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5] 김천 고대국가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17> 창녕비와 감문국<하>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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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8-26   |  발행일 2015-08-26 제13면   |  수정 2021-06-17 14:40
감문주는 신라의 천하제패 위한 4개 지방중심 중 한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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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녕군 창녕읍 만옥정공원의 창녕비. 창녕비의 감문군주에 대한 내용으로 미뤄 옛 감문국 지역의 중요성을 가늠할 수 있다. 손동욱기자 dingdong@yeongnam.com

 

<스토리 브리핑>

김천의 읍락국가(邑落國家) 감문국(甘文國) 일원은 신라 병합 후에도 지방의 중심지 역할을 담당했다. 경남 창녕군 창녕읍의 창녕비(창녕 신라 진흥왕 척경비, 국보 제33호)의 기록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비문에는 ‘감문군주(甘文軍主)는 사탁(沙喙)의 심맥부지(心麥夫智)급척간(及尺干)’이라고 적혀 있는데, 당시 신라의 행정체제를 유추해 볼 수 있다. ‘감문’이라는 국호가 신라시대에도 여전히 사용됐음을 알 수 있으며, 옛 감문국 지역의 위상을 가늠할 수도 있다. ‘감문국의 흔적을 찾아서’ 17편은 신라 감문군(甘文郡)이 감문주(甘文州)로 승격된 역사적 배경과 신라 진흥왕(眞興王, 534~576)의 천하관에 관한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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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라본기에 기록된 신라 국호에 관한 내용. 오른쪽 둘째 줄 아래부터 ‘신자덕업일신 나자망라사방(新者德業日新 羅者網羅四方)’이라는 글귀가 보인다. ‘신라(新羅)’라는 국호는 천하를 제패하겠다는 사방의식의 표현이었다.


삼국통일 의지 담긴 四方 철학으로
지방행정 개편한 4개 州 중의 하나
上州 중심지로 57년 군사·행정 거점



중앙정부서 진골인 軍主 파견 통치
백제 접경 탓…지리·전략적 요충지
九州체제로 바뀔 때까지 위상 굳건
 

 

 

 

 

 

◆ 신라의 사방관념과 감문주


6세기 당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끈 진흥왕은 삼국통일 이전까지 최대의 영토를 확보한 군주다. 진흥왕은 한강유역과 함경도 지역은 물론, 남쪽의 가야권 일부까지 정복하며 신라의 위세를 떨쳤다.

특히 영토를 확장한 진흥왕은 경주를 제외한 지방을 상주(上州)·하주(下州)·신주(新州)·비열홀주(比列忽州)의 4개 지방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상주의 경우 법흥왕 12년(525)에 설치됐지만, 신주·하주·비열홀주는 진흥왕대에 설치됐다.

주목할 만한 점은 옛 감문국을 포함하는 상주 지역만이 원래 신라의 땅이라는 점이다. 각각 현재의 서울과 함경도 지역인 신주와 비열홀주의 경우 고구려나 백제의 땅이었다. 경남 창녕을 중심으로 한 하주의 상당수는 가야의 영역이었다.

반면 경북 서부지역을 중심으로 한 상주는 일찍이 신라에 편입된 소국이 많았다. 감문국(김천), 사벌국(상주) 등이 신라의 상주 지역에 있던 대표적 읍락국가다.

당시 신라의 지방행정체제 개편은 진흥왕의 천하관인 ‘사방(四方)관념’과 깊은 관련이 있다. 사방은 ‘천하사방(天下四方)’이란 뜻으로 온 천하를 뜻한다. 이러한 사방관념은 지증왕(智證王, 437~514)이 국호를 ‘신라(新羅)’로 정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지증왕은 국호를 정하면서 ‘덕업일신 망라사방(德業日新 網羅四方)’이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이는 “덕업이 날로 새로워지고 사방을 망라(지배)한다”는 뜻으로 신라의 번성을 기원하는 의미다.

국호에 포함된 ‘사방’은 삼국통일을 갈망한 신라의 의지였다. 진흥왕은 이러한 의지를 실행에 옮기기 위해 정복군주가 됐다. 지방을 4개 주(州)인 ‘사방’으로 나누고, 각 주마다 사방군주(四方軍主)로 불리는 군주(軍主)를 파견했다. 비록 삼국통일 전이었지만 고구려·백제·가야의 영토였던 곳을 사방에 포함시켜 통일을 향한 의지를 드러냈다. 그 사방의 중심 중 하나가 옛 감문국의 영역인 감문주다.



◆ 왕명의 대행자, 감문군주

현재의 김천 지역인 감문주가 신라 사방의 중심 중 하나라는 사실은 매우 흥미롭다. 신라는 진흥왕이 사방을 완성한 뒤인 577년 상주(上州)의 주치주(州治州, 현재의 도청 소재지 격)를 사벌주(상주, 尙州)에서 감문주(김천)로 바꾸었다. 요즘과 비교하면 중소도시가 대구나 부산 정도의 지위를 지닌 도시로 성장한 것이다.

신라시대 당시 주(州)로 지정된 지역이 드물기에 더 큰 관심이 간다. 경북지역에서는 김천(감문주)과 상주(사벌주), 선산(일선주)만이 신라의 주로 승격됐다.

사방군주의 한 명인 감문군주(甘文軍主)가 김천에 파견된 것은 주치주인 감문주가 누렸을 권위를 보여준다. 당시 중앙정부가 파견한 군주(軍主)는 진골 귀족 출신으로, 자체 행정조직을 꾸리고 백성을 다스렸다. 군주가 지방관으로 파견되면 중앙관리인 조인(助人)을 함께 데려왔지만, 지방 토호세력의 도움을 받았다. 당시만 해도 중앙집권이 완벽히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앙정부는 지방 토호세력들을 촌주(村主)로 임명한 뒤 군주를 돕도록 했다. 군주의 임무는 크게 두 가지였다. 첫째는 조세를 거두는 것이었으며, 둘째는 노동·군사력의 동원이었다.

상주의 주치주가 사벌주에서 감문주로 바뀐 근본적 원인은 백제와 관련이 있다. 신라는 554년, 백제와 맞붙은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통일을 향한 새 판도를 구상하고 지방행정 개편에 나섰다. 관산성 전투 이후 백제와의 접경지인 옛 감문국 지역이 전략적으로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신라의 ‘사방관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라도 백제와 인접한 옛 감문국의 영역을 다잡아야 했다. 결국 신라는 상주(上州)의 주치주를 감문주로 옮겨 백제 접경지역의 방비를 튼튼히 했다. 이후 감문주는 577년부터 57년 동안 상주의 중심지역으로 신라 군사·행정의 거점 역할을 담당했다. 감문주 전·후로 상주 주치주였던 사벌주(23년), 일선주(54년)와 비교해도 긴 시간이다. 삼국통일 이후 신라의 지방행정체제가 사방(四方)에서 구주(九州) 체제로 바뀔 때까지 옛 감문국 지역의 위상은 굳건했을 것이다.

계명대 사학과 노중국 명예교수 역시 “신라가 삼국통일 기반을 다지던 시기의 감문주는 사방의 중심 중 하나였다. 감문군주의 존재 또한 옛 감문국 지역이 지녔던 전략적 중요성을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 참고문헌= ‘유적으로 고찰한 감문국’ ‘(진·변한사 연구) 진·변한의 성립과 전개’ ‘계명사학 제23집’ ‘국역 김천역사지리서’ ‘디지털김천문화대전’ ‘대구·경북 신석기 문화 그 시작과 끝’ ‘신라문화 제38집 별쇄본. 삼국사기 열전에 보이는 4~5세기 신라인의 활약상’ ‘김천시사’ ‘감문국 유적정비를 위한 정밀지표조사’‘대구·경북 문화재 약탈 스토리(영남일보)’

▨ 자문단 △문재원 국사편찬위원회 김천사료조사위원 △이석호 김천향토사연구회 회장 △송기동 김천문화원 사무국장 △주보돈 경북대 사학과 교수 △노중국 계명대 사학과 명예교수 △강종훈 대구가톨릭대 역사교육과 교수 △권태을 경북대 명예교수
공동 기획:김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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