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 중동면 우물리 우무실에 있는 수암종택. 수암 류진이 세상을 뜬 후 그가 살던 가실의 초가를 이웃 마을 우무실로 옮겨온 것이 지금의 수암종택이다. 수암종택은 풍산류씨 우천파의 종택으로 류심춘·류후조·류주목 등 쟁쟁한 유학자들이 이곳에서 태어나 가문의 명성을 더 높였다. |
1991년경 안동 하회마을의 풍산류씨(豊山柳氏) 서애(西厓) 종가의 충효당에서 '위빈명농기(渭濱明農記)' 필사본이 발견됐다. 표지를 비롯한 일부분이 훼손돼 있었고 군데군데 탈락된 글자들도 많았지만 '위빈명농기'는 17세기 전반기 경상도 상주(尙州)지역 일대의 농법을 담고 있었다. 앞서 나온 농서의 구조와도 달랐고 당대의 농법 수준이나 논리체계를 따른 것도 아니었다. '위빈명농기'는 지역의 농업 환경에서 유래한 특정한 농업기술과 지역의 내부 또는 외부에서 확보한 특별한 견문(見聞)이 첨가된 현실적인 농법의 지역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1617년 중동면 우물리 가실로 분가
경험·농부 고견·견문 종합해 편찬
이앙법·제초법 등 독특한 기술 소개
조카 류원지 1671년 내용 확대 개편
수암종택의 우천세가 현판. |
#1. 조선시대 지역 농서의 등장
우리나라 풍토에 맞춘 최초의 농서(農書)는 세종 때인 1429년에 편찬된 '농사직설(農事直設)'이다. 농사직설은 충청·전라·경상도 등 삼남 지방의 선진 농법과 관행 기술을 조사 정리한 것으로 이는 농사를 장려하는 권농(勸農)의 지침서가 되었고 이후 간행된 여러 가지 농서 출현의 계기가 되었다. 16세기까지 조정에서는 권농의 직무를 착실하게 수행하는 것을 지방 수령에 대한 중요한 평가기준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 농서 편찬은 농업기술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던 관료(官僚)에 의해 수행됐고, 대부분 난해한 한문으로 돼 있어 최종 수요자인 농민용이라기보다 지도자용이었다.
이와 함께 지역의 자연환경과 농법의 차이를 정리하고 편찬할 필요성이 지역적인 차원에서 점차 고조되었다. 16세기 중후반 이후에는 지역의 농업기술에 관심을 가지고 지역농서를 편찬하는 작업이 향촌의 지식인들에 의해 활발하게 진행된다. 이러한 지역농서는 향촌의 실제 농업기술을 제대로 파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농법을 설명하고 정리한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각종 질병과 심각한 굶주림에 시달렸다. 또한 17세기는 소빙기의 절정으로 냉해와 봄 가뭄, 폭염과 장마 등 이상기후가 이어지면서 농업은 피폐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지역농서 편찬은 현장에서 농사를 짓는 농부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국가의 권농책이나 조세 확보를 겨냥한 농업기술 개선책은 아니었다.
#2. 수암 류진의 '위빈명농기'
'위빈명농기'를 처음 발견하고 외부에 알린 사람은 이수건(李樹健) 영남대 교수다. 그는 이 농서의 저자로 서애 류성룡(柳成龍)의 셋째 아들인 수암(修巖) 류진(柳袗)을 지목했다. 류진은 선조 15년인 1582년 한양에서 태어나 10세 때부터 안동 하회마을에서 살았다. 그리고 36세인 1617년에 상주 중동면 우물리 가실(가사리)로 분가했다.
우물리는 팔공산·일월산·속리산 등 세 산이 모이고, 낙동강과 위천(胃川) 두 물줄기가 합쳐지는 '삼산이수(三山二水)'의 터전이다. 가실은 위천에 연한 마을로 개척 당시 가시덩굴이 우거져 '가시리'로 불리다 이후 선비(士)가 많이 배출돼 '가사리(佳士里)'로 바뀌었다고 한다. 류진이 가사리에 살던 집은 허술한 초가였다. 그는 위천의 초가에서 '위빈명농기'를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류진의 문집인 '수암집(修巖集)' 권3에 '제위빈명농기후(題渭濱明農記後)'가 있다. 본인이 어떤 과정을 거쳐 '위빈명농기'를 저술했는지를 설명하는 글이다. '애초에 오곡(五穀)을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농업기술에 무지했지만 하회에서 상주에 이거(移居)해 생활하면서 점차 농사일에 관심을 가지고 농사 지식을 습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근 노농(老農)에게 밭 갈고 김 매는(耕耘) 방법을 물어서 이를 기록함과 동시에 보고 들은 것을 추가해 위빈명농기를 지었다' 자신의 농사 경험과 노농의 고견(高見), 그리고 이러저러한 견문(見聞)을 종합해 농서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위빈명농기'를 저술한 이유를 '식력지계(食力之計)'로 삼고자 한 것이라 했다.
'위빈명농기'가 발견된 초기 학계에서는 한동안 저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 수암의 조카인 졸재(拙齋) 류원지(柳元之)의 문집인 졸재집(拙齋集) 권13에 '위빈명농기-전사문(田事門)'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여러 문서들과의 대조와 연구를 통해 현재는 1618년 무렵 류진이 '위빈명농기'를 지었고, 이를 근간으로 조카인 류원지가 여러 지역의 사례 등을 더 보충해 1671년 '전사문(田事門)'으로 확대 개편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류원지는 8세 때 조부 류성룡의 가르침을 받았고 조부의 타계 후에는 작은아버지인 류진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37세에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나 다음해인 1636년 류진이 세상을 떠나자 귀향했다. 하회의 충효당은 류원지가 지은 것이다.
'수암집' 권3에 수록된 '제위빈명농기후(題渭濱明農記後)'. 어떤 과정을 거쳐 위빈명농기를 저술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
#3. 위빈명농기의 농법
위빈명농기의 목차를 보면 종자 준비, 땅 가는 법, 잡초 없애는 법, 밭을 다스려 곡물 파종하는 법, 곡물 파종 적기, 황무지 개간하기, 황무지 판별법, 전답에 거름을 주어 땅을 기름지게 하는 법, 올벼 무논 재배법, 건파 재배법, 못자리 거름주기, 늙은 모 되살리기, 모 되심는 법, 화누법, 모 기르는 법, 마른 모 기르는 법, 볍씨, 보리 재배법, 목화 재배법, 녹두, 팥, 콩, 참깨, 잇꽃(紅花), 삼(大麻), 피, 수수 등 27항에 이른다.
먼저 종자 준비를 강조하면서 충해를 피하는 방법을 기술하고 있다. 이어 땅을 가는 경지법(耕地法)에서는 논밭·갯밭(浦田) 등 토양의 현황에 따라 봄갈이(春耕), 가을갈이(秋耕)의 차이, 단단한 흙(强土)를 약하게 만드는 방법, 무른 흙(弱土)를 강하게 만드는 방법 등이 소개돼 있다. 그리고 영남 일대의 견문기록을 소개하면서 간 논을 다시 갈아 뒤집는 반경(反耕)을 여러 번 하면 수확을 많이 거둘 수 있다고 강조한다.
황무지 개간(開墾)에 관련된 내용 가운데 특기할 만한 것은 갯밭의 개간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는 점이다. '반드시 소 7~8마리에 대형 쟁기를 메어서 갈아주고, 또한 50여 명의 사람을 써서 풀뿌리를 세밀하게 제거해야만 파종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기경(起耕) 방식에 대한 이해와 설명은 실제 농사 현장에서 터득한 생생한 경험과 견문에 근거한 것임에 분명하다.
논농사에 있어서 조선 후기의 가장 특징적이고 대표적인 농법은 이앙법(移秧法)이다. 이앙법은 못자리에서 모를 어느 정도 키운 다음에 본논으로 옮겨 심는 재배방법을 말하는데 바로 오늘날의 모내기다. 조선 초기의 이앙법은 가장 불리한 토양에서 한정적으로 행해지던 것이었다. 본답의 모 식재 시기를 상당 기간 미룰 수 있다는 이점은 냉해와 봄 가뭄의 피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이로 인해 물을 채운 논에 직접 씨를 뿌리는 수경직파(水耕直播)가 중심을 이루던 수전농업(水田農法)은 급격하게 이앙법으로 대체되기 시작했다.
'위빈명농기'의 수전농법도 기본적으로 이앙법을 채택하고 있다. 무논에서 모 기르는 법, 물이 부족해 적시에 모내기를 못해 모가 늙어버렸을 경우 그 모를 다시 사용할 수 있는 방법, 논에 물이 부족해 잡초가 무성하게 되었을 때의 제초법, 못자리에 비료를 주는 시비법(施肥法), 가뭄이 들었을 때 마른 모 기르는 양건앙법(養乾秧法) 등 이앙법에 관련된 다양한 기술과 방책을 마련했다.
특히 가뭄에 대처할 수 있는 제초법과 못자리 만드는 방법은 다른 농서에서는 확인하기 어려운 새롭고 독특한 기술들이다. 이러한 진전된 이앙법 관련 기술은 1655년 신속이 편찬한 '농가집성(農家集成)'에 경상도에서 수행하는 것이라는 단서가 붙어 동일하게 수록돼 있다. 이는 모내기 기술체계의 발달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위빈명농기'가 조선 농서 편찬의 흐름을 검토할 때 빠져서는 안 되는 대단히 의미 깊은 농서임을 말해준다.
수암 류진은 인조반정 이후 학행(學行)으로 추천돼 외직으로는 봉화현감·청도군수를 역임했고, 내직으로는 형조정랑을 지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 가실의 초가는 고손자인 류성노(柳聖魯)에 의해 바로 이웃한 우물리 우무실로 옮겨졌다. 현재의 수암종택이다. 강고(江皐) 류심춘(柳尋春), 낙파(洛波) 류후조(柳厚祚),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 등 쟁쟁한 유학자들이 바로 수암종택에서 태어나 퇴계학을 계승하며 풍산류씨 가문의 세력을 높였다. 그리고 상주는 예로부터 지금까지 주곡(主穀)인 미곡(米穀)을 생산하는 지역으로 이름 높게 남아 있다.
글=류혜숙<작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연구위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참고=상주시 누리집. 상주문화원 누리집. 비교민속학회 누리집. 한국민속대백과사전. 한국지명유래집
류혜숙 작가·박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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