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명진의 정치풍경] 협치수박

  • 임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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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07-26   |  발행일 2018-07-26 제30면   |  수정 2018-10-01
20180726

1981년 여름에 있었던 일입니다. 전두환 정권이 ‘5·18 쿠데타의 힘’으로 들어선 지 한 해가 지났습니다. 대학 3년생이었던 필자는 지적 탐구와 자기 계발이 아니라 전두환 군부독재 타도가 대학 생활의 목표였습니다. 자연히 학교 강의 대신에 이념서적 학습과 토론이 주요 일과였습니다. 어느날 우리의 학습서클이 ‘학림’이라는 반정부 대학생조직과 연계됐다는 혐의를 받아 책임자인 필자가 안기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았습니다. 며칠간 고문을 하던 수사관이 갑자기 부드러워졌습니다. 아마 그들의 조직도에서 필자가 빠진 듯 싶습니다. 그가 곱살스럽게 수박을 건네며 훈시를 했습니다. “겉과 속이 다 빨간 놈들은 경찰이 상대하면 돼. 우리는 여기 수박처럼 겉은 파랗고 속은 빨간 놈들을 잡아들이는 일을 한단 말이야. 너는 사과처럼 겉은 빨갛고 속은 하얀데 그런 사람은 출세를 못해.”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야당의원들에게 시원한 ‘협치수박’을 보냈답니다. 추 대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임기 후반에 대연정안을 제시했다가 여야 모두에 거절을 당한 기억을 떠올리며 매우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2005년 7월 대연정론을 제기할 당시 노 전 대통령은 사학법과 국보법 등 개혁과제를 밀어붙이다가 야당의 심한 반대와 여론의 비협조로 결국 실패했습니다. 여당 내에서도 차기 주자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대통령의 여당 장악력이 하루가 다르게 감소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연정론이 나왔습니다. 당연히 야당뿐만 아니라 여당에도 진정성을 의심받았습니다.

지금 문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과 여당 지지율은 그 어느 정권보다 높습니다. 단순히 상황 모면을 위한 임시변통으로 ‘협치수박’을 내놓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야당을 당장 망해야 할 구세력으로 몰아붙이는 적폐청산 정국의 상황에서 협치 제안의 진정성은 의심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야말로 겉은 파랗지만 속은 빨간 수박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당이 진정으로 협치를 원한다면 자신들만이 유일하게 정당하다는 도그마를 포기하고 상대를 소멸대상이 아닌 대화의 파트너로 인정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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