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물길 따라…떠나자! 상주 핫플레이스]〈1〉 경천대와 밀리터리테마파크

  • 박관영
  • |
  • 입력 2020-05-14   |  발행일 2020-05-14 제11면   |  수정 2020-05-14
귀신이 깎고 새긴 듯…기암·고송 어우러진 낙동강 1300리 최고 절경

2020051401000419200015821
'하늘을 떠받든다'는 뜻을 가진 경천대. 예부터 낙동강 1천300리 물길 풍경 가운데 으뜸으로 꼽히는 곳으로, 대(臺) 위에 자리잡은 기암과 고송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움을 더한다.
2020051401000419200015822
경천대 기암 앞에는 '경천대비'가 서 있다. 비석에는 '경천대' 세 글자가 횡으로, '대명천지 숭정일월' 여덟 글자가 종으로 새겨져 있다.

낙동강은 역사의 젖줄이자 문화의 원류다. 그 넓고 깊은 물은 흐르고 흘러 곳곳에 삶의 터전을 만들었고, 수많은 역사와 이야기가 강을 무대로 꽃을 피웠다. 굽이치는 낙동강은 상주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다시 이어진다. 상주의 수많은 역사와 문화 역시 낙동강의 너른 물길을 따라 이어지고 있다. 현대에 들어서는 역사와 문화자원을 활용한 관광명소가 들어서 신성장 동력으로 재탄생했다. 영남일보는 오늘부터 '낙동강 물길 따라…떠나자! 상주 핫플레이스' 를 연재한다. 시리즈는 낙동강을 따라 펼쳐진 상주의 다양한 관광명소를 집중 조명한다. 명소에 깃든 이야기도 정리해 흥미를 돋운다. 시리즈 첫회는 상주의 대표 명소인 경천대와 밀리터리테마파크를 다룬다.

시인묵객들의 유상처이자 시회 공간
경천대 아래 용소 정기룡 장군 전설
조선 인조때 우담 채득기 은거한 곳
경천대비 세우고 정자 무우정 건립

최근들어 출렁다리·전망대 등 조성
실전 같은 서바이벌 게임 체험장도


은성하게 반짝이는 푸른 강물 위로 우뚝 절벽이 치솟았다. 절벽은 광활한 노송의 숲을 거느리고 금빛 모래밭이 펼쳐져 있었다는 저편의 들판을 내다본다. 낙동강 1천300리 물길의 풍경 가운데 으뜸이라는 경천대(敬天臺)다. '경천'이란 '하늘을 떠받든다'는 뜻이지만, 그보다 더 오래전 그곳은 '하늘이 스스로 만든 아름다운 곳', 즉 '자천대(自天臺)'라 불렸다. 경천대에서 바라보는 산과 들과 강이 자천이요, 산과 들과 강에서 바라보는 자천이 경천대일 것이니, 경천의 자리에서 맞이하는 것은 한없이 소쇄한 자천의 아름다운 위엄이다.

#1. 낙동강변의 경천대

삼국시대 초기 상주는 사벌국(沙伐國)이라는 작은 나라였다. 사벌국은 신라 첨해왕 때 복속돼 주(州)가 되었고, 법흥왕 때 상주(上州), 그리고 경덕왕 때 비로소 상주(尙州)가 되었다. '사벌'이라는 이름은 사금(沙金)에서 연유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황금의 나라' 신라의 금밭이 사벌국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견해다. 그러한 옛 나라에 대한 불명의 기억은 '사벌면'이라는 행정구역으로 남아 있었고 지난 1월에는 '사벌국면'으로 변경되면서 되살아났다.

상주 사벌국면의 낙동강가에 경천대가 자리한다. 경천대는 서쪽 하늘을 등지고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대(臺) 아래에는 기우제 터가 있어 예로부터 신성한 곳이었다고 한다. 어쩌면 금밭이었을 강변의 모래밭은 이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조선 중·후기의 실학자이자 서화가인 식산(息山) 이만부(李萬敷)가 쓴 '상낙문회기'에 경천대의 모습이 실감나게 묘사돼 있다.

'수십 보를 걸어서 비로소 자천대 아래에 도달했는데 자천대는 3층으로 돼 있었다. 아래가 제일 넓고, 가운데에는 앉을 수 있을 정도다. 전면에는 바위를 뚫어서 소연분(小蓮盆), 관분(관盆), 약분(藥盆)을 각각 한 개씩 만들어 놓고 있었다. 돌부리 때문에 몇 걸음을 걸어서 자천대의 상단에 올라가니, 한 길이나 되는 괴석이 우뚝 서 있는 것이 귀신이 깎고 새긴 것 같다. 하단은 조금 평평해서 몇 사람 정도가 앉을 수 있고, 가운데는 멧돌을 세워 놓고 바둑판을 그려 놓았다. 돌 위의 고송은 하나로 묶은 것처럼 뭉쳐 있어서 햇살을 막아 그늘을 만들어 주고 있다. 바위 주위에는 석류나무, 치자나무, 오동나무, 개오동나무, 기이한 풀, 이상한 꽃들이 서식하고 있다.'

그가 본 고송은 지금도 기암을 휘감고 서있다. 이만부의 기록은 또한 눈앞에 펼쳐지는 많은 것들의 상세를 알려준다. 경천대 상류에는 옥주봉(玉柱峰)이 솟아 있다. '전체가 돌로 된 작은 봉우리로 아래는 둥글고 위는 뾰족'하다. 그 아래에는 귀암(龜巖)이 있다. '큰 돌이 강 속에 있는데 가운데가 불룩한 게 마치 살아 있는 것 같다'는 바위다. 하류에도 석봉(石峰)이 있는데 용암(龍巖)이라고 한다. '크기는 옥주봉보다 두 배는 되고 높이는 서로 비슷'하다. 그리고 용암 아래에 깊은 못이 있는데 그 속에 칩룡(蟄龍)이 살고 있어 용담(罷歸)이라 한단다. 용담은 임진왜란 때의 명장 매헌(梅軒)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전설에 등장하는 경천대 아래의 '용소'를 상기시킨다. 용소에는 번개처럼 날쌘 용마가 살고 있었는데 정기룡 장군이 그 용마를 취해 강가의 백사장에서 무술을 연마하고 수많은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고 전한다.

#2. 경천대비와 무우정

경천대 기암 앞에 '경천대비'가 서 있다. 비에는 '경천대' 세 글자가 횡으로, '대명천지(大明天地) 숭정일월(崇禎日月)' 여덟 글자가 종으로 새겨져 있다. 이를 새긴 이는 우담(雩潭) 채득기(蔡得沂)다. 그는 조선 인조 때의 학자로 특히 역학에 밝았고 천문과 지리, 의학 등에도 통달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병자호란을 예측했다는 그는 1636년 이곳에 은거해 경천대비를 세웠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이후 자천대는 시나브로 경천대가 되었다. 경천대 바위에 있는 3개의 분(盆)도 우담의 자취다. 그는 소연분에 연을 기르고 약분에 약을 제조하고 관분에 세수를 했다. 경천대 옆에는 우담의 정자인 무우정(舞雩亭)이 있다. '무우'란 '춤을 추며 비를 빈다'는 의미로 기우제 터 위에 세운 정자임을 말하나 자연을 벗 삼아 도를 즐긴다는 뜻을 품고 있다.

병자호란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청의 볼모로 끌려갔을 때 우담은 인조의 명으로 왕자들의 주치의가 돼 중국 심양으로 갔다. 그가 떠나며 불렀던 노래가 '봉산곡(鳳山曲)'으로 '천대별곡(天臺別曲)'이라고도 한다. 그 첫 구절은 이렇다. '가노라 옥주봉아, 잘 있거라 경천대야.' 그리고 말미에 이렇게 외쳤다. '잊으라, 가리라, 가노라, 있어라. 무정한 갈매기는 내 맹세를 비웃지만…' 그리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다. 7년여의 심양 생활을 끝내고 돌아온 우담은 벼슬을 마다하고 무우정에 은거했다. 그는 이곳에서 학문을 닦으며 북벌의 때를 기다리다 마흔셋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는 아찔한 절벽은 게으름을 경계함이요, 푸른 솔잎은 충군의 마음, 깊은 강물은 우국의 애끓음이라 했다 한다.

#3. 경천대 국민관광지와 밀리터리테마파크

심지가 곧은 선비의 은신처였던 경천대는 오랫동안 시인묵객들의 유상처(流觴處)이자 시회(詩會)의 공간이었다. 그리고 현대에 들어 경천대 일원은 정부 지정 국민관광지가 되었다. 야외수영장·눈썰매장 등의 어린이 놀이시설과 야영장, 식당·매점 등의 편의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숲길을 따라 목교와 출렁다리, 구름다리, 돌탑이 어우러진 돌담길과 맨발로 걸을 수 있는 황톳길, 그리고 조각공원 등이 조성돼 있다. 경천대 뒤 무지산 159m 정상에는 3층 높이의 전망대가 소백산맥의 아스라한 능선까지 시야를 열고, 경천대 아래 강변에는 2001년 TV드라마 '상도'의 야외 세트장이 깨끗하고 고적하게 자리한다.

관광지 초입에는 용마를 탄 정기룡 장군의 동상이 있다. 그 뒤로 2017년에 문을 연 '밀리터리테마파크'가 자리한다. 국내 최고의 온라인게임인 '스페셜포스 게임 콘텐츠'를 현실에서 직접 체험할 수 있는 신개념 레저스포츠 체험장이다. 주유소, 빌딩, 자동차 등으로 재현된 시가지에서 전투를 벌이는 서바이벌 경기로 게임을 실전과 같이 체험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파죽지세로 한양을 향하던 왜군이 처음으로 조선의 중앙군과 맞닥뜨려 싸운 곳이 상주였다. 결과는 패배였지만 나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호국의 상징으로 남았다. 6·25전쟁 당시에는 소백산맥의 험준한 지형을 뚫고 일거에 대구로 진격하려는 북한군을 우리 국군이 막아낸 곳도 상주였다. 전쟁 개전 이후 한국군이 올린 최초의 승전이었다. 전투는 게임이라 할지라도 손에 땀을 쥐게 만든다. 또한 승리도 패배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심장의 한가운데로 소환되는 역사 때문일 것이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누리집. 한국콘텐츠진흥원 누리집.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