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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묵 부회장이 대표로 있는 <주>이케부쿠로교통의 모습. <<사>인문사회연구소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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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의 시대, 일제의 강제 징용과 압제로 인해 혹은 생존을 위해 일본행 배에 오른 조선인들. ‘대구·경북 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2부에서는 1부 사할린 한인에 이어 재일 조선인 2·3세의 삶을 소개한다. 1945년 일본이 패전한 뒤에도 그대로 남아 뿌리를 내린 이들은 일본 사회에서의 냉대를 묵묵히 견디며 한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간직하고 살아왔으며 마침내 ‘성공’했다. 눈물과 한으로 점철된 1세대의 삶을 거름 삼아 일본 사회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뿌리내린 2·3세대들을 통해 이제 우리는 새로운 희망과 미래를 읽는다.
엄한 가정교육이 차별 극복 힘 돼
마흔에 부친 택시회사 물려받아
20년만에 중견회사로 성장시켜
3년 전 작고한 부친 문경에 안장
한인 1세대 선친 삶 자서전 준비
◆한국 이름을 포기하지 않는 건 한국인으로서의 최소한의 자존심
김진묵 도쿄 경북도민회 부회장(62)은 일본에서 태어났다. 문경에 살고 있던 아버지 고(故) 김인석씨가 1939년 일본으로 건너간 뒤 지금까지 가문을 이어오고 있다. 김 부회장의 부친은 도시바와 같은 대기업에서 하도급을 받아 물건을 만드는 작은 제작소를 운영하던 중, 택시회사의 경영을 도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부친의 경영력을 눈여겨본 지인이 요청했던 것이다.
이후 그의 부친은 위기에 빠진 택시회사를 일으켜 세우는 데 공을 세웠고, 급기야 회사를 인수하기에 이른다. 4형제 중 장남인 김 부회장은 마흔 줄에 접어들 무렵 아버지로부터 회사를 물려받았다. 하지만 회사 규모는 크지 않았다.
당시 보유 택시가 10대 남짓이었던 회사는 김 부회장이 경영을 맡은 후 20여년 만에 109대를 굴리며 종업원 300명 정도를 둔 번듯한 중견회사(<주>이케부쿠로 교통)로 성장했다. 형제 중 두 명도 요코하마에서 택시회사를 경영하고 있다.
김 부회장의 부모님은 매우 엄했다. 장난기가 많았던 김 부회장은 매도 많이 맞았다. 단순히 철이 없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부모님은 한국 사람이 일본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차별을 견뎌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일본인과 대등한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서는 가정교육이 제대로 돼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고 말했다.
민족의식이 바탕이었다. 일본에 거주하는 많은 한인이 그러했듯이 김 부회장은 한국어로 된 ‘본명’을 그대로 썼다. 어차피 일본에서 살 거라면 한국 이름을 감출 필요가 없다는 게 아버지의 뜻이었다. 한국인으로서 가졌던 강한 자부심은 이방인에 대한 차별을 견디게 했지만 녹록지는 않았다. 김 부회장은 “학창시절 일본인 친구들의 부모가 나를 가리켜 ‘조센징’이라며 어울리지 말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무기’가 있었기에 일본 사회에 동화되기 쉬웠다. 김 부회장은 축구를 잘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계속했다”며 “축구를 잘했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스스로도 강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공부는 별로 못했지만…”이라고 수줍게 웃었다.
고교 때에는 조선학교와 축구경기를 할 기회도 있었다. 남북이 나뉘어 있는 외교적 상황에서 자칫 갈등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오히려 일본인 친구들이 이번 경기에만 일본 이름으로 나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말할 정도였지만, 그는 본명이 적힌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갔다. 일본 학교에 다니던 한국 국적의 학생은 조선학교 학생들과의 축구 경기에서 맹활약했다.
◆누구보다 한국인…귀화할 생각은 절대 없어
한인 2세들을 만나면서 궁금했던 것 중 하나가 ‘스포츠 경기에서 한-일전이 벌어지면 어디를 응원할까’였다. 친숙하면서도 민감한 주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번 취재 과정에서 만난 한인 대부분의 대답은 “당연히 우리나라(한국)”였다.
김 부회장은 본인의 정체성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확실히 일본인이 아니라는 건 분명하고… 주위 친구들(일본인)도 한국 사람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며 “간혹 귀화를 안 하냐고 묻긴 하지만, 일본에서 생활하는 데 문제가 없어서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말했다.
그는 한인들이 차별적인 상황에 종종 놓이지만 시간이 갈수록 나아지고 있다고 현재를 진단했다. 김 부회장은 “열심히 살아가는 한인들이 외국인이라는 차별 때문에 취업하지 못하는 문제는 반드시 해결돼야 한다. 심지어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시험을 치를 수 없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 부회장의 둘째아들은 일본 마이니치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다. 가나가와 지역에서 일하는 그의 아들은 기사 작성자의 이름과 e메일 등을 적는 ‘바이라인’에 당당히 본명을 쓰고 있다. 3년 전 돌아가신 김 부회장의 부친은 고향인 문경에 묻혔다. 평소 한국을 그리고 꿈을 꿨으며, 일본에 묻힌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고 한다. 아버지의 시신은 고향에서 상여꾼들이 전통의 예를 갖춰 모셨다.
김 부회장은 현재 선친의 자서전을 만들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일본에서 차별을 견디며 성공적으로 뿌리내린 한인 1세대의 삶을 정리하기 위해서다.
그는 “어머니가 3개월 전쯤 원고를 읽어보고는 어떻게든 완성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같은 생각”이라며 “자서전을 통해 돌아가신 아버지의 생각이 완성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려운 상황이지만 이 작업을 반드시 마무리짓겠다”고 강조했다.
백경열기자bky@yeongnam.com
※이 기사는 경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6-일본편’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공동기획: pride GyeongBuk, 경상북도, 인문사회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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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묵 도쿄 경북도민회 부회장의 모친 엄선남씨와 부친 고(故) 김인석씨가 주고받은 편지들. |
■ 키워드로 읽는 在日조선인의 삶-‘사랑’
김진묵 부회장 모친 엄선남씨 “남편은 스승이자 영원한 애인”
애틋한 사랑 손편지로 주고받아
일본에 살고 있는 한인 1·2세는 배우자 선택의 폭이 상당히 좁았던 것으로 보인다. 중매가 대부분이었는데, ‘국적 조건’이 걸려있었기 때문이다. 한인 남녀들은 흐릿한 사진 한 장에 가슴 설레며 만났고, 한 번 만남에 결혼까지 골인했다. 그나마 만나기라도 했으면 덜 억울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진묵 도쿄 경북도민회 부회장의 모친 엄선남씨(84)는 남편이 3년 전쯤 세상을 떠난 후 홀로 집을 지키고 있다. 그 역시 이러한 결혼 풍속도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엄씨는 “남편이 여러 번 선을 봤는데, 나는 한 번 만나고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다”고 회상했다. 한인 2세인 엄씨 역시 돈을 벌기 위해 아버지가 부산에서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지금에 이르렀다.
21세 꽃다운 나이에 결혼한 뒤 평생을 함께했지만 지금도 남편이 보고 싶다는 엄씨. 요즘 그는 결혼 초기 남편과 주고받았던 편지와 사진을 보며 회상에 젖곤 한다.
엄씨는 “결혼 직후 남편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도쿄로 올라가고, 나는 시골에 남았다. 6개월 정도 떨어져 있으면서 일주일에 한 통씩은 편지를 주고 받았다”며 “마침 그때 시력이 떨어져 앞이 잘 안 보이는 병을 앓았는데, 남편이 ‘힘을 내라, 살아가는 데 건강이 가장 중요하다’며 위로를 해주었다”고 말했다.
그때의 소중했던 기억 덕분에 지금도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고 있는 엄 씨는 틈 날 때마다 ‘손편지를 주고받으라’며 며느리들에게 얘기하곤 한다. 그는 “남편은 나의 스승이자 영원한 애인이다. 가장 존경하는 사람”이라며 “지금도 곁에 머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문경에는 돌아가신 김 부회장의 부친 묘비가 세워져 있다. 그 이름 옆에는 ‘엄선남’이라는 이름도 적혀 있다고 한다. 엄씨가 세상을 떠나면 합장을 하겠다는 의미다.
“내가 죽으면 함께 묻힐 겁니다. 이때 결혼 초기에 주고받았던 편지도 넣어달라고 했어요. 남편과 편지를 같이 읽으며 추억에 빠지고 싶거든요.”
글·사진=백경열기자 bky@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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