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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바람이 불어오면 대한민국 최대 황태 덕장이 있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 용대리 덕장에 갓 걸리기 시작한 명태는 내설악의 북서풍을 안고 3개월여 얼었다 녹기를 반복하며 황태의 꿈을 키워간다. <사진제공=인제군청> |
강원도 속초와 양양의 경계. 그 한겨울 바다 앞에 섰다. 첩첩한 바다의 흰 주름살. 그 위에 독수리의 부리로 앉은 해풍의 끝이 칼날같이 예리하다. 그 칼날이 볼살을 긋고 지나간다. 자판기 커피 한 잔을 만지작거리면서 비로소 겨울의 진면목을 만끽해본다. 다른 생명체는 다들 위축되는데 생선만은 광채를 보여준다. 생선도 겨울의 ‘방점’이다.
이 무렵 동·서·남해별 주전선수급 어패류가 있다. 서해는 단연 흑산도 참홍어. 남해는 벌교 참꼬막, 동해는 덕장에 걸린 황태와 과메기, 제주 해역에선 방어가 기운생동한다.
목포·광주권 사람이라면 여름엔 개도 안 먹는다면서 외면하는 홍어. 하지만 찬바람이 불면 대접이 달라진다. 홍어가 대화의 주제가 된다. 다들 군침을 흘리며 단골 가게에 자주 전화를 한다. 목포 사람이라면 한 번 정도는 꼭 흑산도산을 먹어준다. 한 접시에 최소 10만원 이상. 그래서 홍어파들끼리 모여 ‘홍어계’를 만들기도 한다.
흑산도 앞에는 다른 바다는 도저히 카피할 수 없는 천혜의 홍어 산란장이 있다. 현재 예리항에는 대동호 등 모두 6척의 홍어잡이 어선이 있다. 12월이면 산란을 위해 뻘바닥으로 접근하는 홍어. 이 놈들은 미리 깔아둔 80m 길이 주낙의 줄바늘에 걸려 생을 마감한다. 경매사들에 의해 6등급으로 분류된다. 8㎏ 이상이라야 고급이고, 요즘 40만원선에 거래된다. 국내 유통 홍어의 99%는 칠레 등 외국산이라 보면 된다. 흑산도 홍어는 워낙 비싸 짝퉁이 난무할 수밖에 없다. 이를 막기 위해 흑산도 수협이 세계 최초로 바코드를 부착했다. 정작 흑산도 토박이는 삭힌 홍어를 멀리한다. 그냥 잡은 그 상태로 회를 쳐서 먹는다. 물론 금방 잡은 홍어는 냄새도 없다. 여수권으로 가면 ‘꼬마 홍어’로 불리는 간재미를 무침회 스타일로 즐긴다.
삭힌 홍어는 개발된 게 아니고 ‘발견’됐다. 툭하면 노략질을 일삼는 왜구 때문이다. 목포 남서쪽으로 100㎞ 떨어진 흑산도. 한때 ‘공도(空島) 정책’에 의해 나주 영산포쪽으로 이주해야만 했다. 이때 배에 싣고 간 홍어가 나주까지 가는 과정에 저절로 삭혀졌다. 우연찮게 그 맛을 본 어민들이 상업화하기 시작한다. 청국장을 만들 듯 특제 항아리에 짚을 깔고 차곡차곡 재워넣어 지금의 홍어 스타일로 재가공한 것.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홍어의 유통은 거의 목포권에 한정됐다. 그런데 홍어 마니아인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재임 중 홍어 전도사 구실을 하는 바람에 전국화된다.
현재 목포~나주~광주는 한국 최대 ‘홍어벨트’. 목포시 옥암동에 가면 홍어로 유명한 두 식당이 있다. 한 곳은 토박이가 좋아하는 ‘금메달식당’, 다른 한 곳은 관광객이 북적대고 홍탁삼합 레시피를 개발한 ‘인동주마을’이다. ‘인동주’란 김대중 대통령의 고향인 하의도 명물인 인동초를 갖고 담근 탁주다. 겨울의 끝자락, 전남 서남해 사람들은 보리싹이 제법 길쭉하게 자라면 홍어 내장(애)에 된장을 풀고 보리싹을 넣어 ‘보리싹홍어애국’을 먹으면서 이른 봄을 친견하게 된다.
홍어와 대적할 어종은 단연 ‘명태’. 명태는 대한민국 최강 스토리텔링 어종이다. 그보다 더 많은 별명을 가진 생선도 없다. 본명은 명태. 본적은 고성군 거진항. 말리는 상태에 따라 노가리, 코다리, 북어, 황태…. 잡히는 시기, 잡는 방법, 가공방법에 따라 이름도 제각각. 봄에 잡으면 춘태(春太), 가을에는 추태(秋太), 겨울은 동태(冬太), 안 얼린 건 생태(生太), 얼린 건 동태(凍太), 그물로 잡아 올리면 망태(網太), 원양어선에서 잡은 것은 원양태(遠洋太), 근해에서 잡은 것은 지방태(地方太), 강원도에서 나는 것은 강태(江太), 낚시로 잡은 것은 조태(釣太)로 불렸다. 오래전 입맛 까다로운 미식가들은 생태 중에서도 낚시로 잡은 조태를 높이 쳐주고 ‘금태(金太)라는 별명까지 주었다. 강산에가 부른 노래 ‘명태’도 명태 족보를 꽤 잘 정리했다.
이 무렵이면 동해의 북단(인제군 북면 용대리)과 남단(구룡포)에선 두 종류의 덕장이 겨울을 더욱 야물게 만든다. 북단에는 ‘황태’, 남단에는 ‘과메기’가 해풍을 먹고 무럭무럭 자란다. 황태의 원전은 명태, 과메기의 원전은 청어와 꽁치다. 수온 탓인지 아쉽게도 이 세 어종은 더 이상 우리 해역에선 잡히지 않는다. 잡히는 데는 원양, 말리는 곳만 우리 땅이다. 이를 국내산이라 해야 할지 혼혈이라 해야 할지.
대구를 떠난 지 4시간30분 만에 대한민국 최대 황태 덕장 허브인 인제군 용대3리에 도착했다. 골바람이 어질어질 난분분하다.
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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