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자 스토리가 있는 청도로… .1] 이서면 흥선리 금호서원과 명장 이운룡(李雲龍)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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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10   |  발행일 2017-10-10 제13면   |  수정 2017-10-10
이순신이 후계자로 꼽은 천재전략가…옥포해전·한산대첩 또다른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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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군 이서면 흥선리 금호서원은 청도 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식성군 이운룡 장군을 배향하고 있다. 이운룡 장군은 옥포해전, 한산대첩을 비롯한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워 이순신 장군이 후계자로 지목할 만큼 명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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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아하지만 강인한 무인의 기품이 서려있는 이운룡 장군 영정. 후손들에 따르면 영정 속의 이운룡 장군이 오른쪽으로 살짝 돌아앉아 있는 이유는 전투 중 다친 귀를 가리기 위해서라고 한다.

청도는 경북을 대표하는 ‘문화관광 1번지’로 손꼽힌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유서 깊은 역사가 어우러져 사계절 내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무엇보다 사람살이와 함께한 무수한 이야기가 고개를 넘고 깊은 들판을 따라 하염없이 펼쳐진다. 스토리의 보고(寶庫)로 불려도 손색이 없는 곳이 바로 청도다. 청도의 문화관광명소는 시간과 스토리가 만들어낸 품위있는 명작과도 같다.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역사적 서사들이 화석처럼 박혀 있다. 특히 청도의 역사 속에 깃든 올곧은 정신문화는 시대와 지역을 구분하지 않고 독특한 유·무형의 자산으로 자리잡고 있다. 자연과 역사, 문화가 공존하는 여행을 꿈꾼다면 청도를 강력 추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영남일보는 청도군과 공동으로 청도의 무수한 이야기가 깃든 문화관광 명소를 소개하는 시리즈 ‘떠나자! 스토리가 있는 청도로…’를 연재한다. 시리즈 1편은 이순신 장군이 후계자로 꼽은 명장 이운룡(李雲龍)의 이야기를 다룬다. 청도에서 태어난 이운룡 장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균을 설득해 이순신과 연합함대를 구성,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장군이다. 특히 한산대첩에서 학익진 전법이 성공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천재전략가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은 비록 자신의 경쟁자인 원균의 부하였지만, 이운룡의 자질과 됨됨이를 알아보고 후계자로 꼽기도 했다.

 1584년 22세에 별시 합격 ‘무장의 삶’
두만강 섬 파견근무때 이순신과 조우

도망칠 궁리 경상우수사 원균 붙잡고
전라좌수사 이순신 옥포 출전도 설득

배 6척 지휘 한산섬으로 倭 수군 유인
전대미문 ‘학익진’ 성공 결정적 역할

#1. 푸른 용 하나 땅으로 내려오니

1562년, 청도 매전면 명대마을(현 온막리)에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남해현령 이몽상(李夢祥)의 집에 아들이 태어난 것이다. 이몽상은 아이의 이름을 운룡(雲龍)이라고 지었다. 무인 집안의 자손답게,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용처럼 영웅이 되기를 바란다는 뜻에서였다. 하지만 이몽상은 아들의 성장을 오래 지켜보지 못했다. 죽음이 너무 빨리 찾아온 때문이었다. 이후로 이운룡은 아버지의 명예와 어머니를 위해 학업은 물론, 무예 수련에도 최선을 다했다.

이운룡이 스물두 살에 이르렀을 때였다. 별시(別試, 임시과거)가 치러진다는 방이 붙었다.

“나라의 운수가 형통하지 않다. 북쪽은 오랑캐가, 남쪽은 왜적이 늘 근심이다. 특히 북도(北道, 함경도와 평안도)는 국경의 일이 매우 중요하다. 무사 수백을 뽑아 배치하여 만일에 대비해야 한다.”

선조의 어명에 의한 과거였다. 이운룡은 결연한 걸음으로 도성을 향해 출발했다. 그때가 1584년(선조 17) 음력 8월, 가을이 막 시작되던 무렵이었다. 그리고 17일 ‘만력12년갑신추별시문무방목(萬曆十二年甲申秋別試文武榜目)’이 모화관에서 시행됐다. 시험관으로는 병조판서 이준민, 지중추부사 강섬, 지중추부사 유훈, 승정원우승지 임국로, 상의원정 남궁지, 내자시정 임추, 성균관사성 이준 등 고위관료들이 대거 나타났다. 이어서 사흘 뒤 합격자가 발표되었다. 문과에서 10명, 무과에서 202명이 통과한 가운데, 이운룡도 병과(丙科) 85위에 이름을 올렸다. 드디어 무장으로서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2. 녹둔도에서 이순신을 만나다

1587년(선조 20), 이운룡은 선전관의 신분으로 북방에 파견되었다. 사슴섬이라 불리던 녹둔도(鹿屯島)였다. 지금은 러시아 땅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녹둔도는 함경북도 경흥 두만강 하류의 작은 섬이었다. 하지만 국경지대에 인접한 전략적 요충지이자 최전방 요새였다. 당연히 수많은 군사들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그곳에 이순신도 있었다. 이순신은 조산만호(造山萬戶) 겸 둔전관이었다.

당시 녹둔도에는 둔전이라는 땅이 있었다. 식량보급이 여의치 않은 탓에 군사들이 자급자족하기 위해 일군 땅이 바로 둔전이었다. 그런데 이 둔전을 여진족이 늘 눈독 들였다. 아니나 다를까, 백성들이 추수를 위해 이동하던 날 적들이 급습해왔다. 11명의 군사가 죽고 15필의 말을 빼앗겼으며, 160여명의 군사와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다. 특히 죽은 이들의 처참한 광경은 형용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여러 대의 화살을 맞기도 하고 칼날에 얼굴이 베어지기도 하였으며 심지어는 머리가 잘리고 눈알이 뽑혔습니다. 피가 땅을 뒤덮었고 뼈가 모래와 자갈밭 위에 널려 있었습니다.”

격분한 조선군은 보복전을 전개했다. 당시 녹둔도를 관할하던 경흥부 부사(府使) 이경록과 이순신이 선봉에 나섰다. 이운룡 역시 전투에 나서 60여명의 포로를 구출해냈다. 이운룡과 이순신이 서로의 됨됨이를 알아보게 된 계기였다. 두 명장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 이운룡은 1589년 정월에 옥포만호(玉浦萬戶)로 임명받아 임지로 향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약 3년 전이었다.

#3. 임진왜란의 첫 승전보, 옥포해전의 전략가

“지금 어디를 가십니까?”

바윗덩이가 굴러 떨어지듯 무거운 목소리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놀라 멈추었다. 돌아보니 옥포만호 이운룡이었다. 급작스러운 부하의 등장에 원균은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운룡은 기가 막혔다. 왜적이 부산에 접근했다는 소식에 경상좌수사 박홍이 도망간 것도 모자라, 자신의 직속상관인 원균까지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있었다. 이운룡의 목소리가 떨렸다.

“배와 무기를 바다로 밀어 넣으셨다 들었습니다.”

“적의 기세가 심상치 않다. 결국 빼앗길 것이 분명한데 그 수밖에 없지 않느냐.”

뿐이 아니었다. 1만여명에 달하는 군사도 이미 흩어버린 뒤였다. 원균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적은 대군이다. 결코 우리 힘으로는 대적할 수 없을 것이다.”

이운룡이 무릎을 꿇었다.

“우수사께선 남해바다를 책임진 무장이십니다. 남해바다가 어떤 곳입니까. 충청도와 전라도의 방어선입니다. 이곳을 잃는다는 것은 곧 두 도를 잃는 것이요, 그것은 곧 나라를 저들에게 내어준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배신입니다.”

“그럼 이 상황에서 날더러 어찌하란 말이냐.”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십시오.”

원균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이순신과는 경쟁관계인데 거기에 도움을 요청하라니, 명예는 둘째 치고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운룡의 간곡한 상황 설명에 원균도 더 이상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원균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이운룡이 득달같이 이순신에게 파발을 띄웠다.

그런데 처음에 긍정의 답변을 주었던 이순신이 얼마 뒤 뜻을 번복해왔다. 경상우수영의 처참한 지경을 뒤늦게 파악한 것이다. 23척의 판옥선으로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원균에 대한 신뢰가 바닥이었다. 이운룡은 포기할 수 없었다. 전장을 떠날 수 없는 몸이었기에 율포만호(栗浦萬戶) 이영남을 대신 보내며 설득의 말을 단단히 일렀다. 이영남이 부리나케 여수로 향했다. 그리고 이순신 앞에 고개를 숙였다.

“적의 전력이 모두 육지에 집중돼있는 데다, 우리 수군을 우습게 보고 노략질에 정신이 팔려 있는 상황입니다. 지금이 아니면 그들을 칠 기회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순신이 장검의 머리를 이영남에게 내밀었다. 출전의 의미였다. 원균의 부하이기는 해도 이운룡만큼은 믿겠다는 뜻이었다. 이로써 1592년 음력 5월4일(6월13일) 새벽,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비전투용 어선) 46척으로 이루어진 이순신 함대가 경상도 앞바다에 당도했다. 그리고 이틀 뒤, 원균과 이운룡이 판옥선 1척을 타고 와 합류했다. 다른 장수들이 판옥선 3척과 협선 2척을 끌고 달려와 합세했다. 이운룡과 이순신은 형형한 눈빛만을 교환했을 뿐, 전술 외에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다.

다음날인 음력 5월7일, 신기전(神機箭, 로켓추진화살)이 날카로운 소리를 뿜으며 하늘을 갈랐다. 이어서 북소리와 함께 이순신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군사들을 아울렀다.

“가볍게 움직이지 마라. 침착하라. 태산같이 무겁게 행동하라.”

이운룡의 선봉하에 조선수군은 퇴로를 봉쇄하고 포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적선이 굉음을 내며 하나둘씩 깨져나가기 시작해 순식간에 50여척이 격침되었다. 반면, 아군의 피해는 가벼운 부상자 하나가 다였다. 승리의 함성이 너울과 함께 일었다. 임진왜란 들어 첫 승전보를 올린 옥포해전이었다. 이운룡이 이순신을 설득하지 않았다면, 결코 생겨나지 않았을 승전보이기도 했다.

#4. 이순신의 후계자, 한산대첩 승리를 이끌다

한산대첩을 앞두고 이운룡이 이순신을 찾았다. ‘학익진’이라는 전대미문의 전술을 생각해놓고도 고민이 깊다는 것을 알고서였다.

“좌수사를 괴롭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순신은 이운룡이 비록 경쟁자의 부하이지만 선선히 대답했다. 그의 성정과 됨됨이를 믿어 의심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지금 거제도에 진을 치고 있는 적들을 유인해내려면 견내량을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장수가 있어야 한다. 한데 나와 우리 부대는 견내량을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경상도 바다를 며칠 사이에 파악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운룡이 대답했다.

“제가 나서겠습니다. 적의 수군을 견내량 밖으로 끌어낼 자신이 있습니다.”

이순신이 이운룡의 어깨에 두툼한 손을 얹었다. 자신의 부하였다면 얼마나 든든하랴 싶었지만, 입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1592년 7월8일, 바람이 잦아든 견내량의 바다 위를 이운룡이 지휘하는 6척의 배가 약 올리듯 살살 휘젓고 바로 빠져나왔다. 예상대로 왜군전함 73척이 으르렁거리며 쫓아오기 시작했다. 이에 사전에 약속한 대로 대기하고 있던 조선함대 56척이 이운룡의 6척과 함께 한산섬 앞쪽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상죽도와 하죽도에 다다른 순간이었다. 신기전이 다시 한 번 하늘을 갈랐다. 곧이어 두둥 둥, 두둥 둥, 뱃소리가 천지를 뒤흔드는 것과 동시에 조선전함들이 일제히 뱃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신속하게 반원형을 그려가며 학익진을 만들었다.

난데없는 전술에 왜적의 수군은 갈팡질팡하다가 꼼짝없이 갇혀버렸다.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47척이 불에 타고 12척이 붙잡혔다. 고작 7척만이 도망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5만6천여 수군 중 4만여명이 목숨을 내놓았다. 하지만 조선수군 측의 손실은 전사자 19명에 부상자 114명이 전부였다. 대승이었다. 감격과 희열이 바다를 휩쓸고 지나갔다. 이를 기점으로 조선은 남해바다를 되찾을 수 있었고, 전쟁의 승기도 되살릴 수 있었다.

이순신은 이운룡을 아끼고 또 아꼈다. 1596년(선조 29), 경상좌수사에 이운룡을 천거할 때 “비록 내 부하는 아니나, 내게 후계자를 말하라 하면 기꺼이 이운룡을 들겠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선조도 그 공을 높이 샀다. 1604년(선조 37)에 “선무공신(宣武功臣)으로 삼고 초상화를 그려 후세에 길이 남기라. 또한 직위를 1계급 올리되, 부모와 처자도 같이 올리라. 아울러 녹(봉급)을 큰아들이 세습하도록 하여 영원토록 도우라”고 명을 내렸다. 나아가 이운룡은 1605년에 내직으로는 도총부부총관과 비변사당상관을, 외직으로는 삼도수군통제사에 임명됐다. 1607년에는 식성군(息城君)에 봉해졌고, 사후에는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임진왜란 참전 당시를 기록했던 ‘식성군실기(息城君實記)’ 2권이 전해진다.

이운룡 장군은 청도군 이서면 흥선리 금호(琴湖)서원에 배향되어 있다. 서원은 지방 유림이 이운룡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해 1814년(순조 14)에 창건했다. 금호서원은 이운룡 장군의 출생지인 지금의 청도군 매전면 온막리 명대마을에 상충사(尙忠祠)를 세운 것에서 시작됐다. 1814년 청도군 이서면 금촌리에 이건하면서 서원으로 승격됐다. 1871년(고종 8)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고 강당만 지금의 자리인 흥선리 대월산 기슭으로 이건했다. 이후 1947년 이운룡 장군의 후손과 유림의 발의로 지금의 서원을 중건해 봄과 가을에 제사를 모시고 있다. 장군의 영정은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문헌=‘조선왕조실록’, 이재호의 논문 ‘임란 수군과 이운룡 장군’, 고진숙 저 ‘이순신을 만든 사람들’, ‘디지털청도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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