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8일 국가 지정 문화유산 국보로 승격한 삼척 죽서루 전경. |
죽서루에 오른다. 일필휘지로 쓴 제일계정(第一溪亭) 현판에 눈길이 머문다. 조선 현종 3년(1662) 삼척부사였던 미수 허목이 68세 때 쓴 글씨다. 마치 글씨로 쓴 수묵화처럼 담박하고 유려하다. 한자 서체 중 전서를 깊이 연구하여 독자적인 '미수체'를 완성했다. 조선 서예의 양대 산맥이 미수 허목과 추사 김정희다. 허목은 조선왕조실록에 빈번히 등장하는 인물로 예송논쟁에서 송시열과 대립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볼수록 글씨에 몰입된다. 무뚝뚝하고 꾸밈이 없지만, 글씨는 빛과 시간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엄청난 흡수력을 가지고 있다. 비록 먹물이지만 거기에는 우주의 근원인 어둠과 그 어둠에서 탄생한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것 같다. 나는 취한 듯, 글씨 속으로 녹아들었다. 나는 나 자신을 현재 삼키고 있는지 모른다. 허목은 눈썹이 길어 눈을 덮으므로 별호를 미수(眉)로 정했다 한다. 또 그는 '죽서루기'를 남겼는데, 그 문장이 뛰어나 그 일부를 적어 본다. "누각 밑에 와서는 겹겹이 쌓인 바위 벼랑이 천 길이나 되고 흰 여울이 그 밑을 감돌아 소를 이루었는데, 해가 서쪽으로 기울 녘이면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이 바위 벼랑에 부딪쳐 부서진다." 풍경이 눈에 잡힐 것 같은 표현이다.
조금 안으로 들어가니, 해선유희지소(海仙遊之所) 현판이 있다. 조선조 헌종 3년(1837) 삼척 부사 이규헌의 글씨다. 역시 명필이다. 이외에도 현판이 수두룩하다. 허목이 쓴 '죽서루기'와 홍백련이 지은 '죽서루 중수기'를 비롯하여 율곡 이이의 '죽서루 차운', 조선 숙종과 정조가 직접 지은 시판 등 이곳을 다녀가거나 죽서루 그림 속으로 유람한 유명 인사들이 남긴 명문이 차고 넘친다. 말하자면 26개의 현판이 죽서루에 걸려 있다. 가히 주렁주렁하다는 말이 빗나간 말이 아니다. 천장은 우물과 연등 모양이고, 마루도 예사롭지 않다. 죽서루를 지은 대목장은 누구였을까. 그의 시대를 넘어서는 이 건축은 친자연과 한국적인 문예와 미(美)를 담고 있다. 그 어디에 고루하고 해묵은 말랭이 흔적이 남아 있는가. 죽서루는 시공을 넘어 그때 그 시대마다 우리에게 큰 영감을 주고 넋을 잃고 바라보게 하는 건축미의 상징으로 그득했다.
죽서루 경내의 용문바위. 신라 문무왕이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기 위해 이 바위를 뚫고 지나갔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
죽서루 경내 송강 정철 가사의 터. 오른쪽은 정부가 1991년 2월을 가사 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 송강 정철의 달로 지정하고 세운 기념 표석이다. |
이제 오십천 강가 조망대로 나간다. 뷰 포인트다. 서쪽 태백산과 두타산 등 수많은 고산이 높고 아득하다. 거기 어느 산맥에서 발원한 물이 동쪽 바다로 흘러오면서 감입곡류, 즉 오십 굽이 여울을 이루어 오십천이라 부른다. 그윽하고 어둑한 골짜기를 감돌아 흘러와 죽서루의 푸른 층암절벽 아래에 또 푸르고 깊은 소(沼, 물이 깊게 모인 곳)를 만드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크게 여울을 이루고 감돌아 흐른다. 얼마나 비경인지, 눈은 물멍으로 몽롱해지고 감탄사가 높은음 건반을 친다. 고려부터 조선 시대까지 이곳 경치를 그림으로, 시문 가사로 읊조린 시인 묵객들의 숱한 걸작이 어떻게 탄생했는지 짐작이 간다. 이어 근자에 복원된 삼척 도호부 객사 진주관과 '송강 정철 가사의 터' 표석을 관람한다. 정부는 1991년 2월을, 우리나라 가사 문학에 큰 업적을 남긴 송강 정철의 달로 지정하고 기념 표석을 두 군데 세웠다. 성산별곡 무대인 담양 식영정 부근과 관동별곡에 나오는 관동팔경 중에서도 으뜸인 죽서루 경내이다. 오늘 생판 몰랐던 죽서루의 현장 느낌은, 몸 어딘가에 숨어 있던 감성과 역사와 인문의 깃털들이 한꺼번에 새가 되어 날아오르는 환상 비행이었다. 이제 죽서루를 뒤로하고, 인근에 있는 공양왕릉으로 간다.
'고려 비운의 왕'의 무덤인 공양왕릉. 공양왕 요는 2년8개월 만에 공양군으로 강등되어 원주로 유배됐다. |
김찬일 (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
글=김찬일〈시인·방방곡곡 트레킹 회장〉 kc12taegu@hanmail.net
사진=강경애 여행 사진작가
☞문의 : 삼척시 죽서루 관리사무소 (033)570-3670
☞주소 : 강원도 삼척시 죽서루 길 37
☞트레킹 코스 : 죽서루-공양왕릉
☞인근 볼거리 : 장미공원, 척주 동해비, 삼척 활기 자연휴양림, 준경묘, 환선굴, 미로정원, 천은사, 이끼폭포, 미인폭포, 초곡용굴 촛대바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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