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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꽁치과메기 세상이지만 최근 들어 내장째 말린 통마리 청어과메기 수요가 일기 시작하면서 영덕군 영덕읍 창포리 등지에서 주도적으로 생산해내고 있다. |
1960년대까지 청어 넘쳐나던 영일만
1924년 겨울엔 두달새 5천만마리 어획
이후 자취 감추며 꽁치 과메기로 대체
토박이는 통째 짚에 엮어 말린 ‘통마리’
유통량 95%는 내장·뼈 빼낸 ‘배지기’
벌교 아낙들이 찬 뻘 헤치며 캐낸 꼬막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 덕에 스타로
껍데기 주름수로 참·새·피꼬막 구분
21골에 털 없고 쫄깃한 참꼬막 맛 으뜸
해안 뒷산이 너무 높으면 찬공기가 먼 바다로 그대로 도망가버린다. 구룡포에는 낮은 구릉이 자리 잡아 자연스럽게 해안으로 불어내려 온다. 구룡포 해안은 하정에서 호랑이꼬리(대보)까지 평균 해발이 100m, 가장 높은 곳도 150m밖에 안 된다.
늦가을까지 구룡포에는 북동풍(샛바람)이 분다. 11월20일~2월말 바람이 북서풍으로 바뀐다. 이때 북서풍의 양은 90% 정도. 당연히 이 시기를 잘 이용해야 된다. 어떤 이들은 꽁치를 무작정 햇볕에 말리는 줄 아는데 그렇지 않다. 잘못하면 오징어처럼 딱딱해져 전혀 먹을 수 없다. 황태 같은 경우는 녹고 얼기를 반복시키기 위해 옥외 건조대에 그대로 둬야 되지만 과메기는 기온이 영하권으로 떨어지는 밤에는 적당한 조건이 맞춰진 건조장으로 옮겨야 된다.
냉동 꽁치가 들어오면 잘 녹이고 세척도 세밀하게 해준다. 세척은 세 번한다. 바닷물에 한 번, 바닷물과 민물을 섞은 기수에 또 한 번, 마지막엔 민물에서 마감세척을 한다. 다음에는 건조대에 600~800마리를 널어준다. 이것도 기술이다. 반으로 가른 꽁치의 등이 안으로 오도록 널어준다. 대나무 막대에 20마리 한 두름을 널며, 이때 간격은 5㎝. 잘못 널면 세찬 하늬바람에 흔들려 서로 붙어버릴 수 있다. 종일 건조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보통 1~10℃ 쾌청한 날 해가 뜰 때부터 일몰 한 시간 전까지 말린다. 다음엔 2박3일간 건조장으로 옮겨 말려 준다. 꽁치 안에 축적된 기름을 20% 정도 밖으로 배출시켜야 된다. 이것도 기술이다. ‘진강수산’에서는 복고식 건조방식을 고집한다. 연탄불로 내부 온도를 맞춘다.
구룡포에서도 14년 전부터 러시아 쿠릴열도 부근에서 잡아온 냉동원양꽁치를 사용한다. 포항 본토 사람들은 내장과 뼈를 제거하지 않고 꽁치를 통째로 짚으로 묶어 조기처럼 말려 먹는데 이를 ‘통마리’라고 한다. 유통되는 과메기의 95% 이상은 ‘배지기’다. 배지기는 도시 소비자를 위해 특별하게 만든 스타일. 내장과 뼈를 발라내고 꽁치를 반으로 갈라서 말려낸 것이다.
◆영덕 청어 과메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영덕, 포항 일대는 청어로 흘러넘쳤다. 청어떼가 해안까지 밀려와 맨손으로 줍기도 했다. 포항의 구룡포 남쪽 구만리 앞 해변은 ‘까꾸리께’로 불렸다. 바닷바람과 파도에 떠밀려 온 청어를 갈쿠리로 주워담았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단다. 1924년 영일만의 청어 어획이 겨울 두 달 새 5천만마리였다고 보도되기도 했다.
60년대말 이후 동해안 일대에서 청어가 사라져버렸다. 그나마 간간이 잡히는 것들도 모두 일본으로 수출됐다. 그렇게 청어로 만든 과메기는 우리 곁에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청어가 사라지자 업자들은 대체품으로 꽁치를 택했다. 영덕 강구 해안길을 따라 북으로 조금 올라가면 자그마한 어촌인 영덕읍 창포리 창포마을이 보인다. 14년 전부터 ‘청어과메기마을’로 불린다. 창포마을은 예전 청어잡이로 흥청거렸던 어항이다. 여기서 풍차횟집을 운영하는 유외종씨가 청어 과메기를 처음 복원시켰다.
창포마을 청어 과메기는 구룡포 과메기와는 만드는 법부터 다르다. 영덕 앞바다에서 잡은 청어를 옛 방식 그대로 두름으로 꿰어 바닷가 쪽에 널어놓는다. 보통 한달여 말린다. 창포마을은 예로부터 바람이 푸짐했다. 영덕의 풍력발전기가 창포마을 뒷산 쪽에 세워진 것도 이런 연유. 마을엔 대형 과메기 건조장이 따로 없다. 마을 해안도로 앞에 2~3가구가 4~5m 길이의 건조대를 세우고 청어를 널어놓았는데 양은 그리 많지 않아 보인다.
구룡포에도 청어과메기파가 있다. 호미곶 등대 옆 마을인 강사리에 가면 과메기 공장인 ‘일출과메기 건조장’이 있다. 일명 ‘과메기 아지매’로 불리는 최숙자씨가 짚을 사용해 청어과메기를 생산한다. 구룡포에 가면 권선희 시인이 산다. 그녀는 ‘청어 시인’으로 통한다. 그녀가 흥미로운 시 하나를 품었다. ‘매월 여인숙’이란 시다. 청어 마니아인 매월당 김시습을 염두에 둔 것이다. 매월당은 한때 포항 대보면의 월명사에 머물렀고 청어 과메기를 즐겼다. 방랑길에 오를 때면 허리춤에 된장떡과 말린 청어를 차고 다녔고 물고기에 된장을 발라 구워먹었다고 한다. 어숙권의 ‘패관잡기’에는 세조가 원각사에 재실을 짓고 승려 김시습을 불렀을 때 왕 앞에 누더기옷을 입은 그의 품 안에서 말린 청어 한 마리가 툭 떨어지는 바람에 세조가 기겁을 했다는 얘기가 있다. 포항 과메기에 대한 풋풋한 스토리는 남빈동 ‘해구식당’에 가야 제대로 들을 수 있다. 허름하지만 토박이들이 좋아하는 곳이다. 칠순의 지영자씨는 친정아버지 때문에 과메기를 안주로 팔기 시작하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벌교 꼬막…‘태백산맥’을 읽다
벌교에 처음 내리면 녹물 머금은 양철지붕이 생각난다. 그리고 여인숙으로 숨어든 탈주범의 파리한 손가락이 어른거린다. 여느 어촌은 도회지풍으로 변색되지만 아직 뱃사람의 비린 냄새가 잘 보존돼 있다. 벌교를 답사하다 보면 홍교를 비롯하여 역사적인 몇 개의 다리를 만날 수 있다. 보물 304호로 지정된 홍교는 원래는 폭 4m, 길이 80m의 기다란 돌다리였다. 홍교가 세워지기 전에는 그 자리에 뗏목을 이어 만든 다리가 있었다. 벌교란 지명도 ‘뗏목다리’에서 비롯됐다.
꼬막은 멀게는 남해 사천만에서 서해 아산만까지 넓게 분포돼 있다. 왕중왕급 꼬막은 단연 벌교 꼬막이다. 솔직히 꼬막 맛이야 다 비슷하지만 벌교 꼬막을 킹카로 만들어 준 사람은 소설가 조정래. 그가 한길사에서 1986~89년 출간한 대하소설 ‘태백산맥’ 덕분에 꼬막은 벌교 대표 관광상품으로 등극한다. 소설이 갓 출간됐을 때 꼬막은 표준어가 아니었다. 국어사전에는 ‘고막’으로 적혀있었다. 출판사측이 표준어를 써야 되기 때문에 고막으로 바꾸자고 해도 절대 안 된다고 작가는 고집했다. 결국 모든 신문이 꼬막이라고 쓰기 시작한다. 나중에 사전도 꼬막을 인정하게 된다. 덕분에 해산물 중에서는 최초로 2009년 수산물 지리적 표시 전국 1호로 등록된다.
보성군은 전남의 남쪽 가운데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육지 끝인 바다에는 두 개의 만이 있다. 하나는 서쪽 장흥군과 화순군에 동쪽은 고흥군에 있는 그 사이에 득량만이 닿아 있다. 또 한쪽은 순천시, 남쪽은 고흥군과 사이에 여자만이 있다. 벌교와 순천, 고흥과 여수로 둘러싸인 이 거대한 바다를 여자만 혹은 순천만이라 한다. 여자만 갯벌은 모래가 섞이지 않은 데다 오염되지 않아 2005년 해양수산부는 남한 최고 갯벌로 발표했다.
벌교꼬막 중 가장 주목받는 건 장도(獐島) 꼬막. 장도는 ‘한국 꼬막 1번지’로 불린다. 벌교읍 장암리 포구에서 남동쪽으로 3.8㎞ 해상에 위치한 장도는 원래는 여수군 돌산면에 속하였으나 고흥군 동강면에 편입되었고 83년 보성군 벌교읍에 편입된다. 장도는 여러 섬으로 쪼개져 있는데 유인도는 3개다. 여기 어촌계에 200여가구가 있다. 가구당 최소 2대 이상의 뻘대(널배)를 갖고 있다. 스키처럼 생긴 이 배를 타고 갯벌을 돌아다닌다. 현재 김영환씨가 뻘배 제작전문가. 대당 가격은 18만~20만원. 벌교에서 ‘뻘박사’로 불리는 동진수산 장동범 사장은 오래 벌교 꼬막을 전국에 유통시키고 있다.
◆피눈물 묻은 뻘배
커피에 열대 아이들의 피눈물이 묻어 있듯, 꼬막에는 벌교 아낙들의 땀이 섞여 있다. 길이 2m, 폭 50㎝ 정도 되는 뻘배에 채를 걸어 갯벌을 훑으며 꼬막을 걷어 올린다. 이 뻘배는 성인 남성도 몰기 쉽지 않다. 여자만 뻘이 너무 부드러워서 바다 쪽으로 조금만 나가도 발이 점점 깊이 빠진다. 중심도 잡을 수 없고 속도를 내기 어렵다. 아낙네들은 10m 정도 걸어가다가 갯벌이 푹푹 빠지기 시작하는 곳에서 뻘배 위에 몸을 싣는다. 왼 무릎은 널배 위에 마련한 ‘똬리’(짚이나 스티로폼)에 올리고 노 같은 오른발로 갯벌을 헤짚고 다닌다. 마른 갯벌을 지나 물이 정강이쯤 차오르는 곳에 이른다. 2㎞정도 나가야 꼬막을 캐는 작업을 할 수 있다. ‘천신만고 꼬막’이 아닐 수 없다.
꼬막은 참꼬막·새꼬막·피꼬막으로 나뉘는데 그중 껍데기의 골이 깊게 패인 참꼬막의 맛이 가장 뛰어나다. 주름 같은 ‘방사늑(放射肋)’ 수로 구별하면 된다. 이 골의 모양새가 기왓골을 닮았다 하여 ‘와농자(瓦壟子)’로도 불린다.
참꼬막은 주름이 21골, 새꼬막은 31골, 피꼬막은 41골이다. 참꼬막은 갯벌 아래 3~5㎝에 박혀 있다. 대다수 양식꼬막이다. 자연산 종묘에 의해서만 자라고 가을철에 자연 발생한 종묘를 살포한 후 3~5년 키워 채취한다. 참꼬막은 표면에 털이 없고 졸깃졸깃한 맛이 나는 고급 종이고 제사상에 올려져 ‘제사꼬막’이라고도 한다. 이에 비해 껍데기 골의 폭이 좁으며 털이 나 있는 새꼬막은 조갯살이 미끈한 데다 다소 맛이 떨어져 하급품 ‘똥꼬막’이 되었다.
잡는 방법에도 차이가 있다. 참꼬막은 갯벌에 사람이 직접 들어가 채취하는 반면 새꼬막은 배를 이용하여 대량으로 채취한다. 완전히 성장하는 기간도 참꼬막은 4년이 걸리지만 새꼬막은 2년이면 충분하다. 이러한 이유로 참꼬막이 새꼬막에 비해 서너 배 비싸다.
꼬막은 다른 조개와 달리 익고 나서도 입을 꽉 다물고 있다. 이때 위 뚜껑과 아래 뚜껑이 맞물린 이음 사이에 숟가락을 들이밀어 지렛대처럼 젖히면 쉽게 열 수 있다. 열린 꼬막 속에는 주황색의 살과 함께 불그죽죽한 물이 고여 있다. 특별한 간을 하지 않아도 간간하고 감칠맛이 난다.
벌교읍에 수십 군데의 전문 식당이 있다. 불과 20년전만 해도 없었던 꼬막정식. 이젠 한 집 건너 한집이 그걸 판다. 대다수 관광식당급이라 생각하면 된다. 여행작가들은 임권택 감독이 태백산맥 영화 촬영 때 대놓고 밥을 먹었던 ‘국일식당’, 제철의 맛이 담긴 ‘제일식당’ 등을 애용한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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