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5>] 김상규, 법관 되라는 부모 뜻 불구 무용가 길 선택…일본서 현대무용 배우고 귀국 후 신무용연구소 설립

  • 최미애
  • |
  • 입력 2021-02-22 08:10  |  수정 2021-04-22 16:19  |  발행일 2021-02-22 제20면
쉼 없는 창작활동·경북무용가協 이끌며 지역 무용발전 헌신…'춤쟁이' 인식 예술인으로 바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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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규 작품 '잃어버린 마음'.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이인석 컬렉션'>

여성들이 무용하는 것에 대한 인식도 좋지 않았던 시기, 대구 현대무용의 기반을 만들어나간 남성 무용가가 있었다. 무용가 김상규(1922~1989)다. 김상규는 현대무용의 개념을 정립해나가며 활발하게 작품활동을 했고, 무용 교육가로서 무용을 발전시키는 데도 힘썼다. 그는 전국 최초의 국공립현대무용단인 대구시립무용단이 만들어지는 데도 역할을 했다. 남성 무용가로 활동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김상규의 무용에 대한 열정은 꺾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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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6월4~6일 중앙국립극장에서 열린 제3회 김상규 신무용발표회 팸플릿. <대구문화예술아카이브 '이인석 컬렉션'>

무용가 활동 힘든 시기
현대무용 개념 정립하고
국공립무용단 창설 도움


◆낮에는 직장인, 밤에는 무용가

김상규는 1922년 5월25일 군위에서 부농인 김병호의 3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하면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후 그는 1934년 대구로 유학 와 수창초등을 다녔다.

김상규가 무용에 눈을 뜨게 된 건 1935~36년쯤이었다. 당시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의 문하생이었던 최승희와 조택원의 대구 공연을 본 김상규의 마음에는 무용에 대한 열망이 커졌다. 그러나 법관이 되기를 기대했던 부모님의 뜻에 따라 14세 때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도쿄전기학교와 와세다대 법학과를 다녔지만, 마음 한쪽에는 무용이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김상규는 도쿄에 있는 이시이 바쿠 무용연구소를 찾아가 이시이 바쿠의 문하생이 됐다.

귀국 이듬해인 1946년 5월 김상규는 '김상규 신무용연구소'를 열었다. 49년에는 한국전력(당시 남선전기회사)에 입사해 근무를 시작했으나 무용에 대한 열정은 여전했다. 그는 사무실 옥상에서도 연습했고, 저녁이면 사무실 책상을 치우고, 춤 연습을 하고 연구생들을 가르쳤다.

연구생이 늘어나자 49년 김상규는 첫 번째 발표회를 사흘간 만경관에서 오후 1·8시 두 차례 공연했다. 대구지역에서 생소한 현대무용 공연이었던 탓에 관객과 지역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집안에선 창피해서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하게 됐다는 얘기가 나오고 모친의 상심도 컸다. 김상규의 모친은 "아들을 낳아서 판검사 시키려고 일본에 유학 보냈지 춤쟁이 만들려고 보낸 것이 아니다"라며 별세하기까지 아들의 발표회를 보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발표회에서 연주하는 악사들을 위해 음식을 해와 "우리 아들 공연 잘하게 연주 잘해달라"고 부탁하며 뒷바라지에 힘썼다.

◆창작활동 외에 교육자로도 활동

김상규는 첫 발표회를 포함해 1978년까지 13차례 개인 발표회를 열고 여러 무용 작품을 발표했다. 6·25 전쟁 당시에는 대구로 무대를 옮겼던 중앙국립극장(키네마극장)에서 주로 공연을 했다. 발표회를 통해 소개된 그의 작품은 크게 자신의 삶과 주변을 투영시킨 작품, 우리 전통문화와 민족성을 담은 작품, 불교적 색채를 담고 있는 작품으로 나뉜다.

그는 작품 발표뿐만 아니라 무용발전을 위한 활동도 펼쳤다. 1957년부터 한국예총이 설립되기 이전인 61년까지 경북무용가협회를 만들어 이끌었다. 62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경북지부가 결성되면서 한국무용협회 대구경북지부에서도 활동했다. 59년부터 61년까지는 대구대학(현 영남대 전신)에서, 60년부터 62년까지 경북여자사범대학에 강의를 나가는 등 교육자로서의 활동도 활발했다.

66년부터 88년까지 22년 동안 안동교대에 재직하면서도 그의 창작활동은 이어졌다. 79년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는 '회귀(回歸)'라는 작품으로 참가해 우수상을 받고, 87년에 대본을 쓴 '산하'(안무 주연희)가 제9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안무상을 수상했다.

무용 분야에서 전방위적 활동을 펼쳤던 김상규는 89년 지병으로 안동병원에 입원했다가 병세가 악화하면서 경북대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다가 그해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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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예술인과의 교류도 활발

1950년대 김상규의 활동에서 눈에 띄는 건 예술인들과의 활발한 교류다. 김상규는 6·25 전쟁 당시 대구에서 설치된 문총구국대(文總救國隊)에 참여하며 시인 조지훈·구상·모윤숙·유치환·이영도·마해송 등의 문인을 비롯해 무용가들과 활동했다.

문총구국대 활동을 하면서 공연 연습으로 바빠지자 1955년쯤 직장인 한국전력을 그만두고 연구소 활동에 주력했다. 당시 그는 연구소를 마치면, 대구지역 예술인들이 모이는 향촌동 물랑루즈 다방, 돌체다방, 백조다방에 나가 막걸리를 마시며 예술인들과 교류했다.

그는 자신이 교류하던 시인 등 문인의 작품을 바탕으로 무용 작품을 만들기도 했다. 53년 제3회 발표회 때는 구상 시인의 시로 '희생(犧牲)'이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품이 '조국을 그리며 희생하는 겨레의 절개를 그린 춤'으로 소개가 되자, 경찰서에 불려가 조서를 받은 후에야 공연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활발했던 활동과 무용계에 남긴 업적에 비해 김상규의 자료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그의 혈육 중 현대무용을 했던 고(故) 김소라 대구가톨릭대 무용학과 교수의 집에 불이 나면서 보관 중이던 자료들이 상당 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지난해 이인석 르리앙 대표가 사진과 팸플릿 등 김상규 무용가 관련 자료를 문화예술 아카이브 사업을 진행 중인 대구시에 기증했다. 이로써 역사적 자료를 바탕으로 김상규 무용가를 재조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이 대표가 기증한 자료에는 김상규 무용가의 대표적인 활동인 1950년대 무용 발표회의 팸플릿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기증된 팸플릿에 실린 사진으로 당시 김상규의 활동을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팸플릿에는 후원사로 영남일보가 이름을 올렸던 흔적도 확인된다.

최미애기자 miaechoi21@yeongnam.com

공동기획  대구광역시

▨참고=한국 근대춤 인물사Ⅰ, 대구시사(1995), 대구예술3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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