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사회의 이해] 익명성의 순기능과 역기능

  • 입력 2005-03-10  |  수정 2005-03-10 09:43  |  발행일 2005-03-10 제15면
사이버 공간에도 규범있다, 익명성은 상호존중이 전제
[현대사회의 이해] 익명성의 순기능과 역기능

▶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

현대 사회는 '정보 사회(information society)'이다. 정보 기술의 발달과 정보화는 우리의 일상적 삶을 혁명적으로 변화시켰다. 오늘날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e메일을 주고받고 인터넷 서핑을 한다. 또한 사이버 시장을 통해 물건을 사고팔고 사이버 은행에서 금융 거래를 한다. 예전에는 발로 돌아다니고 만나고 줄서고 시간을 보내며 처리해야 했던 일들을 이제 사이버 공간에서 편리하게 해결하고 있는 것이다. 정보 기술의 발달이 가져다 준 커뮤니케이션 혁명은 시·공간의 압축을 실감하게 해 준다. 정보화는 현대 사회의 삶의 모든 영역을 바꾸어 놓았으며, 풍요롭고 편리하고 즐거운 삶을 가져다 주고 있다. 그렇지만 곰곰이 따져 보면 사이버 공간은 위험 투성이다. 사이버 민주주의는 정보의 왜곡과 조작으로 인해 위협받고 있으며, 사이버 시장과 사이버 커뮤니케이션은 부도덕한 상업주의와 사이버 범죄들로부터 위협받고 있다. 즉 문화적 다양성과 정보의 풍요,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과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는 사이버 공간이 새로운 위험 공간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이버 공간의 위험은 기본적으로 '익명적 신뢰'에 의존하는 사이버 공간의 특성 때문이다.

전통 사회와 같은 '대면적 공동체(face-to-face community)'는 사회 구성원들 모두가 서로의 정체를 숙지하고 있는 거의 투명한 사회였다. 이런 사회에서는 상호 간에 숨겨진 부분이 없으므로 사생활권이 문제될 여지가 없었으며, 공적인 삶과 사적인 삶 간의 구분이 불분명했다. 그런데 근대 시민 사회는 낯선 개인들이 각자의 이해 관계를 중심으로 이합집산하는 익명적 공간이다. 시민 사회에서의 인간 관계는 전통 사회의 구체성과 정서적 유대를 상실한 부분적 자아 간의 관계이다. 여기서 자아는 분열하여 공적인 공간에서 대면하는 공적 자아와 사적인 공간에 숨어 있는 사적 자아로 이원화된다. 시민 사회의 익명성은 공적 공간에서는 일정한 정체성을 노출하지만 사적인 공간에서는 익명성이 보장되므로 전체적으로 볼 때 반(半)익명성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정보 통신 사회의 기반인 사이버 공간은 이러한 근대 시민 사회의 익명성의 문제가 더욱 심화되어 새로운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근대 시민 사회적 공간이 보장하는 익명성은 부분적인 익명성이었다. 비록 사적 자아가 숨겨진다 해도 그 정체는 공적 확인 절차를 통해 궁극적으로 확인될 수 있거나 추적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보 통신 사회가 제공하는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은 컴퓨터 매개 통신을 통한 더 용이하고 저렴하면서도 철저하게 보장될 수 있는 익명성이 되었다. 이로 인해 익명성의 야누스(Janus)적 얼굴은 사이버 공간에서 더욱 강화되고 증폭되어 나타난다. 이제 익명성은 무한히 해방적인 측면을 갖는 동시에 무한히 비도덕적인 측면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 사람들은 복합적이고 다양한 자아를 표출하여 다양한 문제 해결책과 의견 개진을 통해 새로운 존재 방식을 추구하게 되지만, 그 반면에 맹목적인 카타르시스(catharsis)를 추구하거나 불건전하고 병리적인 감정과 심성이 쉽게 표현될 수 있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사이버 공간에서는 타자를 고려하는 성향보다는 자기 고려적 혹은 자기 도취적 성향만이 난무할 가능성이 높아지므로 도덕성이 실종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이버 공간에서는 인간 관계의 기본인 상호 존중의 원칙이 무시되기 십상이다.



▶ 익명성의 순기능과 역기능

사이버 공간에서의 익명성의 긍정적인 기능(순기능)과 부정적인 기능(역기능)을 나열해 보자. 통상적으로 익명적 통신의 순기능으로는 범죄, 부정 등에 관한 매스컴의 독자적 조사에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익명의 취재원 보호, 내부 고발자 보호, 법 집행을 위한 정보 제공자 혹은 증인 보호, 알코올 중독자와 에이즈 감염자 등 신원이 밝혀지면 사회적으로 낙인찍히는 곤란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의 자존심 앙양(昻揚)과 치료 가능성, 개인적 사생활의 보호와 언론과 사상의 자유, 비민주적 정부 비판에 따른 정치적 박해의 회피 등이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역기능으로는 스팸 메일, 해커와 크래커, 중상모략과 명예 훼손, 증오성 메일, 아이디 사취와 도용, 온라인 금융 및 전자 상거래 사기, 개인 정보 누설, 정보에 대한 신뢰성 감소, 법 집행의 곤란성, 돈 세탁, 마약 거래, 범죄 단체의 조직과 연락, 지적 재산권의 침해 등 사이버 범죄가 언급되고 있다.

오늘날 익명성에 대한 찬반 양론이 분분한 가운데 사이버 공간에서의 익명성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한 구체적인 논쟁점은 익명성과 도덕적 책임, 법적 규제 대 인터넷의 본질, 안전과 프라이버시, 익명적 통신과 암호 그리고 정부 권한의 한계, 전자 상거래와 익명적 전자 화폐의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걸쳐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익명성에 대한 일면적인 혹은 일방적인 해결책에 대해서 경계하고 절충적인 해결책을 마련해야 한다.

1997년 11월에 열린 미국과학발전협회 주관 심포지엄 '학술의 자유, 책임, 그리고 법'에서 제시한 정책 권고안은 이러한 해결책의 실마리를 잡는 데 도움이 된다. 이 정책 권고안은 대략 4가지 기본 원칙을 제안한다.

첫째, 온라인상의 익명적 통신은 그 자체로 선도 악도 아닌 도덕적으로 중립적인 것이다. 익명성이 초래하는 '탈금제(脫禁制)' 효과에는 양성적 탈금제와 악성적 탈금제가 공존하고 있다. 따라서 익명성은 그것이 사용되는 상황에 따라 그 도덕적 의미가 결정되므로, 익명성의 해악에만 관심을 집중하여 규제 일변도로 나아가는 경우 익명성의 순기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인터넷 발전 그 자체까지 심각하게 저해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익명적 통신은 기본적 인권의 하나로 간주되어야 한다. 익명성과 그에 따른 프라이버시권, 표현과 양심의 자유는 유엔 인권 선언이나 각국의 헌법에서 도출될 수 있는 기본적 권리로 간주되어야 하며, 온라인에 대해서만 특별히 제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셋째, 익명성의 정도와 그 허용 여부에 대한 판단은 국가가 아니라 해당 사이버 공동체가 자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넷째, 각 개인은 그들의 신원과 정체성이 온라인상에서 공개되는 정도와 범위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획득할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여기서 제시된 원칙들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원칙들은 익명성에 대해 대립된 입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생각해 봐야 할 문제들을 던져준다. 무엇보다 첫째 원칙에서 밝히는 것처럼 익명성은 그 자체로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익명성의 명암은 전적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의식 수준과 실천을 통해 결정된다. 따라서 사이버 공간에서 발생하는 모든 해악들에 대한 도덕적·법적 책임을 익명성에 전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마치 살인자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도덕적·법적 책임을 자신이 들고 있던 흉기에도 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또한 둘째 원칙에서 말하는 것처럼 익명적 통신은 하나의 '권리'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익명성은 현실 세계에서나 사이버 세계에서나 악용될 소지가 있다. 그러나 익명성은 양쪽 세계에서 모두 개인의 기본적 권리들을 보장하는 필수적인 방편이다. 다만, 확립된 규범 체계의 부재로 오늘날의 사이버 세계에서는 익명성의 부정적인 측면만이 부각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한 규범 체계의 구축이 불가능하다고 단정하고 사이버 세계의 익명성을 완전히 제거하려는 것은 심각한 인권 침해의 문제를 야기할 수 있으며, 지금까지 사이버 세계의 익명성이 가져온 긍정적인 효과들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

셋째 원칙은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시급하고 현실적인 문제를 제시한다. 사이버 세계의 규범체계는 누구의 주도로 구축되어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사이버 공동체들은 현실 세계의 공동체에 못지않은, 오히려 더 복잡하고 다양한 목적들과 이해 관계를 수렴하고 있다. 만약 정부가 규범 체계의 구축을 주도한다면 질서와 안전을 최우선의 목적으로 삼아 규제 일변도로 나아가기 십상이고, 이는 사이버 공동체들의 활동을 경직시킬 가능성이 높다. 반면 사이버 공동체의 자율에만 맡겨둔다면, 그 규범 체계의 구속력이 미약하여 익명성을 악용한 무질서와 무절제 그리고 각종 사이버 범죄들에 효율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다. 따라서 바람직한 규범 체계는 반드시 정부와 사이버 공동체의 원활한 의견 교환과 입장 조율을 통해서 구축되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현재 정부는 '정보통신윤리위원회'를 위촉하여 각계 각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창구로 활용하고 있다.



▶ 올바른 인터넷 문화의 정착

올바른 인터넷 문화의 정착은 사이버 공간의 본질과 특성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교육을 필요로 한다. 사이버 공간은 본질적으로 무규범적인 공간이 아니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익명성이 하나의 권리라는 말은 '안 보이니까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권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상호존중'의 대원칙은 익명적 신뢰에 바탕을 둔 사이버 공간에서 더욱 강조되어야 할 원칙이다. 즉 사이버 공간은 상대가 보이지 않는 만큼 더 조심하고 상처를 주지 않으려는 세심한 배려가 요구되는 공간인 것이다. 사이버 공간의 이러한 본질을 인식하면서, 익명성의 야누스적 측면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사이버 공간에서의 익명성은 그것이 가져다 준 해방감과 편리함만큼의, 혹은 그 이상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각 개인은 자신의 신상 정보를 현실 세계에서보다 더 소중하게 다루어야 하며, 관련 법제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을 습득할 필요가 있다. 또한 사이버 공간에서 타인의 신상 정보를 함부로 누출하거나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가 심각한 범죄임을 자각해야 한다. 실제로 우리의 실정법상 사이버 공간에서의 명예 훼손은 현실 공간에서의 명예 훼손보다 훨씬 엄중하게 처벌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사이버 공간은 다양한 딜레마적 상황을 발생시키고 있다. 표현의 자유와 검열(규제)간의 딜레마,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과 사생활 침해의 딜레마, 정보 공유와 지적 재산권 침해의 딜레마, 익명성의 자유로움과 범죄의 익명성의 딜레마가 바로 그러한 것들이다. 사이버 공간을 지나치게 규제할 경우 사이버 공간이 가지는 잠재력은 심각하게 훼손될 것이며, 과도한 자유를 부여할 경우 사이버 공간은 범죄의 온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딜레마들 때문에 사이버 공간의 미래를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바라볼 필요는 없다. 사실 이와 유사한 딜레마들은 우리가 현실 공간에서도 경험하는 것이며, 우리는 여전히 그것들의 더 나은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은 지금과 같은 혹은 그 이상의 노력이 사이버 공간의 익명성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들의 해결책을 찾는 데도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생각하기

사이버 공간에서의 익명성에 관한 논란은 정보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해결해야 할 심각한 문제이다. 익명성과 관련하여 바람직한 인터넷 문화 정착 방안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말해보시오.


자료제공=송원학원 진학지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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