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과 낙엽사이 ‘만추 로드’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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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11-22   |  발행일 2019-11-22 제33면   |  수정 2020-09-08
얼음 어는 한켠 거미줄처럼 걸린 가을
빨강 계열 단풍 色만 100여 가지 이상
잘익고 못익고 따라 엄청난 채도 차이
고혹스러운 색채…단숨에 핫플 포토존
지역 예술가들의 가을 찬가·고독·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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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군 가창댐에서 헐티재까지는 만추로드의 한 획을 긋는다. 가창댐 초입 대구교회 정문 옆길이라 적힌 표석 옆 고목형 벚나무에서 만난 단풍은 빨강과 노랑의 앙상블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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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못오거리와 중동네거리 중간에 있는 상동네거리에서 만난 3중 플라타너스 길은 푸름과 누름, 노랑의 기운이 절묘한 균형을 이뤄 멋진 포토존으로 사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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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수성못 동쪽에 가설된 수생식물데크에서 만난 만추. 코스모스 같은 나비바늘꽃과 수크령, 억새, 갈대 등이 행복한 시간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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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수성못 만추지경은 남쪽 언저리 오리배 선착장 부근으로 가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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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에 찌들다 보면 내면은 더 없이 팍팍해지고 충혈된다. 이 만추지절, 무거운 맘을 잠시 차 한잔과 함께 내려놓을 수 있는 대구 수성구 연호동 푸른차문화원 내 하심방. 오영환 원장이 뜨락에서 끊어와 진설한 가을꽃과 단풍으로 힐링의 시간을 가져본다.

가을과 겨울의 접점. 한쪽에선 얼음이 얼고 또 한편에서는 단풍이 낙엽으로 변속된다. 몇몇 낙엽은 얼음에 묶여들어가 ‘빙장(氷葬)’이 되기도 한다. 바야흐로 2019년판 만추(晩秋)가 장엄하고 컬러풀하게 임종을 고하고 있다.

단풍과 낙엽 사이, 거미줄처럼 아스라이 걸린 만추. 만추로드는 2부작, 단풍로드와 낙엽로드의 합작품이다. 어떤 이에겐 만추의 백미가 단풍이 아니라 ‘낙엽’이다. 그시절 여학생의 책갈피에 어김없이 꽂혔던 낙엽들. 오래 화석의 세월을 보낸뒤 헌책방에서 파삭거리는 나방 표본으로 부활하기도 한다.

계절은 개정판이 없다. 오직 ‘한정판’ 라이브뿐이다. 바람 한 점에 수 많은 단풍이 첫눈의 형용으로 진다. 커피 한 잔 만지작거리며 그걸 바라본다. 기막힌 라이브공연이다.

잎이 진다는 것. 그건 긴 겨울을 무사하게 건너기 위한 나무만의 생존전략. 지극히 생산적이지만 인간에겐 자못 ‘문학적’이다. 그래서 저 조락(凋落)의 행렬은 더없이 고독할 수밖에.

일제강점기 ‘명동백작’으로 불렸던 박인환 시인. 그는 ‘세월이 가면’이란 시를 통해 ‘가을찬가’를 멋지게 풀어냈다. 비슷한 이름의 가수 박인희가 수십년 뒤 그의 ‘목마와 숙녀’란 시를 품는다. 이지적이면서도 낭랑하게 낭독해 고독과 낭만을 동시에 건드렸다. 황막하고 외진 음색을 가진 가수 장현, 그의 대표곡인 ‘미련’도 박인환·박인희의 노래와 함께 7080 가을날 우수를 절절하게 분출해냈다. 이후 4명의 요절 가수가 더 가세한다. 김현식과 유제하는 11월1일,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으로 유명한 차중락은 11월10일, ‘하얀나비’의 김정호는 11월29일 죽었다. 그래서 이 계절이면 그들이 더욱 그리워진다. 그들은 만추의 감정선을 더없이 눅진하게 건드렸다. ‘10월31일의 가수’ 이용의 ‘잊혀진 계절’도 ‘한 가을’ 했는데, 이젠 아닌 것 같다. 갈수록 ‘신파’로 기우뚱 한다. 그 탓인지 최근 방송가에서부터 그 팬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

봄꽃(春花)·가을단풍(秋葉)의 연대기를 정리하고 싶었다. 둘은 춘추를 대변하는 화경(花經). 봄은 꽃, 하지만 가을에는 꽃보다 단풍이 한 수 위. 가을꽃은 눈치를 볼 수밖에, 그래서 그들은 단풍 절정기를 피해 출격한다.

단풍도 춘하추동이 있다. 청년 같은 단풍, 중년 같은 단풍, 노년 같은 단풍, 초·중·고급 단풍을 모두 정독해 봐야 단풍의 본질에 근접할 수 있다. 단풍의 겨울은 당연히 낙엽. 그 낙엽으로 건너가기까지 모든 활엽수 잎들은 너무나 많은 색깔을 끄집어낸다. 단풍의 색상은 어쩜 그 나무만의 ‘주량(酒量)’이랄 수 있다. 나무마다 주량은 제각각. 더 붉은 게 있고 전혀 물들지 않는 상록수도 있다. 모르긴 해도 저리 자지러질듯 붉어지는 걸 보면 단풍나무 주량은 최하위권일 것 같다. 그럼 더 없이 노래지는 은행나무의 주량은 어느 정도일까?

수 년 전 봄꽃 계보부터 정리했다. 이번 커버스토리는 가을에 대한 헌사(獻辭)랄 수 있다. 이를 위해 지난 한 주는 ‘만추로드’에 푹 취해 살았다. 사람이 아니라 단풍 그 자체가 인터뷰 대상이었다. 차를 몰다가 그림이다 싶은 포인트에 차를 세우고 촬영을 했다. 그걸 토대로 대구의 단풍지도도 끄적거려봤다. 그 길에서 만추의 틈에 서식하는 지역 작가들의 가을타는 소리도 담을 수 있었다. 화가 김일환·권기철·김길후, 시인 김정용, 사진작가 우재오와 이만도. 그들은 이번 만추에 어울릴 만한 작품을 보내왔다.

단풍공화국에도 빈익빈 부익부가 있었다. 모두 최상의 채도와 컬러를 유지하지 못한다. 방탄소년단 같은 슈퍼스타급 단풍도 있지만 3류 무명가수 같은 후줄근한 단풍도 있다. 이 또한 단풍의 운명이다. 닭벼슬 같이 귀족스러운 극채색의 단풍에는 시선이 폭주한다. 단숨에 핫플 포토존이 된다. 하지만 아무리 이빨을 악물어도 푸석한 초록권에서 못 벗어나는 이팝나무와 무화과의 잎들은 자연 관심에서 멀어진다. 덕분에 공작형 단풍은 더 고혹한 빨강을 으스댈 수 있게 된다.

취재 중 가을이 성큼 사멸하고 있었다. 끝물 벚꽃처럼 허공에 난분분하는 단풍의 궤적들. 그 너머 시퍼런 하늘의 시선이 맨살처럼 드리워져 있다. 유구무언(有口無言)! 진실로 아름다운 건 하나의 두려움. ☞ W2면에 계속

글·사진=이춘호 전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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