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문주 설치의 역사적 배경

  • 임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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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08-26   |  발행일 2015-08-26 제13면   |  수정 2015-08-26 07:45
554년 관산성전투서 백제 물리친 신라
통일의 새 판 짜기 위해 지방행정 개편
사방관념 실현·백제 압박 ‘이중효과’

신라가 옛 감문국 영역인 감문군(甘文郡)을 감문주(甘文州)로 승격시킨 원인을 찾으려면 백제 성왕(聖王, ?~554)의 고구려 공략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당시 고구려·백제·신라의 치열한 경쟁이 한반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사건의 발단은 551년, 백제 성왕이 신라군(당시 진흥왕)과 가야군까지 동원해 고구려 공격에 나선 것부터 시작된다. 당시 성왕은 원래 백제의 수도였던 한성백제(서울) 지역을 수복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백제는 475년, 계루왕이 고구려 장수왕에 의해 죽음을 당하면서 웅진(공주)까지 밀려 내려오는 치욕을 감내해야 했기 때문이다. 또한 백제의 중심이었던 한강유역과 경기도 일대가 모두 고구려 땅이 되면서 백제의 자존심에도 큰 상처가 났다. 이후 고구려는 60여년 동안 백제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다.

복수의 의지를 불태우던 백제 성왕은 538년,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천도 후 국가체제 정비에 나섰다. 이후 한성 공략을 결심한 성왕은 백제의 힘만으로 부족해 보이자 신라·가야와 연합했다. 이른바 나제동맹을 구축한 것이다.

결과는 좋았다. 신라는 남한·북한강 지역을 차지했으며, 백제는 한강 하류와 서해안 지역을 차지해 국가의 숙원을 해결했다.

하지만 백제의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553년, 신라 진흥왕이 한강하류를 기습적으로 점령한 것이다.(신라와 고구려가 밀약을 맺고 백제를 배신했다는 의견도 있다) 당시 신라가 원하던 것은 중국과 직접 교류할 수 있는 서해안의 항구였다. 한강하류는 최적의 조건에 부합하는 곳이었다. 이전까지 신라 사신이 배를 통해 중국으로 가려면 울산에서 출발해 백제 해안을 지나쳐야 했다. 육로를 통한 중국행 또한 고구려를 가로질러야만 했다. 고구려·백제와 경쟁하던 신라는 어떤 방법으로든 중국과의 연결선을 유지해야 했다.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남하한 것 처럼 신라 또한 중국으로 향하는 항구를 절실히 원했던 것이다.

신라의 배신을 접한 백제 성왕은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올랐다. 간신히 옛 수도를 회복했는데 신라가 가로챘으니 그 분노의 끝이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신라가 모든 것을 차지한 뒤였다. 승전의 기쁨에 취한 나머지 신라의 배신을 예상치 못한 탓이었다.(백제가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한강유역을 일부러 비워두었다는 의견도 있다)

결국 백제 성왕은 554년,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신라 침공을 감행한다. 이때 신라와 백제 사이에 큰 전투가 벌어진 곳이 관산성(충북 옥천)이다. 백제는 대패했고 성왕 자신조차 신라군에 붙잡혀 죽는다. 당시 전사한 백제 병사의 수가 2만9천여명이라고 전해진다. 관산성 전투는 향후 삼국의 판도를 결정짓는다. 관산성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신라는 그 국운이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고, 백제의 국운은 하락세로 접어든다. 감문군이 감문주가 된 배경 또한 당시 신라의 영역 확장과 무관하지 않다. 신라는 본격적인 사방관념 실현과 백제 압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김천 개령면 지역에 감문주를 설치한 것이다.

임훈기자 hoon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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