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열며]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만들자

  • 이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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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18   |  발행일 2019-11-18 제30면   |  수정 2020-09-08
후보땐 머슴으로 봉사 다짐
당선 되면 돌변하는 의원들
서툴고 모자란 능력은 외면
의원정수 확대 뻔뻔히 주장
국민 멸시의 정치 깨뜨려야
[아침을 열며]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만들자

투표할 때만 나라의 주인이고 선거가 끝나면 권력자들의 머슴살이를 하는 것 같다는 게 국민들의 생각이다. 후보 시절에는 국민의 머슴으로 성실하게 봉사하겠다고 다짐하지만 당선되면 호사를 누리거나 국민멸시 증후군이 도지기 일쑤이다. 그런데도 여론조사 때마다 비난 받는 국회의원들이 요즘 의원 정수를 늘리자는 헛소리를 시작했다. 이는 마치 서툴고 모자란 능력을 부끄러워하는 대신 주인에게 허락받지 않고 머슴이 제멋대로 머슴을 더 채용하자고 주장하는 꼴이다. 주인 마음을 모질게 저버린 그들의 뻔뻔함에 국민 여론은 의원 정수 확대에 반대가 압도적으로 많다는 사실을 엄중한 경고로 받아들여야 한다.

OECD 국가 평균인 국민 10만 명당 국회의원 수에 비하면 우리나라 의원 정수가 모자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의원들의 세비는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5.27배로 34개 회원국 중에 일본(5.66배), 이탈리아(5.47배)에 이어 3번째로 많이 받는다. 반면 법 제정, 행정부 감사 등 각종 활동 상황을 측정한 보수 대비, 의원들의 효과성을 조사한 결과는 비교 가능한 27개국 가운데 26위로 꼴찌수준이다. 의원 정수 확대 주장이 얼마나 염치없는 행위인지 대번에 알 수 있는 지표가 아니겠는가.

1987년의 민주항쟁으로 16년 만에 국민의 직접선거로부터 지금까지, 대통령선거 투표율과 국회의원 선거투표율을 살펴보면 정치인에 대한 국민혐오가 매우 심각하다는 걸 알 수 있다. 1987년 제13대 대선투표율은 89.2%였는데 2017년 제19대 대선 때는 촛불혁명의 결과로 다양한 후보와 정당이 경합했음에도 투표율은 77.2%였다. 1988년 제13대 총선투표율은 75.8%였는데 2008년 제18대 총선은 46.1%로 역대 최하위였고 열기로 가득했던 2016년 제20대 총선투표율도 고작 58%였다. 겨우 과반의 투표율을 기록한 배경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많은 국민들이 찍고 싶은 후보가 없다는 것과 심각한 정치혐오일 것이다. 만약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만들면 의외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 투표율이 상승할 것이다. 헌법에 명시된 나라의 주인임에도 정치인들에게 속았다는 걸 안 국민들은 정치심판을 모색하게 될 것이다. 지지할 후보나 정당이 마음에 차지 않아 기권했거나 차선을 택했던 유권자들까지 투표소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투표 결과를 보고 정치인은 물론 정권이 국민을 두려워하고 바른 정치를 하려고 노력할 수 있다. 지금처럼 진영논리에 빠져 내 편만 옳고 상대는 그르다며 사리사욕에 몰두한 정치권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사실을 확인시키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역대 대통령들이 모두 실패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어버린 현대사를 들추어보면 국민을 제대로 섬기지 않았고 국민이 부여한 권력을 함부로 사용한 탓이다. 국민은 겸손하게 무릎 꿇은 정권을 원한다는 걸 각인시켜야 한다.

넷째, 권력자들에게 역사에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를 소상하게 알려줄 수 있다. 우리가 조선시대의 실상을 알게 된 것은 각종 실록과 선비들의 기록이듯 대통령기록물과 국회속기록과 언론보도로 그들의 행적이 고스란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당장 국민은 속일 수 있어도 역사를 속일 수 없다는 가르침을 줄 것이다.

다섯째, 가장 많은 표를 얻은 후보자의 유효표보다 기권표가 많으면 재선거를 하는 등의 합리적인 선거법 개정을 하면 정치판이 출세의 도구가 아니라 국민에게 봉사하는 조직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러면 삿된 자가 어진 이로 둔갑하고 어진 이가 삿된 자로 배척되는 일도 사라질 것이다.

어떻게 가꾸어온 대한민국인데 아무나 흔들도록 결코 내버려둘 수 없기에 투표용지에 기권란을 만들어 ‘국민 멸시’ 정치를 깨뜨려야 한다. 국회는 국민대표자 회의의 줄임말이고 국회의원은 국민에게 위임받은 행위만 해야 한다. 권한을 주었을 때는 제발 딴짓하지 말고 오직 국민의 명령에 복종할 의무가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김홍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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