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용준의 閑談漫筆] 천 냥 빚

  • 하용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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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14   |  발행일 2022-01-14 제22면   |  수정 2022-01-14 07:17
속담 속 '천 냥' 현재가치 환산
조선 중기 종9품 관원 녹봉
쌀 8·콩 4섬으로 엽전 24냥
현 '9급' 연봉 2400만원 치면
천 냥은 10억원 상당의 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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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언젠가부터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속담으로 '천 냥 빚도 말 한마디로 갚는다'는 표현을 흔하게 써 왔다. 이때 말하는 '천 냥 빚'은 큰 빚을 비유한 말이다. 그런데 이 '천 냥 빚'의 천 냥을 현재가치로 환산한다면 얼마나 큰 금액이 될까?

조선시대 화폐 단위인 '냥'과 현재의 그것인 '원'의 가치를 비교하기란 쉽지 않다. 시대별 물가 수준, 화폐 개혁 등 고려해야 할 사항이 하나둘이 아니다. 여러 날 고민하던 끝에 기지를 발휘하여 한 가지 묘안을 찾았다. 조선시대 말단 관직인 종9품 관원과 현재 9급 행정직 공무원의 연봉을 비교하기로 한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박봉이라는 공직자 연봉, 그것을 수평 비교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보았다.

현재 행정직 최하위인 9급의 연봉은 호봉과 직무에 따른 수당 차이는 있지만, 그 평균을 2천400만원 정도로 보기로 하자. 그렇다면 조선시대 종9품 최하급 관원의 녹봉은 연봉 기준으로 얼마나 될까.

조선 중기 기준으로 보면 종9품의 연간 녹봉은 쌀 8섬과 콩 4섬이었다. 쌀 1섬은 엽전 2냥에 해당되고 콩은 그것보다 조금 더 싸다. 쌀과 콩을 합친 12섬을 약산하여 엽전 24냥이라고 치자. 이로써 엽전 24냥은 2천400만원이라는 등식을 얻는다. 결국 조선 중기 1냥은 현재가치로 100만원에 맞먹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1돈은 10만원, 1푼은 1만원이 된다. 이는 어디까지나 조선 중기 기준이라는 점을 기억하자. 조선 후기로 갈수록 인플레이션이 심해져서 엽전의 화폐 가치는 현저히 떨어진다.

조선 중기의 한 냥이 현재가치, 즉 현가 100만원이라고 볼 때 천 냥은 현가 10억원에 상당하는 거금이다. 이걸 말 한마디로 갚는다고? 과연 어떤 말 한마디면 이러한 거액을 퉁칠 수 있을까? 아무리 말의 중요성을 강조한 표현이라고 해도 현실성이 다분히 결여되어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천량'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말 천량의 뜻은 개인 또는 한 집안의 재산이라는 뜻이다. '짙은천량'이란 말은 대대로 한 집안에 내려오는 재산이라는 뜻이다. 주로 권문 벌족의 집안이 이에 해당한다. 또 요즘에는 쓰이지 않는 한자어로 '천량(遷糧)'이 있다. 천량은 주거와 양식 문제를 아울러 일컫는 말이다.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생존 조건인 주거와 양식 즉 천량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더한다면 의복이다. 그래서 생존에 필수적인 요소를 현대어로는 의식주라고 부른다.

외적의 침입으로 말미암은 전쟁과 민중의 봉기에 의한 민란으로 또는 기근의 지속과 역병의 창궐로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도는 백성이 많았던 때에 우리 겨레는 불우한 남에게 인색하지 않았다. 고향을 떠나 유리걸식하는 유랑민과 황당인(荒唐人·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에 국적 불명으로 떠돌아다니던 외국인)에까지 빈 방을 내어주었고 처마 밑 마루도 제공했다. 또 다 같은 주린 뱃속에 묽은 나물죽이나마 몇 수저씩 나누어 먹었다. 이것이 바로 생존이 절박한 때에 어쩔 수 없이 지게 되는 주거와 양식의 빚이다. 신세를 진 사람이 은덕을 베풀어준 사람에게 좋은 말 한마디 사례로써 갚음을 대신할 수 있는 천량 빚인 것이다.

음력으로 섣달 한겨울이다. 춥다. 집 없는 설움은 한겨울을 더 춥게 느끼게 한다. 새해에 가장 큰 화두는 주거 안정임은 더 말할 것이 없다. 집값 안정, 더 나아가 먹을거리를 비롯한 물가 안정이다. 선량한 서민들은 천량 빚을 말 한마디로 갚으려고 하기보다 그저 애초부터 천량 빚을 지고 싶지 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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