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우석의 電影雜感 (전영잡감) 2.0] ‘#영화계_내_성폭력’을 아시나요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7-01-13   |  발행일 2017-01-13 제43면   |  수정 2017-01-13
20170113
20170113

유명 웹툰작가·문단 성폭력사건 이어
배우 김윤석의 성희롱 발언 논란 등
10여년 기웃댄 영화계도 추악한 민낯

현재진행형인 사건 위중함 비춰보면
술자리서 촬영감독의 女스태프 추행
보고도 더 단호히 못한 과거 부끄러워

해가 바뀌고 며칠이 지났건만 전혀 새해라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나만 그런가 싶어서 주위에 살펴봤더니 비슷하게 느끼는 이들이 꽤 되는 모양이다. 바로 지난해 9월 말부터 쏟아지기 시작한 이른바 ‘박근혜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사건’ 관련 소식 때문이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전국 수백만명의 ‘깨어있는 시민’들이 든 촛불 덕에 대통령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되긴 했지만 헌법재판소에서 아직 인용이 되지 않은 탓에, 뭔가 2016년 열두 달에 몇 개월 더 붙여 살고 있는 기분이다. 어서 헌재에서 최종 인용되고 ‘독재자의 무능한 딸’이 내려오는 걸 봐야 2017년 정유년을 온전히 맞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무튼 지난해 말부터 지금까지 이 전대미문의 사건이 블랙홀처럼 다른 사건을 죄다 잡아먹은 탓에 시민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하고 있는 사건이 꽤 있는데, 바로 ‘#영화계_내_성폭력’ 사건도 그 가운데 하나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SNS를 통해 드러난 이 사건에 앞서 몇몇 유명 웹툰 작가의 성폭력 사건이 있었고, 이어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로 문학계에 숨겨져있던 추악한 민낯이 속속 드러났다. 거기엔 문학에 관심 없는 이들도 알 만한 중견 소설가의 이름도 있었고, 메이저 문학 전문 출판사의 시집 시리즈에 이름을 올린 시인들의 이름도 보여서 충격이 컸다. 동네책방을 운영하는 입장에선 이 ‘문제적 작가들’의 책을 발본색원해 폐기처분해야 하나, 아니면 부끄러운 역사 사료로 남겨놓아야 하나 고민하게 되었다. 언젠가 슬쩍 끼어든 문학행사의 지역 작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귀동냥으로 들은 바로는, 그 작자들이 저지른 사건들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있어 놀랐다. 그것도 보수적인 지역에서 진보적인 문학 운동을 한다는 이들이 모인 단체에서 들은 얘기라 충격이 더했다.

이어 터져나온 ‘#영화계_내_성폭력’ 사건들은 10년 넘게 소위 ‘이 바닥’을 기웃거렸던 이로서 참담함의 연속이었다. 최근 ‘성희롱 발언 논란’에 대해 공식 사과한 배우 김윤석과 여배우와는 사전협의하지 않은 채 남배우에게만 ‘난폭한’ 강간 연기를 지시한 모 감독에게서 볼 수 있듯, 사건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현재진행형이다. 영화 주간지 ‘씨네21’에서 연속으로 진행하고 있는 관련 대담은 생생한 사례를 매번 담아 사건의 위중함을 상기시킨다. 꼭 찾아서 읽어보길 바란다.

이번 사태로 돌아보니 나 역시 직접적인 사건의 현장에 있었던 적이 있었다.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아는 선배가 새로 들어가는 단편영화에 조연출로 참여했다. 여느 때처럼 촬영을 마치고 후반 작업을 하던 어느 날, 고생한 배우들과 스태프가 한자리에 모여 저녁을 겸한 술자리가 있었다. 그때 불콰하게 취한 촬영감독 형이 당시 의상을 담당했던 여성 스태프가 입은 티셔츠 앞섶을 당겨 오바이트를 하려는 행동을 했다. 물론 그 형은 장난으로 한 것이었지만, 명백한 성추행이었다. 여성 스태프는 어쩔 줄 몰라 했고 어색한 자리가 조금 이어지다 모두 헤어졌다. 부끄러운 기억이다. 그때 나는 좀 더 단호했어야 했다. 반성하고 반성한다.

지난달 6일에 열린 ‘2016 서울독립영화제 토크포럼’ ‘#STOP_영화계_내_성폭력: 영화계 성평등 환경을 위한 대안 모색’에 참석한 신희주 감독(‘폐함’ ‘형광인종’ 연출)의 발표에 따르면, 성폭력 피해로 영화계 활동을 포기했다고 밝힌 여성이 무려 15%나 된다고 한다. 신 감독이 조사한 77건의 사례 가운데 “성폭력으로 인해 영화계의 커리어를 포기했다”고 밝힌 여성은 모두 12명이었다. 이 결과에 대해 신 감독은 “조사 대상을 확대해 영화계 성폭력 피해 양상에 대한 통계자료를 만들어야 할 사유로 충분하다”며 “영화 산업 발전 저하와 관련이 있는지도 연구해야 한다”고도 했다.

가해자를 직업별로 분류한 것을 보면 영화 촬영 현장의 남성 다수가 가해자(2차 가해 포함)인 사례가 20건으로 가장 많았다. 또 촬영·조명팀 스태프가 가해자인 경우가 18건으로 뒤를 이었다. 이어 감독 15건, PD·제작팀 스태프 6건, 배우 6건, 영화과 동기 6건, 영화과 교수 4건, 평론가 3건, 음향팀 스태프 3건, 배우 매니저 2건, 편집팀 스태프 1건 순이었다.

신 감독은 “문화·예술계 대다수 성폭력이 교수와 학생, 작가와 지망생 관계 등 위계를 기반으로 발생하는 것과 달리 영화계 성폭력은 대부분 현장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사이에서 일어났다”며 “이는 한국 영화 산업 현장이 스태프의 역할과 중요도에 따라 계급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줌과 동시에 영화 현장의 도제 시스템이 아직 남아있다는 증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주장이다.

지난해 티셔츠 한 장으로 촉발된 ‘메갈리아 사태’와 많은 여성을 절망과 공포에 빠뜨렸던 ‘강남역 살인 사건’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SNS에서는 해시태그 ‘#살아남았다’를 달고 일상 속에 만연해있던 성범죄 피해 사실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페미니즘 논쟁이 끊이지 않았고, 페미니즘 서적들은 속속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영화계_내_성폭력’뿐 아니라 문단, 기자, 미술 같은 여러 업계마다 암암리에 묻혀왔던 성폭력 사건들이 폭로되었다. 대통령 탄핵을 이룬 광화문 촛불집회에서도 여성의 목소리가 꾸준히 이어졌고, ‘여혐’ 가사로 DJ DOC의 공연이 무산되면서 여성 비하 발언들이 광장을 메우지 않도록 하는 새로운 일도 잇따랐다. 쉴 새 없이 쏟아진 여성의 목소리들이 새로운 모습으로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2016년은 ‘페미니즘 원년’이라 부를 만하다.

이런 폭로와 고발이 가능해진 이유는 단연 SNS의 힘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것들을 넘어 실질적인 법과 제도의 개선으로 나가야 하지 않겠는가. 지금도 주말마다 광장에서 촛불을 밝히고 있는 시민들이 단순히 정권 하나만 바뀌길 바라는 건 아닐 것이다. 이번에야말로 다른 세상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새해에는 헌해들과 다른 세상을 꿈꾸자, 꿈꿔보자.

독립영화감독, 물레책방 대표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위클리포유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