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대구문화 아카이브 (27) 이두산] '3부자 독립 운동가' 광복군가 작사·작곡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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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2-01-24   |  발행일 2022-01-24 제20면   |  수정 2022-01-24 07:50
두 아들과 조선민족혁명당에 참여 제국주의 日 타도 '동방전우' 발간, 사장 겸 주필 맡아
임시정부·한국광복군사령부 요직 역임…항일 문필활동·군가 제작하며 독립운동 최일선서 활약

광복군가

이두산은 독립운동가이자 군인, 언론인, 음악가이기도 하다. 그의 장남 이정호와 며느리 한태은, 차남 이동호 역시 독립운동에 투신해 3부자 독립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이두산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 22세때 중국으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민족혁명당·조선의용대·한국광복군 등에서 활동했으며 임시정부 법무·내무부 차장, 광복군총사령부 정훈처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1930년대 후반 한국과 중국, 베트남 등 아시아 피압박국가와의 반일 연대투쟁을 목적으로 '한성(韓聲)' '동방전우(東方戰友)'등의 잡지를 창간해 대표적인 논객으로 참여했으며 '최근한국의사열전'등을 출간했다. 또한 광복군이 즐겨 부르던 '광복군가(광복군행진곡)'와 '선봉대가'를 직접 작사·작곡하기도 했다.

◆치열했던 삶과 생애

이두산은 1896년 7월26일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명곡리 686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현수였으나 1930년 전후 중국에서 이두산 또는 이연호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1940년대에는 이삼광·이일정·이우봉·장일봉·김항·황신국이라는 이명(異名)도 함께 썼다. 합천이씨인 그는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조부와 부친 슬하의 비교적 부유한 가정에서 12형제가 함께 자랐다. 이두산은 조암교회(현 대구 월배교회)를 다니면서 미국 북장로교가 설립한 대남학교(현 대구 종로초등학교 전신)와 계성학교를 졸업하고, 역시 기독교 계통 학교인 평양 숭실전문학교를 다녔다. 대구 청라언덕에 있는 노래비 '동무생각'을 작곡한 박태준의 계성·숭실전문학교 선배이기도 하다. 그가 군가를 직접 작사·작곡할 수 있었던 건 어릴 때부터 음악을 가까이한 기독교적 학습배경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두산은 숭실학교를 다니다 1917년 중국으로 정치적 망명을 결행한다. 1919년 4월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무장투쟁만이 독립의 길이라고 여기고 이듬해 임정 산하 육군무관학교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1920년 고향인 대구로 돌아와 임정이 발행한 독립공채를 모집하다 일경에 발각돼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1년간 옥고를 치렀다. 1925년 두 아들(정호·동호)을 데리고 다시 상하이로 간 그는 임정 외곽단체인 병인의용대에서 활동했다. 장남과 함께 푸젠성 샤먼대에서 공부한 그는 1930년 한국독립당 창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35년 좌·우합작 독립운동단체인 조선민족혁명당에 두 아들과 함께 참여했다. 39년 '동방전우'를 발간해 사장 겸 주필로 활동하고, 조선의용대의 기관지인 '조선의용대통신' 편집장을 맡아 일제에 맞섰다.

이두산은 1930년대 후반에 조직된 조선의용대에서 유일하게 3부자가 함께 활동하고 40년대 임시정부와 한국광복군사령부의 요직을 역임했다. 그는 문필활동 및 광복군가 제작 등을 매개로 독립운동의 중심에 섰을 뿐 아니라, 최일선에서 활약한 인물이다.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에 능통한 그는 광저우와 구이린 등 중국 남부지방에서 항일 문필활동을 함으로써 중국인들에 더 많이 알려졌다.

이즈음 그의 장남 이정호(건국훈장 애국장)는 광복군으로 활동하며 임시의정원 경상도의원으로 참여했다. 광복 후 총무처 상훈국장을 거쳐 영남대 영문과 교수를 역임한 뒤 세 아들을 따라서 부인 한태은 지사(건국훈장 애족장)와 함께 도미했다. 이정호·한태은 부부는 4남1녀를 뒀는데 차남 이지웅(81) 전 건설협회 대구지회장과 딸 이혜란(78·<주>서한 김을영 회장 부인) 여사가 대구에서 살고 있다. 이두산의 차남 이동호는 조선의용대에서 팔로군으로 활동하다 북한으로 가 인민군 대좌를 지낸 것으로 알려졌다. 1946년 국내에 돌아온 이두산은 진보정당인 조선대중당을 창당해 활동하다 6·25전쟁 중 납북됐거나 월북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동방전우
이두산이 발행한 '동방전우'

◆조국독립을 향한 언론가로서의 선전 활동

이두산은 무장투쟁보다 전선에서의 언론·선전활동에 두각을 나타냈다. 광복군 정훈처장을 역임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임시정부의 여당 한국독립당이 상하이에서 발간한 기관지 '한성(韓聲)' '한보(韓報)'와는 별도로 1932년 한국독립당 광둥지부의 '한성(韓聲·The Voice of Korea)'발간을 주도했다. 이두산은 발간사에서 "이 선전 작업(한성 발간)은 혁명 전선에서 제일 중요한 급무"라고 강조했다. 그는 발행인으로서 '이두산' '두산' '두' 'Lee Doo San' 등 이름으로 12편의 글을 발표했다. 이는 전체 기고문의 25%를 차지한다. 이어 35년에는 중국어로 '최근한국의사열전'을 펴냈다. 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38년 2월부터 10월 중순까지 60만자에 달하는 원고를 써 120여 차례 일본제국주의 타도 방송을 했다.

이두산이 발간한 동방전우(1939년 1월15일 창간~1942년 4월)에는 본인 이외에 165명의 집필진이 참여해 수많은 글을 발표했다. 동방이 합세해 제국주의 일본을 타도하자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그는 당시 상황을 "야생개 한 마리가 원동(遠東) 곳곳을 돌아다니면서 미친 듯이 짖고 소란을 피우고 있다"고 묘사하며 일본을 맹비난했다. 이두산은 특히 동남아 약소국가와의 연대와 관련, 베트남에 주목했는데 베트남 관련 기사만 17편에 이른다. 이 기사는 베트남 독립운동지도자인 호찌민 진영에서 제공한 것으로 알려진다. 1940년 그는 또한 조선의용대 편집주임으로 '조선의용대통신'을 발행하고 이듬해 '소문장(小文章)'을 펴내기도 했다.

광복군가
이두산이 작사·작곡한 '광복군 행진곡'.

◆군가 제작 등 음악가로서의 업적

삼천만 대중 부르는 소리에/젊은 가슴 붉은 피는 펄펄 뛰고/반만년 역사 씩씩한 정기에/광복군의 깃발 높이 휘날린다/…/광복군의 사명 무겁고 크도다/…/한 맘 한뜻 용감히 앞서서 가세/독립 독립 조국광복 민주국가 세워보세(1942년 작 광복군가)

"백두산이 높이 솟아 길이 지키고/…/우리들은 삼천만의 대중 앞에서/힘차게 걷고 있는 선봉대다(1938년 작 선봉대가)

동무들아 굳게굳게 단결해/생사를 같이 하고/…/우리들은 피끓는 젊은이/혁명군의 선봉대/(혁명가)

뛰어난 문장가인 이두산은 또한 위대한 음악가다. 작곡은 물론 가사까지 직접 붙여 창작했다. 광복군이 즐겨 부르던 '광복군가(광복군행진곡)'와 '선봉대가'는 그의 대표곡이다. 특히 광복군가는 행진곡풍 부점(附點) 리듬으로 힘차며, 선율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명곡이다. 또한 '민주국가 세워보세'라는 마지막 가사에서 알 수 있듯 임시정부의 건국이념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음악가로서 이두산은 같은 대구출신으로 내선일체를 공고히 하기 위한 경성음악회를 조직했던 현제명과 지원병장행가를 지어 조선 청년의 2차대전 출병을 독려한 박태준과 비교가 된다.

'혁명가'는 이두산의 장남 이정호가 작사·작곡했다. 이 곡은 광복군 제1지대가로 지정됐다. 이정호는 이외에도 '중국의 광활한 대지 위에'(의용군의 행진곡, 조선의용군행진곡으로 바뀜)를 작사·작곡했는데, 둘은 부자(父子) 독립운동가인 동시에 음악가인 셈이다.
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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