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가 있는 옛 懸板을 찾아서 .4] 완주 화암사 ‘극락전’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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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12-26   |  발행일 2012-12-26 제20면   |  수정 2012-12-27
소박함과 미려함의 조화…숨은 절이 더욱 귀히 여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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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 ‘극락전(極樂殿)’ 현판. 한 글자씩 따로 만들어 걸었는데, 하앙식 건물인 점 등이 이런 현판을 달게 된 이유로 분석된다.


‘인간세 바깥에 있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나를 미워하는지 턱 돌아앉아/ 곁눈질 한번 보내오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화암사를 찾아가기로 하였습니다/ 세상한테 쫓기어 산속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길로 가고 싶었습니다/ 계곡이 나오면 외나무다리가 되고/ 벼랑이 막아서면 허리를 낮추었습니다// 마을의 흙먼지를 잊어먹을 때까지 걸으니까/ 산은 슬쩍, 풍경의 한 귀퉁이를 보여주었습니다/ 구름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구름 속에 주춧돌을 놓은/ 잘 늙은 절 한 채// …// 화암사, 내 사랑/ 찾아가는 길을 굳이 알려주지는 않으렵니다.’

시인 안도현의 시 ‘화암사, 내 사랑’에 나오는 구절이다. ‘숨어있는 절’ ‘잘 늙은 절’인 불명산 화암사(전북 완주군 경천면 가천리)는 안도현 시인의 시심(詩心)을 건드려 모르던 이들도 찾아보고 싶은 절이 된 듯하지만, 아직은 그래도 ‘숨어있는 절’이라 할 만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잘 늙은 화암사 모습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별한 현판이 있음을 알고 찾아갔다. 주차한 뒤, 걸어서 가야 하는 길의 초입 분위기부터 ‘잘 늙은 절’이리라는 기대를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초입에 세워놓은 ‘화암사’ 팻말이 특히 그랬다. 한글 ‘화암사’를 새긴 나무 팻말인데, 정이 가는 글씨인 데다 세월의 흔적까지 더해진 고풍스러움이 각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낙엽 쌓인 계곡 따라 난 오솔길과 길이 아닌 듯한 암반 길을 거쳐 막바지에 최근 설치한 철제 계단을 다 오르고 나면 절의 한 귀퉁이가 보인다. 15분쯤 걸리는 길이다.

이 화암사를 둘러보니 ‘잘 늙은 절’이 될 수 있는 이유로 그 현판들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깊은 계곡 속 큰 바위 위의 작은 절인 화암사는 따로 일주문도 없고 천왕문도 없다. 누각이 입구다. 누각(우화루)에 걸린 ‘불명산화암사(佛明山花巖寺)’부터 ‘적묵당(寂默堂)’과 ‘우화루(雨花樓)’, 그리고 ‘극락전(極樂殿)’ 현판. 모두가 잘 늙었다. 아마도 400년 전 해당 건물을 준공하면서 걸었던 현판일 것 같다는 생각인 드는 ‘잘 늙은 현판들’이었다.


◆한 글자씩 따로 만든 ‘극락전(極樂殿)’ 현판

궁궐이나 사찰, 서원 등 옛 건물의 편액은 명칭을 가로로 쓴 형태가 일반적이다. 간혹 화재를 예방한다는 주술적 이유로 세로로 건물 이름을 써 만든 경우도 있다. 그러나 모두 하나의 편액에 건물 명칭을 모두 담고 있다.

이와 달리 화암사 극락전 편액은 한 자씩 따로 편액을 만들었다. 하나의 나무판에 한 글자씩 쓴 것이다. 옛 편액 중에는 유일한 것이 아닐까 싶다. 극락전 건물 자체도 보물로 지정돼 있다가 2011년 11월에 국보 제316호로 승격된 소중한 문화재다.

극락전 편액도 그 고색창연함으로 볼 때 현재의 극락전 건물을 준공했을 때 건 그 편액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는데, 찬찬히 살펴볼수록 흥미로운 현판이다. 당시 현판을 만든 스님이나 목수의 자유로운 생각과 열린 마음, 아름다움과 멋을 제대로 아는 마음 씀씀이를 떠올리게 한다.

글씨는 잘 보일 수 있도록 굵은 획으로 최대한 크고 힘 있는 해서로 썼다. 그리고 한 자씩 따로 판자를 사용해 글씨를 새겨 만들었는데, 글씨를 가장 크게 담을 수 있도록 테두리도 없이 편액을 만들었다. 편액에 여백이 거의 없을 정도로 글씨가 꽉 찬 상태다. 누구의 글씨인지 알려져 있지 않으나 전형적인 편액 글씨다.

편액 나무판을 보면 같은 나무판(‘적묵당’까지)을 잘라 사용한 것 같다. ‘극’자와 ‘락’자 편액을 세로결로 걸었는데 세로가 약간 길고, ‘전’자 편액은 이와 달리 가로결로 걸었다. 이는 ‘전’자의 경우 가로 크기가 다른 두 자보다 길어 그 글씨를 다 담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두 글자 현판은 처마 부재 사이에 꽉 끼도록 채워 걸었고, ‘전’자는 가로 크기가 달라 그 공간에 끼우지 못하고 약간 걸쳐 못을 박아 고정해놓고 있다.

글씨는 훌륭한 편액체인데 그것을 새긴 편액 나무는 가장 소박하다. 그런 데다 나무판을 똑같이 세 등분한 뒤 글자의 형태에 맞춰 두 개는 세로로 새기고 하나는 가로로 새긴 점이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글씨를 쓴 이도 아마 좁은 공간에 맞는 크기로 최대한 잘 썼는데, 세 글자 모두 같은 규격으로는 쓰지 못했던 것 같다. 그래도 그것을 굳이 다시 쓰게 하지 않고, 하나는 글씨를 다 담기 위해 편액 나무판의 방향을 달리해 새기고 다른 두 개와 달리 엉성하게 보이더라도 그냥 걸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가지로 멋과 여유가 느껴지는 일품의 편액으로 다가왔다.



◆현판을 따로 만든 이유는

극락전 편액은 세 글자를 한 판재 속에 새기지 않고, 한 판재에 한 자씩 새겨 세 개로 나눠 따로 걸었는데, 왜 일반적인 경우를 벗어나 이렇게 만들었을까.

현재 극락전은 1981년 수리할 때 발견된 묵서명(墨書銘)에 따르면, 1605년(선조 38)에 세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 극락전은 특히 우리나라에 하나밖에 없는 하앙식(下昻式) 건물로 주목을 받고 있다. 하앙식은 건물 바깥쪽에 처마 무게를 받치는 부재를 하나 더 설치, 지렛대 원리를 통해 일반 구조보다 처마를 훨씬 길게 내밀 수 있게 한 구조다. 기둥과 지붕 사이에 끼운 긴 목재인 하앙은 처마와 나란히 경사지게 놓아 처마와 지붕의 무게를 균등하게 받쳐 기둥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극락전 건물이 하앙식 구조인 점이 편액을 한 글자씩 따로 만든 이유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편액 위를 보면, 끝부분을 여의주를 쥔 용의 발모양과 용의 머리를 조각한 하앙 부재 사이를 널판으로 마무리한 뒤 그 위에 그려놓은 불화를 볼 수 있다. 아주 아름답고 격조 높은 주악상이 펼쳐져 있다. 이 불화를 살리기 위해 편액을 한 자씩 만들어 달았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와 함께 건물이 하앙식이기 때문에 그렇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는 설명도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앙 부재 등을 그대로 두고는 세 글자를 다 넣은 편액은 걸 공간이 적합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한 글자씩 따로 만듦으로써 화려한 공포 장식이나 하앙의 용 장식, 아름다운 단청 등을 최대한 가리지 않도록 했을 것으로 보인다.

소박하면서도 갖출 것은 다 갖춰 극락세계의 이미지를 멋지게 표현한 단청과 벽화, 공포 장식 등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드러내고자 고민한 결과물이 이 편액의 형태가 아닐까 싶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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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암사 우화루에 걸린 ‘우화루(雨花樓)’(위)와 ‘불명산화암사(佛明山花巖寺)’ 현판. 누가 썼는지 모르나 전형적 편액체로, 동일 인물이 쓴 것 같다.


■ 화암사 우화루의 ‘우화루’‘불명산화암사’ 현판

“세월의 흔적 미루어 극락전 현판과 같은 시기·인물이 제작”

화암사는 신라 때 창건된 사찰로, 원효와 의상이 수도한 곳이고, 설총도 여기서 공부했다고 한다. 이 사찰 창건과 관련한 설화가 전한다.

옛날 어느 임금의 딸 연화공주가 원인 모를 병에 걸렸는데, 어느 날 임금님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조그마한 꽃잎 하나를 던져주고 사라졌다. 잠을 깬 임금은 사방을 수소문해서 그 꽃을 찾게 했다. 불명산 깊은 계곡 속 큰 바위에 핀 복수초였다. 임금은 신하들을 보내 그 꽃을 가져오게 했다. 그런데 그곳에 가보니 연못 속에서 용 한 마리가 나타나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다른 신하들은 모두 도망가고, 용감한 신하 한 명이 그 꽃을 꺾어 돌아왔다. 공주는 꽃을 먹고 깨끗하게 병이 나았다. 임금은 부처님의 은덕이라 생각하고 그곳에 절을 짓고 화암사라 불렀다.

화암사의 대표적 문화재로 극락전과 더불어 우화루가 있다. 우화루는 보물(제662호)로 지정돼 있다.

사찰 대문 역할을 하기도 하는 우화루는 사찰 입구에서 보면 돌로 쌓은 축대 앞에 기둥을 나란히 세우고 그 위에 마루를 놓아 2층 누각처럼 보인다. 반면 누각 뒤에 있는 극락전에서 보면 누각 마룻바닥이 극락전 앞마당과 같은 높이로 되어 있어 단층 건물로 보인다. 극락전 쪽은 트여 있지만, 맞은편은 널판지로 막고 창문을 내었다. 양옆은 흙벽으로 쌓았는데, 매우 낡았지만 멋지고 고색창연한 벽화가 눈길을 끈다.

이 건물의 사찰입구 쪽 처마에는 ‘불명산화암사(佛明山花巖寺)’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극락전 쪽에는 ‘우화루(雨花樓)’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두 현판 모두 전형적인, 우수한 편액 글씨를 보여준다.

두 편액을 찬찬히 살펴보면 글씨의 획이나 분위기 등으로 보아 극락전 글씨를 쓴 인물이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현판의 재질이나 그 세월의 흔적 등으로 봐서도 극락전 현판과 같은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극락전 서쪽에 있는 건물에 걸린 ‘적묵당’ 현판도 마찬가지다. 적묵당 현판의 경우 현판 보호를 위해 그랬는지 모르지만, 테두리를 새로 만들었는데 크기나 모양이 조화를 못 이루고 있는 점이 아쉬웠다.

현재의 우화루 건물은 1611년에 다시 지은 것이다.

그리고 극락전 동쪽 옆 작은 건물에 걸린 ‘철영재(英齋)’라는 현판이 눈길을 끌었다. ‘자하(紫霞)’라는 낙관 글씨가 있어 호가 자하(紫霞)인 신위(1769∼1845)의 글씨로 보인다. 글자 뜻풀이로는 ‘꽃봉오리 향기를 맡는 집’이라는 뜻으로 대충 풀이할 수 있겠으나, 사찰에서는 ‘말을 삼가는 집’이라는 의미라고 설명한다. 신위가 어떤 연유로 이곳에 현판 글씨를 남겼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신위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화가·서예가로, 이정·유덕장과 함께 조선의 3대 묵죽화가로 꼽힌다. 김봉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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