우물과 연등 모양이고, 마루도 예사롭지 않다. 죽서루를 지은 대목장은 누구였을까. 그의 시대를 넘어서는 이 건축은 친자연과 한국적인 문예와 미(美)를 담고 있다. 그 어디에 고루하고 해묵은 말랭이 흔적이 남아 있는가. 죽서루는 시공을 넘어 그때 그 시대마다 우리에게 큰 영감을 주고 넋을 잃고 바라보게 하는 건축미의 상징으로 그득했다.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삼척 죽서루·공양왕릉…절벽 위 누각 올라서니 관동팔경 풍광에 시심이 이네
죽서루 경내의 용문바위. 신라 문무왕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바위를 뚫고 지나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김찬일의 방방곡곡/길을 걷다] 삼척 죽서루·공양왕릉…절벽 위 누각 올라서니 관동팔경 풍광에 시심이 이네
죽서루 경내 송강 정철 가사의 터. 오른쪽은 정부가 1991년 2월을 가사 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 송강 정철의 달로 지정하고 세운 기념 표석이다.
돌아 나오면서 다시 죽서루를 쳐다본다. 그 미감은 변화의 눈맛으로 얼얼하기까지 하다. 안과 바깥, 위와 아래의 풍경이 다르고, 게다가 거기에는 보는 이의 감성과 시심을 이글거리게 하는 살가운 분위기가 잠복하고 있다. 누각에서 내려와 주위 기암으로 형성된 풍경을 살핀다. 암반에 있는 암각화를 찾아본다. 암각화는 바위나 절벽 또는 동굴 내 벽면에 기호 성혈 물상을 새기거나 그린 것을 말하는데, 죽서루 선사 암각화는 바위 위에 여성의 성기를 새긴 성혈이다. 성혈은 선사 시대 다산과 풍요를 바라는 것으로, 우리나라 원시 신앙의 한 맥을 이루고 있다. 성혈은 신의 숫자인 10개로 조성돼 있다. 그리고 용문바위로 간다. 울룩불룩한 바위 사이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구멍이 뚫려 있다. 용문바위다. 용문바위에는 신라 문무왕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바위를 뚫고 지나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이제 오십천 강가 조망대로 나간다. 뷰 포인트다. 서쪽 태백산과 두타산 등 수많은 고산이 높고 아득하다. 거기 어느 산맥에서 발원한 물이 동쪽 바다로 흘러오면서 감입곡류, 즉 오십 굽이 여울을 이루어 오십천이라 부른다. 그윽하고 어둑한 골짜기를 감돌아 흘러와 죽서루의 푸른 층암절벽 아래에 또 푸르고 깊은 소(沼, 물이 깊게 모인 곳)를 만드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크게 여울을 이루고 감돌아 흐른다. 얼마나 비경인지, 눈은 물멍으로 몽롱해지고 감탄사가 높은음 건반을 친다. 고려부터 조선 시대까지 이곳 경치를 그림으로, 시문 가사로 읊조린 시인 묵객들의 숱한 걸작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어 근자에 복원된 삼척 도호부 객사 진주관과 '송강 정철 가사의 터' 표석을 관람한다. 정부는 1991년 2월을, 우리나라 가사 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 송강 정철의 달로 지정하고 기념 표석을 두 군데 세웠다. 성산별곡 무대인 담양 식영정 부근과 관동별곡에 나오는 관동팔경 중에서도 으뜸인 죽서루 경내이다. 오늘 생판 몰랐던 죽서루의 현장 느낌은, 몸 어딘가에 숨어 있던 감성과 역사와 인문의 깃털들이 한꺼번에 새가 되어 날아오르는 환상 비행이었다. 이제 죽서루를 뒤로하고, 인근에 있는 공양왕릉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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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비운의 왕'의 무덤인 공양왕릉. 공양왕 요는 2년8개월 만에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원주로 유배됐다.
삼척 근덕 궁촌리에 있는 공양왕릉은 단정했지만 어쩐지 애처롭고 쓸쓸했다. 공양왕은 고려 34대 마지막 임금이었다. 이성계 일파에 의해 창왕이 쫓겨나고, 1389년 11월 역시 이성계 일파의 추대로 왕이 됐다. 그때 그의 나이 45세였다. 그 당시 어림으로 봐서 공양왕은 꼭두각시 왕이었다. 공양왕은 즉위 다음 날부터 이성계 일파의 반대 세력을 색출하는데 생머리를 앓아야 했다. 위화도 회군의 한 축이었던 조민수 장군과 이색 부자를 조정에서 내쳐야 한다는 상소에 '알아서들 하시오'로 왕명을 내렸다. 공양왕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이를테면 이성계 일파의 의견에 따라 왕명을 내리는 대역을 할 뿐이었다. 이어서 이성계 일파인 윤회종이 우왕과 창왕을 죽이라는 끔찍하고 어이없는 상소를 올렸다. 공양왕은 어안이 벙벙하고 기가 막혔다. 우왕과 창왕을 죽이는 것은 공양왕 자신을 죽이는 일과 마찬가지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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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었다. 즉위 처음부터 그나마 왕실을 지키던 조민수와 이색 부자를 내치고, 우왕 창왕을 죽여야 하는 명색이 허울뿐인 공양왕이었다. 그 후 이성계 일파는 만고의 충신 정몽주까지 살해하고 이제는 거리낌 없이 반대파 수십 명을 귀양 보내고 왕씨 종실들을 몰아내 버렸다. 그리고 이성계를 등극시키기 위해 갖은 위협과 모략을 꾸며 기어코 왕위를 찬탈했다. 공양왕 요는 2년8개월 만에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원주로 유배됐다. 그러나 공양왕 복위를 시도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지자 강원도 고성으로 옮겨지고, 그래도 불안을 느낀 집권 세력들이 태조 3년, 즉 1394년 3월14일 삼척 궁촌리로 이주시킨 후 서둘러 공양왕과 왕비, 두 왕자를 궁촌 마을 입구 고갯길이 있는 고돌산 살해재에서 함께 교살했다. 참으로 기구한 비운의 왕이었다. 개국한 조선왕조의 통치 이념이 충효이었다니 역사는 얼마나 아이러니하였나.

글=김찬일〈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강경애 여행 사진작가


☞문의 : 삼척시 죽서루 관리사무소 (033)570-3670

☞주소 :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 길 37

☞트레킹 코스 : 죽서루-공양왕릉

☞인근 볼거리 : 장미공원, 척주 동해비, 삼척 활기 자연휴양림, 준경묘, 환선굴, 미로정원, 천은사, 이끼폭포, 미인폭포, 초곡용굴 촛대바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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