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 실패했던 부모님의 슬픔…그 위에서 나는 춤을 추고 있었다

  • 이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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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08-14   |  발행일 2020-08-14 제34면   |  수정 2020-08-14
[人生劇場 소설 기법의 인물스토리] '부추굽' 가족(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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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남구 대명동 대덕문화전당 광장 복판에서 즉흥적으로 경기민요와 팝핀 앙상블을 펼치고 있는 모자.

지난 4일 오후 3시. 어머니와 나는 점심 손님이 남긴 흔적을 말끔히 정리한 뒤 부리나케 인생극장 인터뷰를 위해 약속 장소로 뛰어왔다. 어머니는 파란색이 인상적인 한옥 차림에 조선여인처럼 쪽도 쪘다. 나도 무대 공연을 기다리고 있는 춤꾼의 태세를 갖추었다. 보다 못한 아버지도 가세하셨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이밀고 촬영장소까지 태워주셨다. 꼭 로드매니저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안다. 나와 어머니가 이미 유명인이 된 '팝핀현준'이나 트로트 돌풍 때문에 벼락스타가 된 송가인·임영웅·김호중 급으로 급부상하는 게 어렵다는 걸. 그렇게 생각만 하지 직접 말씀은 하지 않는다. 예전 신출내기·애송이 시절의 모자가 아닌 탓이다.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그건 세월만이 알지 아버지가 어떻게 예감하고 직감하겠는가.

앞산을 고향으로…굴곡진 가족사
앞산서 레스토랑 경영하던 부모님
컬러링 특허기술 갖고있던 아버지
대기업과 특허권 분쟁서 수억 손실
양식당 실패 후 찜집·순두부 성공
13년 전 장어집으로 다시 일어서

펄떡거리는 장어, 저것이 내 모습
놀림감이었던 초등학교 시절 지나
중학생때 TV로 본 '팝핀' 춤 연습
소심한 아이로만 보던 선배들에게
학교축제에서 솜씨 보이자 '엄지척'
장어집 카운터만 나서면 춤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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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미주한인재단 초대 미주한인의 날 축하공연 뒤 교포들과 기념촬영도 했다.

◆서로서로를 염려하고

아버지는 모자를 걱정하고 그 어머니는 날 항상 걱정하신다. 그런 나는 늘 지구를 벗어나려고 하는 우주선처럼 부모의 관심권 밖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내가 외길 춤인생일 것 같아 여간 조바심이 아니다.

어머니는 더 적극적이셨다. 취미로 민요를 시작하다가 3년전 결국 일을 내셨다. 대구예술대 공연음악과에 입학해서 국악을 전공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로선 나를 위한 '배수진 카드'였다. 어머니는 내게 비장하게 말하셨다. '뭘 하려고 하면 제대로 해야지. 나도 대학에 입학했으니 너도 그렇게 해야 된다.'

나도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경산에 있는 대경대 실용댄스학과에 입학했고 올해 졸업을 했다. 그전에는 영남이공대 의료기기과에 들어갔다. 대구가 메디시티로 격상하려던 시점에 생겼지만 결국 폐과가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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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경연대회 배틀에 참가해 팝핀을 추고 있는 강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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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운명처럼 접한 스트리트댄스 팝핀 때문에 춤외길인생을 걷게 된 춤꾼 강인성. 그는 올해 대경예술대 실용댄스과를 졸업하고 틈틈이 가업으로 운영되는 장어집 카운터를 지키는 한편 시내 모 댄스학원에서 팝핀을 지도하고 있다.


◆아들은 앞산의 다람쥐

난 앞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산속에서 늘 혼자 나무를 타면서 소일해야만 했다. 자연히 사회성이 결여될 수밖에 없었다. 친구도 없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선 아이들 뒤만 졸졸 따라다녔다. 난 자연에 길든 상태였다. 그게 아이들에겐 놀림감이었다. 왕따를 자주 당했다. 초등학교 시절엔 기억할 게 거의 없다.

그러다가 남구 대명중 시절 TV를 통해 팝핀현준의 경이로운 몸동작에 감전된다. '아 좋다', 그런 수준이 아니라 '난 진짜 저걸 하고 싶다'는 욕망이 분출됐다. 생애 처음으로 나도 하고 싶은 뭔가가 생겼다. 당시 가수 비, 유승준 등 아이돌 댄스가수가 가요계를 주무르던 시절이었다. 나는 아이돌의 춤을 흉내내려 했다. 달성군 하빈에 있는 달서고에 입학해선 내가 제일 좋아하는 슈퍼쥬니어 멤버 은혁의 춤 동작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 아이들에게 보여줬다. 학교 축제에서 선보였는데 대박이 났다. 평소 소심한 애로 보던 춤 선배들이 날 엄지척해주었다.

고교 2학년 때 어머니에게 다짜고짜 '나 춤추고 싶다'고 했다. 어머니는 한 마디로 잘라 '안 된다'고 했다. 몇 번 더 매달렸다. 그러자 어머니는 '그럼 배워나 봐라'며 허락하셨다. 시내 동성로 스텝댄스아카데미(원장 서경호)를 노크했다. 거기 가니 팝핀뿐만 아니라 락킹, 비보이 등 별별 춤 장르를 다 만끽할 수 있었다. 모두 고수였다. 난 락킹과 팝핀 두 개를 동시에 주무르다가 가야금처럼 보는 이를 신나게 하는 락킹보다 자기만의 스타일, 자존감이 더 높은 팝핀에 올인했다. 나는 몸·팔·발을 같이 움직이는 팝핀의 가장 기본적인 동작인 프레즈노(Fresno), 이 밖에 마스터 오 플렉스(Master O Flex), 트위스트 오 플렉스(Twist O Flex), 넥 오 플렉스(Neck O Flex) 등 플렉스의 3동작 등 팝핀의 각급 고난도를 섭렵해가면서 춤의 본질을 더 깊게 이해하게 된다. 그렇게 9년간 죽어라 춤을 췄다.

졸업전 '펑키타운'이란 춤 동아리를 만들었다. 지역 고교축제에선 좀 알아주던 팀이었다. 난 팝핀과 락킹, 계성고에 다닌 김기정은 비보이, 성광고 출신 손정훈은 힙합, 석한솔은 락킹을 추었다. 중·고교 댄스경연대회에 나가서 괜찮은 상도 받았다. 나중엔 전국규모의 서울 '필 더 펑크' '펑크스타일러스' 대회에도 출전해 배틀을 벌였다. 2012년 대구 전국체전 개막식 공연에도 초대를 받았다. 그때 하루 4시간 이상 연습을 했다. 연습은 주로 스텝댄스학원, 유니티, 브롱스 등 시내에 10여개 산재해 있는 댄스학원을 중심으로 진행됐다. 나는 집과 그곳만 오갔다.

◆우리 가족의 고향은 앞산

그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날 덜 인정하셨다. 그는 춤을 하나의 '도피처'로 이해하셨다. 어머니는 그래도 날 객관적으로 이해하려고 하셨다. 나중엔 '너 군대 갔다 온 뒤에도 춤추고 싶으면 널 인정할게'라고 용기를 주셨다.

어머니 고향은 충남 공주다. 외조부모는 농사를 지었고 모두 9남매를 낳았다. 어머니 위로 3명의 언니, 2명의 오빠, 아래 3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학창 시절 어머니는 '공주의 말괄량이 삐삐'였다. 얼굴만 여자처럼 생겼지 하는 행동은 거의 남자였다. 소꿉놀이도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런데 발레만은 여성스럽게 잘 녹여냈다. 학교 대표로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그 특별한 기질이 경기민요로 굳어질 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한때 앞산순환도로는 레스토랑 거리로 불렸다. 그 유명한 산마리노, 르네상스, 죽뷔페의 시초가 되는 마이하우스, 샬레 스위스 등이 줄을 이었다. 그 어름에 부모는 앞산 안지랑골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현재 안지랑골 초입 고령촌돼지란 가게 자리에서 '숲속의 산장'이란 레스토랑을 경영했다. 산장 2층에서 난 외동아들로 태어난다. 10년쯤 장사를 한 뒤 접는다. 아버지가 컬러링사업에 뛰어든 것이다. 나름 IT기술에 일가견 있어 휴대폰 컬러링 관련 특허기술을 소유했는데 대기업과 손잡는 과정에서 남좋은 일만 시키고 말았다. 결국 수억원 손실을 보게 된다. 집도 처분되지 않고 고이율 대출까지 물려 있었다. 사면초가였다.

31세 때 아버지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은 어머니는 3년간 암울한 동굴에 갇히게 된다. 1천원이 무섭다는 걸 그때 비로소 절감한다. 한때 아이가 다니던 대명중 옆 남덕초등 학부모회장이기도 했던 몸인데…. 난 나무 주변만 맴돌았다. 집에는 냉랭한 바람만 머물고 있었다.

◆장어로 돌파구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근처에서 보증금 3천만원을 구해 장사를 재개한다. 두 번째 가게는 레스토랑 '몽블랑'. 하지만 앞산순환도로는 구도로와 신도로로 양분되면서 상권도 반토막이 난다. 장사가 영 신통찮았다. 양식이 아니다 싶어 찜집, 그다음은 순두부로 품목을 바꾼다. 조금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이때 한 친구가 아버지에게 장어구이집을 권유한다. 그렇게 해서 13년 전 대덕골장어가 탄생한다. 부모의 슬픔 위에서 난 춤을 추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가게에도 쨍하고 햇살이 비치기 시작한다. 너무나 오래 추위에 떨다보면 영혼에도 진물이 생기는 법. 그걸 말리는 묘약은 뭘까? 어머니는 그게 '흥(예술)'이라 믿는다.

순두붓집 시절, 근처에 전라도식 경상도 한정식집 '솔내음'이 있었다. 남도에서 발원한 주체할 수 없는 끼를 가진 솔내음 여사장의 공간 한편에서 어머니의 소리공부가 시작되었다. 경기민요에 능한 강경서 선생을 모시고 소리를 배웠다. 그리고 조금 있다가 대덕문화전당에 각종 문화강좌가 생기기 시작한다. 마른 수로에 갇힌 고기가 물을 만난 격이었다. 2년간 한지공예, 2년간 서예, 그리고 벨리댄스와 드럼까지 배워나간다. 어두컴컴하기만 했던 어머니의 동공에 서기(瑞氣)가 몰려들었다. 그 귀착점은 바로 '경기민요'였다. 창부타령, 한강수타령, 양산도타령, 태평가, 노랫가락 등 경기민요의 주옥같은 레퍼토리에 하나씩 도전한다.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등과 달리 서울·경기권을 축으로 발달된 경기민요는 이춘희, 최창남 등의 목청에서도 엿볼 수 있듯 소프라노의 음역대를 넘어서는 비명에 가까운 초고음, 그리고 그걸 가야금 농현처럼 열두 갈래로 흩트려가면서 화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어머니는 일상의 고단한 시름을 그 위에 걸어놓고 말렸다.

어쩜 내 춤을 통해 삶을 더 깊게 들여다보게 됐다. 어머니는 소리를 딛고 손님과 더 원활하게 소통해가고…, 그리고 갈수록 눈시울이 원만구족해져만 가는 아버지. 저 펄럭거리는 장어의 몸짓 또한 나의 팝핀을 닮아가고 있었다.

글·사진=이춘호기자 leekh@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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