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文靑의 열정

  • 이춘호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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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6-04-29   |  발행일 2016-04-29 제34면   |  수정 2016-04-29
■ 시인, 시인을 말하다
20160429


죽을 때까지 변함없는 文靑의 열정

-타향살이 외로움이 시의 싹으로
-조사 하나에 긴밤 지새우기 일쑤
-여성으로 존재 증명하려 쓰기도

◆ 나는 어떻게 시인이 됐는가

시민은 어느 순간 시인이 되는가? 우주선이 일상이라는 중력에서부터 초월이라는 무중력의 세상으로 진입할 때 엄청난 고열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하듯, 시인은 일상의 문장을 벗어나 신대륙, 아니 은하수 같은 찬란한 미학의 문장을 보여주기 위해 ‘시어(詩語)’와 혈투를 벌여야 된다. 폭포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의 힘찬 몸짓. 그게 등단 직전 문학청년시절이 아닐까.

▲김연대

19세에 고향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70리를 걸어 안동에서 기차 타고 무작정 서울로 갔다. 서울 거리를 배회하며 떠돌다가 인천까지 밀려갔다. 그때 바다를 처음으로 봤다. 월미도 미군기지 안에서 먹고 자고 일하면서 밤에는 클럽쇼, 외국영화 등도 마음대로 볼 수 있어 외국문화에 일찍 눈을 떴다. 숙소에 오면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재미도 없는 카뮈의 ‘이방인’을 읽은 것도 이 시절이었다. 자살, 밀항 등을 생각했다. 혼자였고 외로웠고 쓸쓸했다. 허무가 결국 내 시의 싹이었다.

첫 월급 타서 산 조병화 시인의 첫 합본시집 ‘여숙(旅宿)’은 내 시의 이정표였다. 그 시집은 현재 내가 살고 있는 ‘김연대문학점심관’ 유리진열장 안에 소중하게 진열 보관되어 있다. 62년 2월엔 건방지게도 영문제목(YELLOW SEA)의 시를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보내보기도 했다. 63년 2월 월미도에 있다가 입대했다. 나의 청순한 시절은 그렇게 갔고 거기서 끝났다.

▲노태맹

목숨 걸고 시를 썼다고 말하면 지나친 과장이겠지만, 시에 모든 걸 걸었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연필과 지우개 하나 들고 노트에 썼다 지우다를 밤새워 했다.

어떤 밤은 조사 하나에 매달려 지새운 적도 있었던 것 같다. 왜 그랬는지 지금으로서는 불가사의한 일이다. 그 고통의 밤이 지나면 다음 날은 그걸 들고 친구에게 보여주고, 엎어질 만큼 술을 마시고…. 그런 생활의 반복 때문에 대학교 공부를 소홀히 해서 제적당하기도 했다. 시가 아니었다면 속세적으로 훨씬 잘 살았을 거란 생각도 해본다. 시는 나의 종교 같은 것이었다.

▲윤은희

대학 생활을 막 시작한 봄 축제기간 ‘교내 백일장’에서 라일락 꽃을 주제로 한 시를 써서 수상하였고, 그 부상으로 만년필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로 시를 썼던 기억이 별로 없다는 것.

대학원 영어영문학과 재학 중에 소논문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페미니즘에 관한 여러 서적을 읽게 되었다. 여성으로서의 삶이 사회적인 질서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영국작가로서는 최초로 출판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쓴 작가 마거릿 캐번디시의 ‘여자는 박쥐나 올빼미같이 살며 짐승처럼 일하다가 벌레처럼 죽는다’는 기록을 대하면서 그 충격을 감출 수가 없었다. 아내나 어머니가 되는 것을 목표로 교육받고 그것을 이상으로 꿈꾸게 강요되어 온 여성이 그 이상을 빼앗겼을 때, 어떤 의미있는 직업도 허락되지 않으며 인생에서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사회적 현실이 여성을 괴롭히고 있었다. 이때부터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글쓰기 작업은 시작되었다고 본다.

▲변희수

문학청년이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 한 시절을 한정하는 것 같은 느낌이 있어 썩 달갑지 않은 말이다. 일단 문학에 입문하는 순간부터 늙어 죽을 때까지 청년적인 열정을 가지지 않는다면 문학은 하기 어렵다.

그러니까 문학적인 고뇌와 정열은 어떤 시기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고뇌와 반성의 밀도는 더 치열해지고 깊어지는 것이 진짜 문학이 주는 고통이자 풍미다. 여고 2학년 때 습작으로 단편소설을 썼다. 제목은 ‘습죠, 선생님’. 말끝마다 ‘습죠’를 붙이는 못생긴 국어 선생님 얘기였다. 그때부터 난 막연하게 작가적 시점이라는 것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했다. 소설에 미련이 있었지만 시를 쓰고 있는 지금이 싫지는 않다.

나같은 경우 개인적인 괴로움 혹은 외로움을 참 잘 견디는 편에 속하지만 그것이 극에 달했다 싶을 때 출구로 누군가를 만나 수다를 떤다거나 시간을 보내게 된다. 지나고 보면 그렇게 해서 만난 사람들이 다시 시가 되는 경우 역시 많다.

▲김선굉

등단 35년이다. 시집을 다섯 권 펴냈다. 첫 시집 ‘장 주네를 생각함’을 펴낼 때의 설레던 가슴을 잊을 수 없다. 돌이켜보면 삼십대 초반의 내 청춘도 제법 아름다웠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쓰고 또 쓰고…

-읽는 것과 쓰는 것 차이 가름 관문
-신춘문예·문예지 통해 시인 ‘입봉’
-등단만큼이나 첫시집 남다른 의미

◆ 詩란 우주선을 몰기 위한, 등단

인간의 통과의례 중 가장 가혹한 관문은 ‘시험’일 것이다. 특히 문학청년은 저마다의 사부를 거느리고 무림의 고수가 우글거리는 시단에 입문하기 위한 자격증이 필요하다. 이 나라에선 신문사의 신춘문예, 문예지의 신인상 등 등단이란 절차를 거쳐야 시인으로 정식 인정을 받게 된다. 등단이란 차를 합법적으로 몰기 위한 ‘운전면허증’ 같은 것이다.

▲김연대

조병화 시집을 통해 그분과 영혼의 동거를 했다. 그 분위기로 시심을 기르고 시를 육화시키며 잔뼈가 굵었는데 어느 날 대구 동성로 나의 가게에 그분이 오신 것이다. 한쪽 벽에 걸려 있는 액자 속의 나의 시 ‘무명화’를 읽어 보시고는 함께 온 성춘복 시인을 향하여 ‘이런 사람이 왜 등단을 안 했어’라고 반문 조의 말씀을 하셨다. 나는 그 말에 고무됐다. 89년 9월 한국예총 기관지 계간 가을 창간호 ‘예술세계’에 시 ‘빈터에 서서’를 갖고 비로소 시인이란 칭호를 얻었다.

내 첫 시집 ‘꿈의 가출’은 93년 혜화당 시선으로 나왔다. 다들 ‘왜 가출이냐’고 궁금해 했다. 내 인생에 있어 전반기는 떠나는 것이 간절한 꿈이었고 화두였다. 그래서 ‘꿈의 가출’ 이외에 다른 시집 제목이 끼어들 자리가 없었다. 조병화 시인은 여러 번 첫 시집 출간을 독촉했다.

시집 출간 후 많은 편지와 엽서, 그림 등을 받았다. 서예 작품을 보내온 분도 있고 다기 세트를 선물로 보내온 분도 있고 돈을 보내온 분들도 있었다. 시의 힘이 이런 것인가 하고 행복감에 젖기도 했다.

▲노태맹

의대 제적되고 군대 갔다가 계명대 철학과에 들어가면서 시 쓰는 친구들을 만나게 된다. 이동엽, 김전한, 천병석 등 동갑내기 친구들을 만나면서 ‘시와 사회’라는 전혀 ‘사회’와 관계없는 시를 쓰는 친구들과 시동인을 만들고 팸플릿 동인지를 만들었다.

그들과 같이 지내면서 서로의 시를 논쟁적으로 발기발기 찢으면서 내 글이 조금씩 좋아진 것 같다.

이미 유명해진 동갑내기 친구 장정일은 질투의 대상이었다. 신춘문예에 글을 많이 보낸 기억은 없고, 어느 날 그동안 썼던 글을 지금의 아내가 타이프로 쳐서 ‘문예중앙’에 보냈는데 그게 당선이 되었다.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등단 전부터 평론을 쓰면서 장옥관, 박진형, 김재진, 송재학, 조기현, 엄원태, 정화진, 손진은 선배 등의 ‘오늘의 시’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시인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첫 시집 ‘유리에 가서 불탄다’(세계사)는 그런 대로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 잘 쓴 시집이어서라기보다는 ‘유리’라는 특이한 지명 혹은 은유가 도드라지게 머리 속에 각인된 탓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지금 읽어보면 지나치게 관념적이라는 생각도 드는데, 그 한계는 지금도 내가 깨쳐야 할 과제다. 그러나 모든 작품은 발표된 그 순간부터 작가의 것이 아니라면 그것도 그 당시의 나와 시대의 한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윤은희

대구교육대학교 평생교육원 문예대학 시창작반에서 울산대 중남미학과 구광렬 교수가 추천한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라는 책을 시창작의 교본으로 여기고 지금도 읽고 있다.

문창반 수업에서 하루는 구 교수에게 장편의 시를 선보이며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장편의 시를 쓰는 것이 가능한 것인지 물었다. 교수님은 “호흡이 긴 시,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라는 말로 시를 직면하는 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래서 세상에 나온 것이 무등일보 당선작 ‘아르정탱 안을 습관적으로 엿보다’였다. 그 시절 나에게는 시에 대한 뜨거움이 있었고 구 교수는 시 창작 분야에 있어서는 진정한 나의 스승이었다. 글을 쓰기 시작한 초기에는 호흡이 긴 시를 쓰고자 노력하였고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야 한다는 중압감이 마음 속에 큰 돌처럼 자리 잡고 있었다. 말하자면 한 편의 시가 완성되기까지 늘 자신을 삭정(削正)하라는 내적 언명을 키우고 있었던 것이다.

2009년 무등일보 신춘문예와 2011년 ‘시와 세계’로 등단했다. 그리고 올해 도서출판 지혜 첫 시집 ‘아르정탱 엿보다’가 나왔다. 내 시가 어렵다는 분들이 많았다. 나의 시 속에는 행간과 행간 사이의 함축적 의미, 비유, 상징과 은유, 이미지, 수수께끼를 미학적 전략으로 담지하고 있기 때문에 시 읽기에 어려움이 있어 윤독(輪讀)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내 작품의 특징은 시의 호흡이 길고 유장하며 희곡적 구성과 함께 고도의 풍자성을 나타내는 연극적 대사에 있다. 초기 페미니즘 계열 작품의 성격은 사회적 약자인 여성의 가난과 생존의 문제를 정치(精緻)하고도 핍진(逼眞)하게 묘사하였다. 전통적인 여성상의 파괴를 통해 내재된 억압과 차별의식을 제거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나는 지금 인구보건복지협회 대구경북지회 성폭력상담소에 근무하고 있다.

▲변희수

5년 전 영남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그때 아흔의 친정아버지께서 무척 좋아하셨다. 누워서 영남일보를 손톱으로 밑줄을 그어가며 끝까지 읽으셨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에 관한 시가 참 많았다. 왜 그런지 처음에는 스스로도 잘 몰랐다. 그러나 차츰 시를 쓰면서 나도 모르는 나의 대타자가 아버지였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가 용케 내 안의 불만과 욕망을 찾아서 달래주었다고 생각한다.

시는 내가 누군지는 몰라도 내 욕망이 무엇인지는 너무 잘 아는 것 같다. 나도 모르는 나를 시에서 발견할 때가 많다.

어떤 방식이든 등단이라는 절차를 밟지 않았다면 시를 계속 읽고는 있었겠지만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읽는 것과 직접 쓰는 것의 차이를 가름하는 것이 등단이라는 관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아직 시집을 내지 않았다. 등단 5년 차, 주위에서는 왜 시집 안 내느냐고 자주 묻는다. 남들은 소위 그렇고 그런 출판사에서 내고 싶어서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집 한 권을 내는 게 순전히 시의 일만이 아닌 뭐라고 할까, 시장의 일 같이 느껴지는 그런 것들이 있다. 일테면 비교하고 물색하고 부탁해야 하는 번거로운 느낌 때문에 차일피일 미루게 된다. 처음 원고 청탁을 받고 책이 왔을 때 나는 선뜻 봉투를 뜯어보지 못했다. 두려움과 부끄러움 때문에 용기가 필요했다. 활자화된다는 말은 아직도 겁이 난다. 글자가 살아있는 생물 같이 느껴진다.

글=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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