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수첩] 백년설 가요제 부활을 염원하며

  • 석현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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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0-30   |  발행일 2014-10-30 제26면   |  수정 2014-10-30
[취재수첩] 백년설 가요제 부활을 염원하며

2014년 올해는 백년설 선생이 태어난 지 꼭 100년이 되는 해다.

한국가요 100년사를 되새겨 보면서‘나그네 설움’ ‘번지없는 주막’ ‘마도로스 박’ 등 많은 히트곡을 남긴 1940년대 초반의 대표적 대중가수 백년설 선생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빠지면 우리가요 100년사는 백지와 다름없을 만큼 선생의 업적은 위대하다. 백년설 선생은 1914년 성주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이창민(李昌民)이다. 국내 대중가요 초창기에 해당하는 1930년대 당시, 아무리 유명한 가수라 하더라도 자신의 히트노래를 담은 레코드가 1만장 이상 팔린 기록을 가진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백년설 선생의 ‘나그네 설움’은 무려 10만장 이상이나 팔렸다.

이 노래가 세상에 나오기 1년전인 1937년에는 일본군국주의가 중국대륙을 삼키기 위한 중·일전쟁을 일으킨 뒤 ‘내선일체’니 ‘창씨개명’이니 야단법석을 떨며 지원병제를 실시하면서 한국민까지 전쟁터로 내몰았던 때였다. 당시 우리 국민의 나라를 잃은 슬픔과 분노는 최고절정에 이르렀다. 그가 부른 나그네 설움은 그 당시 민족의 울분을 너무나 잘 묘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암울한 조국에 희망을 갖게 했으며, 우리 민족이 일제의 압박을 견디며 살아가게 한 원동력과 위로의 노래가 됐다. 나아가 메마른 가슴을 눈물로 적시고 하소연할 수 없는 외로운 이들의 친구가 됐다.

백년설 선생의 노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우리 민족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주는 약이었다. 그래서 백년설 선생과 함께 살아온 세대에는 감동 어린 노래의 화신이었고 마음의 고향이었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 강압에 의해 작곡가 박시춘과 작사가 조명암 등이 만들게 된 친일가요 ‘혈서지원’ ‘아들의 혈서’ ‘결사대의 안해’ 등은 가수 백년설을 비롯해 남인수, 이난연, 박향림 등에 의해 불렸다. 일제가 볼 때 최고의 가치가 있는 이들을 어찌 그냥 두었겠는가. 그들 모두 목숨에 대한 위협에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을 한탄하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면서 마지 못해 불렀을 터이다. 일제를 찬양하는 친일 노래를 부른 것은 분명히 잘못됐다. 하지만 우리는 당시 시대상황과 한 맺힌 우리의 역사를 토대로 한 유행가인 가요를 이해하지 못하고 친일이니 매국이니 운운하며 지금의 잣대로 단죄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갖고 있는 이들도 있다. 더구나 흑백의 논리로 치우치는 것은 곤란하다.

백년설 선생을 비롯한 수많은 가요인은 당시 망국의 한을 노래했고, 노래를 통해 서로를 위로하며 다가올 광복을 고대했다. 그가 부른 주옥같은 노래는 근대 한국 대중가요의 초석이며 근간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겠다.

백년설 선생은 성주의 자랑이자 영광이다. 이제 ‘생명문화의 고장 성주’에서 백년설 선생의 영광을 재현하고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며 백년설 가요제를 부활하려고 한다. 당연한 시대적 요구라고 생각한다. 백년설 가요제를 전국민이 함께하는 가요제로 승화시켜 나가는 것이 작금의 국제상황에도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석현철 2사회부 기자/성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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