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윤 칼럼] 궤멸의 정치, 이제 멈춰라

  • 이재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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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01   |  발행일 2019-11-01 제23면   |  수정 2019-11-01
20191101
논설실장

궤멸(潰滅). 듣기에도 섬뜩하다. 김부겸 의원(더불어민주당)이 작금의 정치상황을 걱정하며 자주 쓰는 말이라고 한다. ‘상대를 궤멸시키려 하는 정치’에 대한 우려의 뜻이 담겨있다. “지금 정치는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사는 정치”라는 이철희 의원(더불어민주당)의 탄식도 같은 맥락이다. 불행히도 궤멸되고 있는 것은 상대만 아닌 것 같다. 상대를 궤멸시키려다 너, 나 할 것 없이 정치인, 정치 모두가 한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한 국민감정은 이렇다. 물갈이? 아니다. 국민은 판갈이 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정치는 스스로 자정할 능력이 없다. 역설적이게도 지금의 정치가 온 몸으로 그걸 입증하고 있다. 마침 21대 총선이 다가온다.

내년 총선의 시대정신은 뭘까. 단연코 정치개혁이다. 여전히 국회는 정치개혁을 말하지 않고 있다. 자신의 살을 도려내야 하기 때문이다. 남을 칠 땐 인정사정 없고 사생결단 하지만, 자신에게는 작은 상처조차 절대 용인하지 않는다. 국민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할 것이다. 자신을 향하는 화살을 어떻게든 피하려 할 것이다. 이런 일엔 여야가 따로 없다. 비루한 정치다. 미혹돼선 안 된다. 이번엔 오로지 정치개혁이다. 국민이 그렇게 결심해야 한다. 무능·무책임·불의한 사람들에게 너무 오랫동안 정치권력을 맡겨왔다. 그 폐해가 지금 정점에 이르렀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사람부터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사람이 바뀌어야 정치가 바뀌고, 정치가 바뀌어야 나라가 온전할 것 같다.

정치에 회의를 느낀 의원들이 하나둘 국회를 떠나려 한다. 떠나야 할 사람은 떠나지 않고, 있어야 할 사람이 짐을 싸고 있다. 잘못하다가는 적반위주(賊反爲主), 도적 무리에게 주인 자리 내어줄 판이다. 떠나겠다는 이철희 의원의 말이 절절하다. “무기력에 길들여지고, 절망에 익숙해졌다. 바꿔놓을 자신이 없다. 멀쩡한 정신을 유지하기조차 버겁다. 이미 소진됐다”고 했다. 같은 당 표창원 의원의 불출마의 변은 안쓰럽다. “지옥 같았다. 불면의 밤이 많았다. 좀비한테 물린 느낌? 계속하면 저도 좀비가…. 최악의 20대 국회, 책임지겠다”고 했다. 우연찮게 둘 다 포항 사람이다. 개혁적 성향에다 대중성·전문성을 두루 갖춘 우리 정치의 소중한 자산이다. 이들의 불출마 선언이 그래서 더 안타깝다. 민주당내 20명 가까이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언(二言)하면, 민주당에는 쓸 만한 배 20척이 아직 남아있는 셈이다. 무엇이 이들을 좌절하게 했을까.

위로한답시고 두 사람을 부른 이해찬 민주당 대표의 ‘격조 높은 훈사(訓辭)’에서 이들이 좌절한 까닭을 엿볼 수 있다. 이 대표는 막스 베버의 강연록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인용했다. 정치하는 사람에게 중요하다며 세가지, ‘열정’ ‘책임감’ ‘균형감각’을 말했다. 대한민국의 정치인을, 어쩌면 스스로를, 고결한 사명을 부여받은 ‘소명자(召命者)’쯤으로 여기고 있는 것일까? 그것을 후배 정치인에게 훈시한다? 당치않다. ‘혼돈의 정치상황을 책임져라’는 국민요구에 책임지는 사람 하나 없으니 ‘내가 책임지겠다’고 십자가를 멘 게 두 사람 아닌가. 어느 누구보다 소명에 충실한 이들이다. 이 대표의 훈시는 벼와 가라지를 분별 못한 처사다. 추수 앞둔 논밭을 어지럽힌 가라지가 대체 누구였는지 스스로 돌아볼 일이다. 이왕 말이 나온김에 본인은 2선으로 물러나고, 이철희·표창원 같은 얼굴 내세우면 여당이 지금보단 훨씬 나을 것이란 생각을 해보진 않았는가. 불출마까지 선언했으니 사심 없이 해보라며 당과 총선을 맡겨볼 생각은 없는가.

정작 떠나야 할 사람은 많지만 이런 사람이 먼저다. 자유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 자유만 중하고 공정과 평등은 필요치 않은 사람, 공정과 평등의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 공정과 평등만 중하고 자유의 고마움을 무시하는 사람이다. 극단(極端)은 떠나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 정치를 공멸의 수렁으로 이끄는 주범이다. 내년 총선, 극단의 가라지부터 뽑아내야 한다. 상대를 궤멸시키려는 극단의 정치부터 그쳐야 정치개혁이 시작된다.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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