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칼럼] '인간지능'에서 '인공지능'으로의 변주곡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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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7-08   |  발행일 2020-07-08 제26면   |  수정 2020-07-08
1950년대 실험학문 인공지능
세상 놀라게 한 알파고 이어
2050년 인간지능 능가 전망
인간 원형질마저 용납 않는
'사이버 변주곡' 엄습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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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석 경북대 사학과 교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인간의 삶과 세상의 모습을 총체적으로 바꾼 문명사적 대전환의 요인과 그 양상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마련이다. 이 중 최대 관심사는 생산도구의 변화가 가져온 인류사회의 변화양상이다. 모든 역사교재의 목차에 청동기·철기시대 등의 메뉴가 단골로 등장하는 것도 인류사회의 결정적 변화 요인을 '인간지능'의 소산인 생산도구로 상정한 결과다. 예컨대 신석기시대의 돌도끼보다 소가 끄는 철제 쟁기가 생산력을 획기적으로 증대시킴은 물론 그 성과물인 재화의 분배 과정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리는 지배층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에 정치·사회·문화적 격차를 유발하는 경제외적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따라서 창의적 인간지능의 진보를 기반으로 한 혁신적 생산도구의 발전사 측면에서 인류사회는 수직적 진보의 역사로 기록됨이 마땅하다.

그러나 인류사가 '이상사회를 향한 단선적 진보의 역사'로 점철되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기술의 진보와 경제발전에 수반된 정치·사회적 변혁 속에서 그 수혜자보다는 진보의 대열에서 소외되거나 탈락한 개인과 집단이 상존하였고, 이들은 행복지수보다 불행지수가 훨씬 높았다. 나아가 인간지능의 오남용은 사회적 모순의 누적과 간헐적 폭발, 그리고 국가 간·지역 간 분쟁과 전쟁의 빈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기술사학자 멜빈 크란츠버그의 지적처럼 '인간지능이 창조한 과학기술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으며 가치 중립적이지도 않다'. 그 사용자들에 따라 창의와 혁신의 선한 아이콘으로 작용하기도 하였지만 욕망에 사로잡힌 변용과 왜곡의 결말은 인간사회를 불행으로 빠뜨리는 일등공신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인간지능의 사회가 그 부작용을 해소하지 못한 채 목하 인공지능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950년대 미국에서 실험 학문의 일종으로 연구가 시작된 인공지능은 2016년 이세돌을 반상에서 몰아낸 알파고로 세상을 놀라게 한 것도 잠시, 이제 2050년이면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능가할 수 있다는 전망까지 나온다. 날로 집적도가 높아지고 소형화하는 IT기술의 발전 속도라면 인간지능에 필적하는 인공지능의 등장이 머지않았음을 예측한 것이다. 이른바 '초지능'을 장착한 로봇이 인간지능 시대에 축적한 인류의 모든 지식과 경험을 이해하고, 나아가 자율적 자기학습과 판단능력을 바탕으로 자기 논리에 맞추어 인간사회를 조율하고 재단하는 사회가 곧 닥칠 것이라는 추측은 영화적 상상력에 불과한 것일까. 중고등학교 시절 달달 외워대던 인류문명의 변화양상과는 질적·양적으로 전혀 다른 차원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인류의 역사를 인간지능과 인공지능의 시대로 양분하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막스 베버는 근대 자본주의 시대의 인간을 '영혼 없는 전문인, 마음 없는 향락인'으로 비판한 적이 있다. 산업혁명의 여파로 자본에 잠식당한 지식인과 물질적 향락에 빠진 시민들의 행태가 꽤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인공지능의 무한 질주 속에서 영혼과 마음의 상실은 물론 인간의 존재 가치를 염려해야 할 시점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음악에서 '변주곡'은 원곡에 아무리 많은 변화를 주더라도 그 원형질은 유지하는 것이 원칙이다. 인간지능에서 인공지능 사회로의 변화가 두려운 것은 인간의 원형질마저 용납하지 않는 '사이버 변주곡'이 자율주행차량에 장착되어 유령처럼 들이닥치는 일일 터이다.
윤재석 경북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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