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국서 블록체인 실험장으로 ‘카리브해 실리콘밸리’ 뜬다

  • 손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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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8-10-04 07:30  |  수정 2018-10-04 07:31  |  발행일 2018-10-04 제21면
바하마의 대변신

1만2천여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뤄진 카리브해에 위치한 바하마 군도(The Bahamas)는 700여개의 섬으로 구성된 제도다. 정식명칭은 바하마연방공화국이다. 17세기 대항해시대, 유럽 열강과 해적들의 각축장이었던 이곳은 고급 휴양지로 유명하다. 온화한 기후 덕분에 관광산업이 크게 발전해 전세계적으로 매년 1천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온다. 카리브해 최대의 관광국가인 바하마에 최근 또 다른 수식어가 붙었다. ‘카리브해의 실리콘밸리’.

“가상화폐 개발해 공식통화로”
정부, 디지털 금융 육성 가속

기록 변형·훼손 막을 수 있게
블록체인 기술로 증명서 발급

해양유물 발견·복원의 자금줄
대규모 투자유치 없이도 탐사


20181004

◆도서국가 단점 극복 위해 디지털 금융 활용

“바하마를 ‘카리브해의 새로운 실리콘 수도’로 만들겠다.”

지난 6월 열린 ‘바하마 블록체인·가상화폐(암호화폐) 콘퍼런스’에서 후버트 미니스 바하마 총리가 한 공언이었다. ‘활기 넘치는 남쪽 바다 휴양지’와 ‘세계 소프트웨어산업의 중심지’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올 1월 세계연합(UN)이 집계, 발표한 국가별 인구조사결과를 보면 바하마의 총인구는 약 38만7천명이다. 대구 수성구 인구수(2018년 4월 기준 43만6천명)보다 5만명가량 적다. 인구 규모로는 ‘미니 국가’인 셈이다.

인구 수에 비해 경제력은 높은 편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이 발표한 ‘월드팩트북(World Factbook)’에 따르면 올 1월 기준 바하마의 1인당 연간 국민소득은 2만5천100달러다. 아메리카 대륙을 통틀어 상위 10위 안에 드는 수치다.

최대 소득원은 관광으로 국가 소득의 60% 이상을 차지하고, 바하마 국민의 절반 이상을 고용한다. 둘째로 규모가 큰 산업은 ‘금융’이다. 바하마의 전반적 금융 상황에 대한 국제 평가가 우수한 편은 아니다. 미국 경제 전문 일간지 월스트리트저널과 헤리티지재단이 매년 공동으로 발표하는 경제자유지수(Index of Economic Freedom) 측정 결과에서 바하마의 순위는 74위에 머물렀다. 북·남미와 유럽, 아프리카를 잇는 요충지라는 점에서 아쉬운 평가다.

하지만 최근 바하마 정부는 ‘디지털 금융’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수백개의 섬으로 흩어져 있는 국토에서 각각 은행을 세워 오프라인 금융 서비스를 제공할 수 없는 탓에 물리적, 위치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디지털 뱅킹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유통과 금융 비용을 줄이기 위해 블록체인을 눈여겨 보고 있다는 분석이다.

케빈 피터 턴퀘스트 바하마 부총리 겸 재무장관은 바하마 블록체인·가상화폐 콘퍼런스 오찬 연설 당시 “지난 10여년간 바하마 군도에 속하는 섬 지역에서 많은 상업 은행이 규모를 줄이거나 문을 닫았다. 도서국가의 특성상 섬 간 이동이 불편한 탓이 크다. 노인 인구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은 바하마에서 반드시 안정적 디지털 금융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블록체인 기반 가상화폐, 중앙 공식 통화로

바하마 금융 당국의 목표는 중앙은행 공식 통화 ‘CBDC(Central Bank Digital Currency)’로 가상화폐를 개발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와 태국, 영국에 이어 국가 단위 가상화폐가 발행된다. CBDC는 금융사만 접근할 수 있는 지급준비금의 결제방식을 블록체인 기술을 이용해 간편화하려는 목적을 지닌 디지털화폐다.

콘퍼런스 당시 턴퀘스트 부총리 겸 재무장관은 블록체인 기술 기반 디지털 화폐 도입이 부패 청산에 기여할 수 있으리란 기대를 보였다. 블록체인은 특성상 거래과정 일체의 기록이 투명하게 남고, 기록을 변형하거나 훼손할 수 없다는 장점 때문이다.

실제로 바하마의 블록체인 기술은 추상적 목표나 구호 수준을 넘어서서 사소해 보이는 것에서부터 구체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바하마의 국가 훈련 기관인 ‘내셔널 트레이닝 에이전시(NTA)’ 직업 준비 프로그램 참석 대학생에게 발급된 증명서는 블록체인 기술에 기반, 제작됐다. ‘블록서트(Blockcerts)’라는 이 문서를 발급받은 대학생은 누구나 취업 준비 단계에서 지원하려는 회사에 증명서를 간단히 제출할 수 있다. 위조 시비에 휘말릴 우려 따윈 당연히 없다. 조작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업과 지원자 모두 필요한 자료를 믿고 교환할 수 있는 것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금융 제도에 도입했을 때의 장점은 더 있다. 필요한 데이터를 일단 저장하고 이후 변동이 생길 때마다 업그레이드해주는 시스템을 확립하면 서류를 여러 종류 갖추는 데 들일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것이다.

바하마는 해저 유적 탐사에도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에 서인도 제도와 올드 바하마 수로를 거쳐 가던 많은 선박이 침몰했다. 현재 많은 양의 금, 은 및 보석이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에 따라 바하마 블록체인 스타트업인 PO8은 해상 탐사를 위한 솔루션 개발에 중점을 두고 내년에 해양 유물을 찾을 계획이다.

주요 도구는 블록 체인 기반의 해양 유물 데이터 시스템(MADS)이다. MADS는 잃어버린 유물을 복원해 토큰화하고 토큰 소지자가 탐사에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분산된 응용 프로그램이다. 일반적으로 진입 장벽이 높은 난파선 탐사에 대규모의 투자를 하지 않고도 찾아낼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PO8은 또한 발견된 유물의 경매가 이뤄지는 방식과 안전한 에스크로 서비스로 사용되는 정부 유물 경매 시스템(GAAS)을 분권화하는 데 사용될 해양 유물 옥션 플랫폼(HOAP)과 같은 애플리케이션을 개발했다. 이 앱을 이용하면 전 세계 정부 및 박물관과 같은 비영리 단체들은 분산화된 플랫폼에서 유물을 교환할 수 있다. 사용자는 프로젝트 자금으로 PO8 토큰을 구입하는 방식이다.

“블록체인 기술의 선구적 실험장이 되겠다”고 자처한 바하마의 행보는 신선하다. 한때 국가적 감시를 벗어난 해적들의 본거지에서 고급 휴양지로 변모한 바하마는 블록체인으로 어떤 미래상을 꿈꾸고 있을까. 블록체인과 가상화폐를 주제로 바하마에서 열린 콘퍼런스가 예사롭지 않다.

손선우기자 sunwoo@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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