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따뜻해서 좋다 불편해서 좋다 그 음반 ‘LP’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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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5-11-06   |  발행일 2015-11-06 제33면   |  수정 2015-11-06
대구의 마니아를 찾아서
20151106
미래보다 과거가 더 쏜살같이 지나가기 때문에 그 세월과 맞닿은 물건은 항상 추억의 기운을 담을 수밖에 없다. 무용지물인 줄 알았던 LP음반은 ‘증류수’ 같은 최근 음원으로 존재하는 디지털 뮤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적이고 삶을 더 성찰하게 만든다. 매의 눈빛 같은 카트리지 바늘이 한 뮤지션의 영혼을 물끄러니 내려다 보고 있다.


칙~ 치지직~ 치직~. 33.3rpm(1분당 회전수)의 LP(Long play) 음반. 이놈은 1분에 78회전을 했던 유성기 시절의 SP(Short play) 음반보다 더 길게 회전했다. 누군가는 그 소리를 ‘세월이 굴러가는 소리’라고 했다. 시간에 지친 사람들은 부적 같은 그 음반을 통해 위안과 위로를 받았다.

1956년 유성기 시대의 총아였던 SP 음반은 끝내 퇴장하고 만다. 그리고 1963년에 ‘12인치 스테레오 LP시대’가 열린다. ‘한국발 청년문화’에 불을 댕긴다. 70년대 중반에 청소년을 녹음기 앞으로 불러들였던 뮤직카세트(MC)가 태동하면서 전국은 ‘야전(야외전축) 신드롬’에 휩싸인다. 전국 레코트점은 SK 공테이프를 들고 온 청년들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레코드점 아저씨는 LP에서 흘러나온 노래를 카세트에 녹음해주고 500원을 받았다. 하지만 1986년 필립스사와 기술제휴한 SKC가 국내 첫 CD를 출시하면서 LP 시대도 끝이 나버린다. 그런 CD도 채 20년을 못 버티고 MP3에 잡아먹혀버린다. 어라, 그 MP3도 얼마 전 ‘멜론’ 같은 온라인 음원사이트에 죽임을 당한다. ‘약육강식’의 음반시장이었다. 하지만 유행은 돌고 도는 법. 죽은 줄 알았던 LP가 ‘불사조’처럼 부활하기 시작했다.

지난달 28일 오후 4시. 대구시 수성구 두산동 수성못 동쪽 주점가에 자리 잡은 LP 전문 록카페 ‘리플레이(REPLAY)’. 한 사내가 어둑하게 나타났다. 옷깃에 비애스러움이 묻어 있다. 말수가 극도로 적은‘음지식물’ 포스의 LP 마니아인 강호성씨(54). 그는 미국과 영국 팝은 물론 유럽을 거쳐 제3세계 뮤직까지 익혔지만 방송가 DJ로 입문하지 않고 ‘재야 LP광’으로 30여 년을 살아왔다. 한때 신촌 록카페의‘고수’로 통했다.

그런 그가 돌연 서울을 떠났다. 2013년 새로운 LP시대를 확신하며 연고가 전혀 없는 대구로 불쑥 잠입했다. 10년 전 먼저 내려와 나름대로 자리를 잡은 LP 마니아인 후배 김기현씨와 의기투합, ‘아날로그 뮤직 카페’를 오픈했다. 매일 밤 강씨는 ‘불꽃’이 된다. 입구 맞은편 상단 벽에 이걸 암시하듯 승용차 위 남녀가 키스하는 장면이 담긴 미국 그룹 그린데이의 재킷 사진을 직접 대형 벽화로 꾸몄다. 단골이 자기 음악의 의중을 단번에 알아차려주면 그는 ‘용암’으로 업그레이드된다. 그럼 그는 또 개인 뮤직룸에서나 어울릴 것 같은 초감각의 희귀음악을 날린다. 단골들은 다들 눈을 지그시 감고 곡 특유의 바운스와 그루브를 만끽한다.

그가 가장 극적으로 보일 때는 모두 50여 칸으로 나뉜 음반 보관대 앞에 설 때다. 엄선된 곡은 이미 명기 반열에 든 BOSS 901-4와 ALTECA4를 통해 때론 용암처럼, 때론 달빛처럼 흘러나간다.

오픈한 지 1년 조금 넘었다. 대구에서 음악 좀 안다는 이는 리플레이를 단번에 인정한다. 여느 뮤직카페와 달리 술과 분위기보다 음악이 압권. 강씨의 30년 노하우가 묻어 있는 음악 선곡, 다들 기립박수를 보낸다. 하루이틀 만에 구축된 뮤직 인프라가 아니다. 패션디자이너에서 요즘 레스토랑 창업 컨설턴트로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는 변상일씨도 애니멀의 원곡 ‘해 뜨는 집’을 새롭게 리메이크한 미국 뮤지션 프리지드 핑크 버전의 해 뜨는 집을 이 가게에서 처음 접하곤 이내 단골이 된다. 게다가 미국의 반전·반핵 포크 싱어 존 바에즈가 처음 부른 것으로 알려진 ‘메리 해밀튼’(뒤에 방희경이 ‘아름다운 것들’로 번안한 것을 양희은이 히트시킨다)도 이탈리아 남자 가수 안젤로 브란아울디가 부른‘니나 나나(Ninna nanna)’가 첫 가수란 걸 알려준다.

강씨에 앞서 비슷한 대구행을 한 두 사람도 우리는 기억해야 될 것 같다. ‘호남의 갑부 아들’이었던 박용찬도 강씨처럼 6·25전쟁 때 자신의 SP판을 트럭에 싣고 대구로 피란 왔다. 중구 향촌동 옛 판코리아 바로 옆에 고전음악감상실 ‘르네상스’를 차렸다. 그는 1959년 서울로 올라가 종로1가 영안빌딩 4층에 서울 르네상스 시절을 열고 1987년까지 영업을 한다. 2000년 무렵 ‘제2의 김현식’으로 불렸던, 한국 대표 블루스 밴드로 유명한 신촌블루스 메인 싱어로 활동했던 영신고 출신의 블루스 기타리스트 김형철씨(고인)가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귀향해 라이브 LP 카페 ‘스쿨(SCHOOL)’을 오픈한 것과 비슷한 행보였다.

아무튼 강씨는 왜 LP광이 되었을까?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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