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지대] 허울뿐인 대구의 '근대로의 여행'

  • 전가경 도서출판 사월의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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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17   |  발행일 2022-01-17 제25면   |  수정 2022-01-17 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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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경 도서출판 사월의눈 대표

고향이 서울인 나는 올해로 8년 차 대구시민이다. 유년 시절 잦은 전학으로 이사가 당연했다 보니 대구로 이사하게 될 때도 별다른 저항감이 없었다. 오히려 주변 지인들이 우려 섞인 목소리를 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조언이 있었다. "대구에 가거든 절대 서울과 연을 끊지 말아라." 그 뜻을 헤아리는 데는 몇 년이 걸렸다. 알고 보니 '우물 안 개구리'가 되지 말라는 스승의 깊은 경고였다.

우려와 달리 정착 초기 대구는 새로운 기회였다. 당시 소규모 사진책 출판을 막 시작했다. 첫 사진책을 발행하고, 두 번째 책을 제작하던 중에 대구로 이주했다. 이사 후 바로 실천한 것은 작업실 마련. 월세가 상대적으로 저렴한 대구에선 실현 가능한 꿈이었다. 다행히 좋은 공간을 발견하여 첫 작업실을 마련했다. 그 후 우리는 대구에서 활동하며 총 17종의 책을 발행했다. 출판 활동은 주변의 지지와 응원 속에서 한 해 한 해 성장했다. 분에 넘치게 '사옥'이라고 부를 만한 작업실을 대봉동에 마련할 수 있었다. 작업실은 대구라는 도시가 나에게 준 선물이었다.

작업실은 새로운 기회이자 여러 상징적 의미로 다가오는 장소였다. 1940년대 지어진 '일(一)'자 한옥을 하나 발견하게 되었고, 대구의 모 건축설계사무소에 개보수를 의뢰해 작은 마당도 생겼다. '아파트 키드'로 살아온 나에게 마당과 툇마루, 작은 정원이 있는 한옥 작업실은 고유한 시간과 공간을 표상했다. 계절 변화에 따른 곤충과 식물의 생태계를 배우게 되었고, 길고양이와 교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비록 현대적으로 리모델링한 한옥이지만 다층적이고 다면체적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장소는 홀로 정주하는 곳이 아닌, 문화예술 교육이 가능함으로써 지역민을 향해 열려 있는 곳이 되었다. 5G로 대변되는 한국의 초고속인터넷망에도 불구하고 지역과 서울의 문화 및 교육 수준 불균형에 놀랐고, 이를 점진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로 작업실을 기반으로 하는 프로그램 운영을 고안했다. 이후 여러 주제의 토크를 열었고, 소규모 전시를 기획했으며, 방학 시즌마다 강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단지 마당이 딸린 한옥 작업실을 하나 마련했을 뿐인데 콘텐츠 확장과 교육이 가능해졌다. '건물'이라는 이름으로 가시화되는 장소라는 것은 정량적 수치로는 절대 가늠할 수 없는 '생산성'을 산출하고 있었다. 그런 이곳에 작년부터 '재개발'이라는 유령이 배회한다.

"민간이 자본을 갖고서 개발하는 걸 막을 수 없어요." 갑자기 들이닥친 개발업자 때문에 구청에 민원을 넣었더니 들었던 말이다. "문화예술정책과는 재개발과는 무관합니다. 다른 부서에 문의하셔야 해요." 문화예술 창작 활동이 진행된 건물이 철거될 수 있다는데 무관하다는 게 납득이 안 갔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어느 사진가가 작업실을 촬영해 갔다. 대구시와 한국학중앙연구원이 주관하는 디지털 아카이브 구축에 우리 출판사가 기록대상이라는 것이다. 작업실을 두고서 재개발 동의와 기록이라는 명목의 촬영이 동시 진행되는 엇박자의 상황을 마주한다. 이 장소가 사라진다면 이 기록은 예산 낭비가 될 게 뻔하다. 서울을 떠나 찾고자 했던 대구의 의미가 곧 작업실이자 지금의 터이고 출판 활동이었다.

대구 중구청 건물 옥상에는 '근대로의 여행'이라는 슬로건이 우뚝 서 있다. 대구 시민이 스스로 가꾸는 오래된 가옥을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방치하는 이상 이 슬로건은 '인공 근대골목 조성'의 동의어에 불과하다. 관광이 절박하다면 '인공'이 아닌, 실제 삶을 돌보는 정책으로 대구는 선회해야 할 것이다.
전가경 <도서출판 사월의눈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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