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닫을 위기 대구 동성아트홀 인수한 김주성 광개토병원장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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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4-24   |  발행일 2015-04-24 제37면   |  수정 2015-04-24
“예술영화전용관 하나 못 지켜내는 대구가 문화도시라 말할 자격 있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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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 광개토병원장 겸 동성아트홀 대표가 아트홀 입구 동성로 벤치에 앉아 미소를 짓고 있다. 그는 단 1명의 관객이 있더라도 영화와 예술의 다양성은 보장돼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작은 사진은 김 대표가 지금까지 상영한 영화의 포스터를 가리키고 있는 모습.


동성아트홀 폐관 소식을 전하자
딸이 어떻게 할 수 없냐고 하더라
누구를 기다리기보다 직접 나서

문화적 소수자의 욕구
채워줄 수 있어야 성숙한 사회다
평소 예술·독립영화에 관심 많아


동성아트홀 고유 콘셉트와 고용
그대로 승계했다


리모델링해 카페·박물관 등 운영
영화 토론이나 세미나도 열 계획

대부분의 사람은 거름보다 화려한 꽃이나 탐스러운 열매가 되길 원한다. 풍성한 열매를 맺기 위해선 토양도 기름져야 하지만 충분한 거름이 필요하다. 하지만 거름이 되고자 하는 사람보다 꽃이나 열매를 따먹기만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으면 그 사회는 강퍅해지고 상스러워진다. 거름은 거저 얻어지는 게 아니다. 희생과 헌신이란 자양분을 통해 생긴다.

김주성 광개토병원장 겸 동성아트홀 대표(47)는 꽃보다 거름이 되고자 하는 사람이다. 수련의들이 가장 기피하는 외과에서도 그는 더 힘든 화상(火傷)외과를 선택해 화상 치료의 지평을 넓혔다.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가치 있는 일에 대해 주저없이 도전해 얻은 결과였다.

최근 김 원장은 새로운 영역에 광개토대왕처럼 도전했다. 지난 1일, 매달 수백만원의 적자에 허덕이다 폐관한 동성아트홀을 인수한 것이다. 1991년 개관한 동성아트홀은 대구에서 유일한 예술영화전용관이다. 2004년부터 11년간 2천여편의 다양한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를 상영해오며 대구가 문화예술의 도시라는 자존심을 지켜왔다. 하지만 동성아트홀은 전국 5개 예술영화관과 함께 운영실적 저조라는 이유로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술영화관 지원사업에 탈락함으로써 지난달 문을 닫게 됐다. 예술영화를 사랑했던 많은 문화인들은 폐관소식에 안타까워했다. 영남일보에 영화칼럼을 쓰는 장우석 물레책방 대표는 ‘곡(哭), 동성아트홀’이라 표현하기까지 했다. 그런 가운데 김 원장이 동성아트홀을 인수함으로써 예술영화 애호인의 갈증을 해소해주었다.

지난 17일 오후 동성아트홀을 찾았다. 영화관에선 빔 밴더스 감독이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제네시스-세상의 소금’을 상영하고 있었다. 영화는 전세계 빈곤, 기아,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한 사진가 세바스티앙 살가도의 이야기다. 김 대표가 미소를 지으며 기자를 반갑게 맞았다. 그의 양복 깃에 세월호 리본이 달려 있는 게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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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동성아트홀이 재개관했다. 동성아트홀을 인수한 이유는 무엇인가.

“영화는 예술의 속성을 가진 문화 매체다. 산업적인 측면으로만 영화를 평가해선 안 된다. 문화와 예술의 핵심은 다양성이다. 선택의 폭이 넓어야 하며 획일화돼선 안 된다. 인체에도 오장육부만 있는 게 아니다. 호르몬, 신경물질, 비타민 등 온갖 요소들이 다 합쳐져 있다. 흥행이 안 된다는 이유로 멀티플렉스에 선택받지 못한 영화가 개봉도 하지 못한 채 사장돼서야 되겠나. 그러면 신인감독이 만든 영화나 저예산영화는 설 곳이 없어진다. 문화적 소수자의 욕구를 채워줄 수 있는 사회가 성숙한 사회다.”

▲직접적인 인수 배경은 뭔가.

“경영상태가 어려워진 동성아트홀이 폐관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경영상의 어려움이란 것이 영화진흥위원회의 ‘예술영화지원금 중지’라는 석연찮은 이유 때문이라는 것도 늦게 알았다. 동성아트홀은 딸이 중학교 시절 즐겨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딸에게 폐관 소식을 전하자 아빠가 어떻게 해줄 수 없겠느냐고 하더라. 대구가 이런 예술영화전용관 하나 제대로 못 지켜내면서 ‘뮤지컬의 도시’니 ‘문화도시’니 할 자격이 있나 의구심이 들었다. 분노가 치밀고 수치스럽기까지 했다. 그래서 누군가를 기다리기보다 내가 그 누군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용기를 냈다.”

▲영화를 좋아하는가.

“그런 편이다. 평소 예술영화나 독립영화에도 관심이 많다. 80년대 중·고등학교 시절만 해도 대구의 동성로 북쪽에는 개봉관인 대구극장이 있었다. 또 준개봉관인 자유극장, 송죽극장이 있었으며 소극장으론 해바라기극장, 코스모스극장 등이 있었다. 90년대 초만 해도 동성로를 중심으로 15개의 소극장이 있었던 걸로 안다. 그땐 밖에서 줄을 서 기다릴 정도로 붐볐다. 대기업이 영화사업에 뛰어들면서 멀티플렉스가 예술의 다양성을 죽여버렸다. 80~90년대엔 영화 선택의 폭이 지금보다 훨씬 넓었던 것 같다.”

▲동성아트홀이 개관한 지 보름 정도 지났는데 어떤 영화를 상영했나.

“장국영 기일인 지난 1일에 맞춰 장국영의 영화를 상영했다. 이후 가위손, 라붐 등을 상영하고 스위스영화제, 일본영화제, 사회복지영화제를 했다. 이번 주엔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상영한다. 계속해서 소외받고 눈길을 받지 못한 기획영화를 준비 중이다.”

▲지원금이 끊긴 상황에서 적자를 보전할 복안이 있는가. 영화관 운영방침 같은 게 있을 텐데.

“지금까지 동성아트홀을 지켜낸 배사흠 전 대표에게 감사한다. 배 전 대표는 현재 명예관장이다. 그는 대구 만경관 등에서 영화 간판을 그린 분이다. 평생 자신의 극장을 가지는 게 꿈이었는데 전 재산을 다 털어넣어 동성아트홀을 인수했다. 영화와 동성아트홀에 대해 애정이 많은 분이다. 그가 동성아트홀의 CI를 직접 하겠다고 했다. 동성아트홀 고유의 콘셉트와 고용을 그대로 승계했다.”

▲자세히 이야기해 달라.

“동성아트홀릭이라는 마니아가 2만명 가까이 되지만 개방과 소통을 더 강조하고자 한다. 먼저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야 들어올 수 있는 구조를 바꾸기 위해 공간 리모델링을 할 계획이다. 매표소를 건물 로비 안으로 들이고 로비 3층은 카페로 꾸밀 예정이다.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다 영화가 보고 싶으면 표를 끊고 보면 된다. 3층 내부에서 4층 옥상으로 바로 올라갈 수 있도록 만들 것이다. 4층엔 영화아카이브 역할을 하도록 작은 영화 박물관으로 꾸미려고 한다. 박물관을 근대골목투어와 연계시키면 재미있을 것 같다. 내부 관람석은 80년대 것으로 빈티지하다. 3개의 좌석이 붙어 있는 것도 있다. 임검석(臨檢席)이라고도 하는데 당시 경찰들이 영화와 영화를 보러온 관객을 감시하기 위해 마련한 좌석이다. 그땐 영화관에서 담배도 피우고 떠들기도 했는데 ‘앉으시오 장대’라는 게 있었다. 영화를 시작하기에 앞서 좌석에 앉은 관객의 머리 위로 장대를 뒤에서 앞으로 훑어갔는데 그것도 흥미차원에서 도입할 생각이다. 또 3층 동편 벽을 허물어 바깥이 보이도록 할 계획이다. 동성아트홀 입구는 정돈됐는데 건물 동편은 슬럼이다. 도시의 민낯을 자세히 보여준다. 그런 장면은 솔직하다. 동성아트홀이 계단 구조로 돼 있어 장애인이 찾을 수 없다. 기회가 된다면 장애인시설로 ‘찾아가는 영화관’도 운영하고 싶다.”

▲멀티플렉스가 가지지 못한 점을 활용하겠다는 뜻인가.

“대기업이 운영하는 멀티플렉스와 예술전용영화관을 수익 차원에서 단순비교할 수 없다. 지향점이 다르다. 예컨대 멀티플렉스에선 영화가 끝나고 나면 엔딩 크레딧(출연 배우부터 영화 제작에 참여한 사람이나 기관을 소개하는 자막)이 올라가기도 전에 불을 켠다. 관객은 빠져나가기 바쁘고 음악도 듣지 않는다. 영화의 여운을 즐기고 음미할 여유를 주지 않는다. 영화 한 편 보고 차 한 잔 마시면서 영화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한다. 동성아트홀에서 영화에 대해 토론을 하고 세미나도 할 계획이다.”

▲전공 이야기로 돌아가자. 광개토병원은 화상전문 치료병원으로 알려져 있다. 병원 이름에 역사적 인물을 쓰는 경우가 흔치 않다.

“대륙을 호령했던 광개토대왕의 진취적 이미지와 비전이 마음에 들었다. 2006년 수성구청 옆에서 개원했는데 그때 중국의 동북공정으로 어수선할 때였다. 광대토대왕처럼 큰 비전을 품고 싶었다.”

▲그땐 병원 규모가 크지 않았던 걸로 안다.

“처음 개원했을 때 내 방에 야전침대를 놓고 숙식을 했다. 혼자 24시간 쪽잠을 자면서 근무했다. 1년간 집에 들어가지 않고 병원에서만 생활했다. 병원 6층에서 내려온 기억이 별로 없다. 비전이나 추구할 가치를 관철시키기 위해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열정이란 아름다운 것이다.”

▲내당동으로 옮겨서도 그렇게 했나.

“5년 전 규모를 키워 옮겼는데 1년간 똑같이 그렇게 했다. 주말과 휴일에는 가족이 병원에 와서 생활했다.(웃음)”

▲화상 전문 치료 병원을 선택하게 된 배경은 .

“의대에 입학하면 다들 외과를 전공하고 싶어 한다. 의사같이 보이니까.(웃음) 하지만 수련의를 거치면서 바뀐다. 비전이 있는 과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외과는 기피대상이다. 외과에서도 화상은 더 기피한다. 늘 고통스러워하는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마음도 괴롭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한다. 동산의료원에서 화상 치료를 주로 해왔는데 개원할 당시 대구·경북에 제대로 된 화상 전문 치료 병원이 없었다.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다면, 내가 할 수만 있다면 그걸 한다는 게 삶의 지표다.”

김 원장은 고등학교 3학년 1학기까진 전자공학과를 가고 싶었다. 하지만 2학기 때 맹장염 재수술로 중환자실에 실려간 게 인연이 돼 의대를 선택했다. 계명대 의대 시절 학생회활동을 하면서 사회와 세상의 현실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 그 때문에 졸업도 늦게 했다. 하지만 그 시절 겪었던 경험이 지금의 자양분이 됐다고 한다. 청구고에 다닐 때는 악대부(트럼펫 담당)를 했고 의대 그룹사운드 ‘힙슨’에서 드러머로 활동했다. 공중보건의를 할 땐 쪽방진료소를 운영하며 노숙자와 같은 어려운 이웃을 위해 힘을 보탰다. 지금은 광개토병원 안에 쪽방진료센터가 있다. 왜 그가 동성아트홀을 인수한지 알 것 같다.

▲대구·경북지역 화상 치료는 어느 수준인가.

“현재 화상 치료 전문 병원이 서울에 2곳, 부산에 2곳, 대구에 2곳이 있다. 예전엔 경북지역 환자들이 다들 서울로 갔는데 지금은 우리 병원으로 많이 내원하는 편이다. 사회적으로 화상 환자를 기피하는 것도 문제다. 치료 이후에도 지속적 관심이 필요하다. 화상 환자는 불면증과 우울증 등 외상후증후군에 걸리기 쉽다. 유방암 환자를 위한 목욕탕이 있는 걸 봤다. 우리 병원에도 가능하다면 화상환자를 위한 목욕탕을 마련하고 싶다. 화상이나 유독가스를 흡입한 환자를 위해선 고압산소 챔버가 필요한데 대구·경북지역 병원에선 그 장비를 갖춘 곳이 한 군데도 없다. 원래는 잠수병 환자나 소방관 같이 유독가스에 노출되기 쉬운 환자를 치료하기 위한 장비다. 응급환자가 있을 때 반드시 필요하다. 대구첨단의료복합센터에 ‘광개토 화상 연구소’가 입주한다. 거기에서 고압산소 챔버를 개발·제작할 계획이다. 1명의 환자라도 필요하다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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